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에 다니는 중이다. 인문정보학과로 알고 지원했지만 배우는 것은 '디지털인문학'이다. 이미 우리에겐 '디지털'도 친숙하고, '인문학'도 친숙한데, '디지털인문학'이란 단어는 어쩐지 생소할지도. 그런데 이 말조차 '디지털 인문학'이라고 써야 하는지, '디지털인문학'이라고 써야 하는지 정의가 미비한 상태다.
그만큼 학계에선 논란도 적지 않은 분과지만 어쨌든 신생 학문이라 그런지 이 생태계에 속한 학자들은 다들 열정이 넘치고, 감각이 젊고 팽팽하다. 아무튼 내가 받은 인상은 그렇다.
(나는 서평 할 책 제목에 따라 디지털 인문학이라고 쓰겠다. 서평이니 부디 날 혼내지 마시라.)
영감을 찾아 어디든 산책 다니듯 살다 보니 난 벌써 디지털 인문학 생태계에 흘러 흘러 입문한 지 1년이다. 원래는 작년부터 내 소고를 바로바로 적고 싶었는데. 머리가 무겁고 게으른 성정은 도무지 어쩔 수가 없다. 다행히 이번 학기에는 '책 읽기' 수업이 개설되었다. 수업 이름은 이게 아닌데. 아무튼 책을 읽는 시간이라 이렇게 독후감을 쓸 기회가 생겨 기쁘다. 운 좋게도 난 이 책의 세명의 저자 중, 주저자이신 김현 교수님 수업을 교수님 퇴임 전, 딱 한번 수학한 경험이 있는데 정말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덕분에 교수님이 직접 주신 책으로 이렇게 서평을 쓴다. (사인이라도 받아둘 걸.)
혹자는 디지털 민문학을 단순히 아날로그 정보를 디지털로 전산화하는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1차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그게 전부가 아닌 것은 명백하다.
이 책에서는 디지털 인문학을 '정보통신기술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방식으로 수행하는 인문학 연구와 교육, 그리고 이와 관계된 창조적인 저작활동'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로 지난 기간, 진척된 연구와 실사례들이 잘 정리가 되어있어 이 학문에 관심 있는 조심 자라면 어렵지 않게 안내받을 수 있는 아주 좋은 가이드북이다.
본문 중에 나오는 이 코끼리 그림은 많은 사람이 이 디지털 인문학이라는 화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쉽게 보여준다. 사실 난 이 코끼리 그림을 '포스트모더니즘' 패더라임을 공부할 때 처음 본 적이 있다. 우리가 거대한 코끼리의 각자 다른 부분을 만지며 '이것을 코끼리다.'라고 각자 대상의 일부만을 보고 전체를 오판할 수도 있다는 뜻에서 즉, '거대한 담론에 대한 혼란하고 모호한 상태'로 흔히 비유하는 그림이다.디지털 인문학에 대한 정의와 논점이 분분함을 이 코끼리그림으로 비유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내겐 흥미로웠다.
반면 포스트-포스트 모더니즘과 같이 해체주의(post-modernism)에 대한 강한 회의를 겪은 다음 담론을 구상하는 인류의 현시점에서 '각자 다른 이해를 두고 싸울게 아니라 협력해야 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에,약간은 고루하게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다음 장을 펼치면 내 삐딱한 의문은 파도에 쓸려나가는 모래성처럼 차분해진다.
저자의 말처럼 디지털 인문학은 전통 인문학이 닦아놓은 길 위에서 그것을 배우고 모방하며 준행하는 동시에, 디지털 환경에서 그 세계를 재현하려는 노력이자 또 다른 의미를 찾아가는 창조적 '협력'이다.
디지털 인문학은 '철학', '역사', '문학'과 같이 하나의 분과 학문으로 분류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인문학의 모든 영역에서 시도할 수 있는 새로운 연구 방법이자 '연구하는 자세'다
디지털 인문학 입문, "디지털 인문학의 한국적 전개"중에서. 306p
인용한 부분이, 이 책에 핵심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이 쓴 글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철학을 공부한다는 건 철학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는 말을 좋아하는 편인데. 이 책의 주 저자이신 김현 교수님을 실제 뵌 것은 한 학기가 전부인데도 철학을 전공하신 분답게 철학적으로 사고하는 분이었다. 또한 한 곳에 머무는 것보단 사고(Thinking)의 경계에 머물 줄 아는 분이셨다. 디지털 인문학을 '새롭게 연구하는 자세'라고 말한 앞선 문장에서, 그가 소싯적 품었을 반항적인 모험심을 엿볼 수 있다.
책을 학우들과 함께 읽다 이야기가 나온 것이, '여러분은 디지털 인문학은 어느 분과로 서류에 입력하나요?'였는데. 다들 생각과 그 답변이 달랐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면서, 김현 교수님께서 마지막 수업에서 하셨던 말씀이 생각났다. "디지털과 인문학 둘 다 잘해야 한다"라고 작게 웃으시면서 하시던 모습.
산업 시대 이후로 인간은 전문화라는 미명아래 파편화되고 분업화되었다. 이로써 언제든 대체할 수 있는 '도구적 인간'을 스스로 자처하는 일은 안타깝게도 헛헛한 우리의 현실이다. 띄어쓰기도 어떻게 할 건지 아직 정의하지 못한 디지털 인문학을 제대로 서류에, 혹은 정규 시스템에 입력할 수 없다는 비극은 어쩌면 '멀리서 읽으면' 희극이다.
대학이라는 뜻의 Academy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연 자유로운 학술 토론의 장이었던 아카데미아(Ἀκαδημία)에서 그 어원을 가진다. 또한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런 자유로운 논쟁 문화가 아고라(Agora)라는 시민들이 자유롭게 토론하고 정치적 의사결정을 하는 '광장'에서 자주 열렸다고 하는데, 아카데미아든, 아고라든 누구나 다중 지성에 접근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어쩐지 이 책의 저자들이 디지털 세계로 옮겨오고자 하는 인간의 세계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사실 교수님이 디지털 환경에 재현하려는 세상은 산업 시대부터 분절화된 인간 세상이 아닌,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가 아니었을까. 정의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어쩌면 정의할 생각이 애초에 없었을지도. 앞으로 더 견고해질 디지털 세계에 인문 정신은 우리에게 무기이자 방패인 것을, 누구보다 일찍 깨쳤을지도.
그냥 그런 감상을 이 기회를 빌어 적어본다.
글을 쓰다 보면, 글이 나를 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때가 있다.
도행지이성(道行之而成), '길은 나아가야 난다.'
장자의 말이다.가장 멀리 나는 새가 늘 그렇듯, 그도 그렇게 나아갔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