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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를리너 Feb 25. 2025

나를 찾는 여행

'눈부신 안부(백수린, 문학동네)'를 읽고

Alles ist noch unentschieden. Man kann werden, was man will.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어.


선자 이모는 루이제 린제의 ‘생의 한가운데서’의 글귀를 적어놓는다. 카지노 게임는 선자 이모를 동경한다. 희망이 희미해진 삶에서, 이 문장은 얼마나 큰 힘을 가졌는지.


살아가며 많은 것을 잃었었다. 실직했었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매일 조금씩 젊음과 이별한다.

선자 이모는 첫사랑의 부재 속에, 상실의 아픔을 안고 삶을 마감한다. 카지노 게임는 가스 사고로 언니‘해리’를 잃었다. 한수는 엄마인 선자 이모를 뇌종양으로 떠나보낸다.


이 소설은 해미와 선자 이모 그리고 한수의 상실과 부재의 이야기다. 난 해미의 삶을 동행하면서, 많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학 때 문학 동아리를 들었던 것, 독일 중부 도시(해미는 G 도시) 유학 경험, 소설가의 꿈까지.


카지노 게임의 언니가 사고로 죽고, 카지노 게임의 가족은 쪼개진다. 아버지를 한국에 남겨두고 엄마는 신학 공부를 위해 독일로 유학을 떠난다. 카지노 게임는 엄마를 따라 독일에 가서 삶을 이어 간다. 카지노 게임에게는 파독 간호사들의 자녀 레나와 한수가 있었고, 내게는 한인 교회에서 만난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자녀 교민 2세들이 있었다.


소설 속 주인공이 이처럼 나와 닮았다니, 책장이 빠르게 넘겨졌다.

문학 동아리에서 만난 나의 우재를 떠올렸다. 통영 출신의 경상도 사투리가 투박했던 공대 남학생. 이름조차 희미한 그를 십수 년이 흐른 뒤 다시 만났다면? 해미와 우재의 풋풋한 첫사랑 그리고 재회의 설렘은, 나의 일상을 말랑하게 만들었다.


이야기는 문학 동아리에서 만난 해미가 우재를 재회하여, 두 번째 사랑을 꽃피우는 이야기로 흘러가진 않았다.

우재는 카지노 게임의 속에서 잠자던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이모의 이야기를.


카지노 게임는 선자 이모의 일기장을 읽고 선자 이모의 첫사랑 K.H. 을 찾아주기로 한다. 발자취를 찾고 단서를 모은다. 카지노 게임가 작가가 되고자 하는 이유.

해미의 소설가의 꿈을 응원했던 선자 이모는, 해미가 글을 쓰도록 이끈다.


독일의 파독 간호사들과 광부로 떠난 한인 교포들을 한인 교회 커뮤니티에서 만났었다.

독일과 한국의 문화에 대한 졸업 논문을 쓰면서 독일 한인 교포 1세대와 2세대를 인터뷰했다. 시댁 가족들에게 샐러드를 대접하는 간호사. 이제 한국말이 어눌한 그들. 그들의 한국은 1960년대에 머물러 있었다. 외로움이 힘들어 한국에 돌아오고 싶은 교포 1세대들. 한국어를 할 수 있지만 정체성은 독일인인 교포 2세대들.


생활이 궁핍한 유학생에게 풍족한 한국 음식을 대접했던 정 많은 파독 간호사.

외국에 가면 한국인을 더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검은 머리, 눈동자가 모인 쉴만한 공간이었던 한인 커뮤니티의 추억이 살아났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60년대 파독 간호사들 광부의 한국 송환 문제, 광주사태 등 선자 이모를 둘러싼 역사의 현장들을 통해 내 삶의 일부인 독일 파독 간호사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해미는 선자 이모의 첫사랑을 추적하다가 여러 번 덫에 걸린다.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찾는 것 같은 덫. 소설은 나에게 K.H. 를 함께 찾도록 강요한다. K.H.라는 이니셜을 찾는 과정은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을 읽는 것처럼 긴장감으로 여러 번 소용돌이쳤다.


한수는 엄마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무력감을 느낀다. 이는 나에게도 익숙한 감정이다. 아버지의 암 수술을 앞두었던 내가 그려졌다. 결국 엄마를 잃은 한수를 위로한 것은 엄마의 첫사랑을 찾아주는 것.


선자 이모는 천근호를 찾았다. 카지노 게임가 찾아주었다. 오래 걸어온 종착지는 내 생각을 뒤엎었다. 선자 이모의 첫사랑은 여자였던 것.


삶이 영화보다 극적으로 슬프고 잔인해질 수 있다는 걸 느낀 적이 있다. 이러한 결말이 나를 많이 당황하게 하진 않았다. 단지, 선자 이모를 위해 남자인 척 천근호로 편지를 썼었던 카지노 게임가 걱정되었다.


다행히 천근호는 모두에게 구원이 될 편지를 남긴다. 소설 속 선자 이모의 첫사랑도 현실을 닮아 있었기에. 첫사랑 천근호의 편지는 해미와 나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선자 이모는 카지노 게임와 나에게 삶을 껴안으라고 부추겼다.

소설 속 베를린 슈프레 강변에서 나체로 일광욕하던 베를린 시민들, 더 이상 감미로운 독일의 자연을 모르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고 고백한 선자 이모처럼 나 또한 이 소설을 모르던 시절로는 돌아갈 수 없음을 느꼈다. 상실했던 것들을 온전히 보내줄 수 있었다. 그 외롭고 고통스러웠던 길을 포기하지 않았던 나에게 자긍심을 느끼게 해 주어서.


긴 여행을 마치고, 우재에게 돌아가는 카지노 게임에 고마웠다. 긴 슬픔을 끝내고, 목을 내밀어 나은 곳으로 나아가는 카지노 게임처럼, 나도 그러겠다고 마음먹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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