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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로니카의 참견 Mar 28. 2025

어떤 사별

이해받지 못할 소리

지난 2월. 시온라인 카지노 게임가 세상을 떠나셨다. 90세가 넘고 91세가 되었을 때 '어머니, 백 세 파이팅!'하고 새해 인사를 드린 지 불과 한 달이었다. 갑자기섬망이 심해지시고 인지가 급격히 떨어지셔서 주간 돌봄 시설에 다니시면 어떨까 하는 의견에 따라 노인 장기 요양 급여를 신청하기 위해 모시고 병원으로, 주민자치센터로 건강 보험 공단으로 온종일 외출을 하신지난 설 직전, 집으로 돌아오신 어머님이 갑자기 누우시더니 못 일어나셔서 급하게 병원으로 모셨다는 소식에 이어 심부전 진단을 받고 중환자실에 입원하셨다는 소식, 그리고 섬망이 더욱 심하게 와 두 팔을 침대에 묶었다는 소식, 혈색소 수치가 급격히 떨어져 수혈을 연이어 받고 계시다는 소식, 혈변을 본다는 소식에 이르러 남편이 내게 조심스레 물어왔다.

'당신 소견은 어때?'

'나야 뭐 의사는 아니니까..... 굳이 말하지만...... 잘해야 일주일? 맘 단디 먹고 준비합시다.....'

기관 절개를 해야 할 수도 있는데 어떻게 하겠느냐는 의사의 말에 내 의견을 물어오시는시숙에게, '내 친정어머니가91세이시고 혈변까지 보는 상황이면 더 이상 어머니를 괴롭히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라는 의견을 냈었다. 그날 밤 시숙께서 남편에게,' 살아계신 어머니를 마지막 보고 싶으면 지금 내려오는 것이 좋겠다'라는 전갈이 왔다. 나는 차분하게 가방을 싸고 옷을 입고 있는데, '혹시 모르니 당신은 기다렸다가 연락 줄 테니 아이들과 만나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오라'는 남편의 의견에 망설이다가 일단 기다리기로 했다. 남편은 어머님이 다시 소생할 수도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혼자서한숨도 못 자고 밤을 지새우다가 깜박 졸았다고 생각하고 놀라 휴대폰을 확인하니, 새벽 5시 반 '가셨다.'라는 남편의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일단사무실에 나가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하고 특별 휴가를 내고 어차피 조문 가야 한다는 친구 부부의 차를 함께 타고남편의 고향 상주로 출발했다. 가는 내내 이상하리만큼 마음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작년 추석 즈음, 나는 남편과 아이들에게 '나는 어머니 돌아가셨다고 하면 그때나 가야 할 것 같아'라고 내가 남편과 아이들에게 말했었다. 시댁에 발을 끊은 지 5년 만이었다. 아주 짧은 순간 남편의 얼굴을 스친 실망감을 나는 눈치챘지만남편은 차마 무어라 말하지 못한 채 일단 수용해 주었다. 코로나 직전 해에 나의 결혼 생활은 25주년을 맞았었다. 강화 여자와 경북 상주 남자가 만나 25년을 함께 하면서 다행히 우리 둘은 비교적 잘 맞는 커플이었고 두 딸도 결혼 생활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갖게 될 정도로 주변 사람들에게도 모범(?)적인 결혼 생활을 해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시어머님과 남편의 형제들, 나의 웃 동서들을 포함한 경상도 사람들과 나는 잘 맞지 않았다. 언어도, 정서도, 음식을 포함한 모든 문화와 사고방식들이 맞지 않았다. 나는 인내와 사랑으로 그 모든 맞지 않는 것들을 수용하고 억지로 사랑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일명 '며느리 증후군'이라는 신경증적인 증상들이 내게서 나오기 시작했다. 명절이든 생신이든 제사든 시댁에 가야 하는 날을 앞두고 이런저런 몸의 증상으로 몹시 앓곤 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타나는 증상들은 이틀이고 삼일이고 시댁만 다녀오고 나면 나를 초주검으로 만들곤 했다.


결혼 전 처음 인사를 드리기 위해 방문한 시댁 마당에서 만난 어머님은 '형사' 같다고 느꼈다. 마치 피의자를 앞에 둔 형사처럼 예리한 눈빛으로 나를 관찰하며 '먼 길 오느라 애쓰셨습니다.'라며 웃지도 않으시고 다짜고짜 '들어가서 옷 갈아입으라'라고 하셨다. 나는 검정 스커트에 빨간 재킷의 투피스 정장을 입고 있었다. 아버님은 안 계셨고 인사 전이었지만 당황한 스물여덟 살 어린 아가씨였던 나는 안으로 들어가 티셔츠와 청바지로 갈아입으며 미리 그려 본 첫 대면과 인사부터 막막함과 낭패감을 느꼈다. 고압적이고 차가운 시온라인 카지노 게임의 표정과 혼자 누워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던 그날이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결혼을 하고도 아이를 낳고도 나는 시댁에 드나드는 십 년 가까이를 가족의 일원이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나 빼고 다 같은 편을 먹는 것도 같고,소소하고 자질구레한 수많은 말과 행동으로 나는 내내 상처받았다. 물론 그것은 전적으로 나 혼자만의 피해의식일 수 있고 그 누구도 그런 의도도 그런 마음도 먹은 적 없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노력했다. 물심양면으로 최선을 다했다. 그저 남편 마음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유독 시댁과 관련한 부정적인 말이 나올라 치면 그는 많이 노여워하거나 말문을 닫았다. 그런 그의 마음이 딱해서 최대한 인내하고 최대한 감수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십 년이 지나고 이십 년이 지났지만 누구보다 자칭 경우 밝으시고 고귀하시고 품격 있게 말씀하시는 시어머님은, 내가 삼십 년 넘게 시골에서 겪고 사는 진료소 관내 노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집에 시집온 네 팔자이니 무조건 감수하라'라는 어머님의 말씀은 인권 유린처럼 여겨졌고, 어떤 의견을 냈을 때'재수 씨는 가만히 있으라'는 시숙의 말은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게 했다.


"나는 병이 들었고, 온라인 카지노 게임이나 상주 식구들을 안 봐야 내가 살겠는데, 그러려면 당신하고 이혼하는 방법뿐이야.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당신을 이렇게 사랑하고 당신 아니면 안 되겠는데, 우리는 이혼을 해야만 할까?"

결혼 25주년을 맞던 그 해에 형님네와 집 문제로 얽혀 억울함이 태산 같이 쌓였던 그 1월 1일에, 결국 나는 남편에게 호소를 할 수밖에 없었다. 공황 장애가 왔고 베란다 문을 열고 섰던 나는 공포에 휩싸여 서둘러 밖으로 나가 뛰어내리는 대신 눈 쌓인 아파트 단지를 열 바퀴를 돌고 들어가 그렇게 말했었다. 남편은 참담해했고 두려워했다. 남편이 갑자기 한 달 새 체중이 7킬로그램이 빠졌고 건강검진 상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결과를 받은 후 갑자기 내게 모든 것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내게 상주에 내려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일이 있으면 명절이건 제사건 혼자 또는 아이들과 다녀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저 남편의 마음이 상하지만 않으면 이겨낼 수 있었다. 30년을 한결같이 내게 중요한 우선순위는 하느님 다음으로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일 년에 한 번뿐인 시온라인 카지노 게임 생일인데 안 오면 되나 안 되나! 말해 봐라!!'라고 어머님이 전화로 호통을 치셔도, 그저 죄송합니다. 한 마디로 대응할 수 있었다. 시댁에 가지 않는 것이 죄스럽고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편하고 자유로웠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남편은 심리상담을 받았다고 했다. 중간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체중이 급격히 빠지니 스스로 두려웠던 모양이었다. 상담 교수님의 답은 그랬다고 했다. '아내분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줘도 잘못되지 않을 겁니다.'


그 해, 추석에 남편은 아이들과 시댁에 명절을 지내러 내려갔고 나는 혼자 집에서 이틀을 쉬었다. 날씨는 청명했고 코스모스가 아름답게 흐드러진 가을 나들길을 친구와 함께 걷고 단골 밥집에 가서 제육볶음에 낮술도 한 잔 했다. 결혼 25년 만에 처음 하고 싶은 것을 하며 명절을 느긋하게 보냈다. 좋았다. 남편에게 미안하지도, 아이들에게 부끄럽지도 않았다. 25년 간 최선을 다하여 책임과 의무를 했고 인내했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온라인 카지노 게임의 부고를 듣고서야 5년 만에 시댁으로 향하게 되었다. 유감스럽게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 외에 미안함, 송구함, 죄책감, 후회 같은 의례 느낄 만도 한 감정들도 없었다. 나는 내려가는 내내 참으로 건조하게 자신의 감정상태를 바라보며그저 무덤덤하고평온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다고 온라인 카지노 게임이 싫거나 미운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경상도 지역의 특성 때문에 여성이라는 이유로 가난하게 그리고 핍박을 받으면서 90년을 어둠 속에서 살았던 온라인 카지노 게임의 고단한 삶이 가엾지만, 늘 열망하던 대로 열흘 남짓 중환자실에 누워 자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잠자듯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해 감사하다는 마음뿐이었다.


장례식이 있던 날은 설 밑이었지만혹한도 없이 봄날처럼 햇살이 환하고 따뜻했다. 정남향의 선산에 오른 어머님의 자녀 4남매와 그들의 자녀들과 증손주들, 그리고 사촌들, 육촌들까지 유골함을 매장한 후 모두가양지바른 풀밭에 마치 봄소풍 온 사람들처럼 도시락을 먹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어머님은 자신의 삶에 후회가 있을까?' 있을 수 있겠지만 내가 본 어머님은 큰 후회가 없을 것 같았다. 내가 본 삼 십 년간 어머님은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하는 스타일이셨기 때문이다. 대신막연하게 생각해 오던 어머님과의 그 어떤 사별에 대해 이런 방식으로 마침표를 찍었다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나보다 고통스러운 사람에게는 이해받지 못할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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