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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자타 Jan 18. 2025

숭고로서의 카지노 게임 사이트

<하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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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한 광경 앞에서 인간은 말문이 막힌다. 압도적 이미지가 그것을 언어로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를 실패하게 하는 탓이다. 적합한 수식어를 고르는 일은 요원하고 고심 끝에 발화된 말은 휘발되기 십상이다. 그러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눈앞에 시선을 고정한 채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감각을 그저 받아들이는 것뿐. 영화 <하얼빈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일어난 사건을 관객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태도로 바라보고 기억하기를 제안한다.

<하얼빈은 말이 없다. 서사는 고루하고 대사는 식상하다. 이미 자명한 역사적 사실은 제약이 되어 새로운 문장을 빚는 것을 방해한다. “죽은 동지들의 목숨”은 유령처럼 영화 속 인물들의 입에서 거듭 반복되며 무게감을 잃고, “돈을 쏟아부어 발전시켰다”는 이데올로기와 “백성들이 제일 골칫거리”라는 상투적 표현은 여지없이 이등박문(릴리 프랭키)의 입에서 뱉어진다. 숨겨진 밀정이 결국은 회개하여 복수를 완성카지노 게임 사이트는 복선은 뻔하고, 의심과 진심 사이를 오가는 긴박한 상황 속 인물들 간의 긴장감은 예상보다 건조하고 밋밋하다.

그러나 <하얼빈의 서사적 빈약함은 실상 필연적이다.

감히 상상해 본다. 자신의 믿음이 불러온 파국을 홀로 살아남아 감당해야 하는 인간의 심정. 어쩌면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를 미래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매 순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인간의 고뇌. 생사를 함께 오갔던 동지를 의심하고 끝내 배신당하고 척결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비애. 오로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살겠다는 맹세를 손가락을 잘라 피로 써 내려가는 인간의 의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는 순간을 위해 준비하고 도모하고 실행하는 인간의 각오. 생각하면 할수록, 그려보면 볼수록 목구멍 저 언저리 어딘가가 먹먹해진다. 가늠조차 힘겹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는 그들의 유해를 밟고 자유를 누리며 산다.

비극적 역사 앞에서 서사는 힘을 잃는다. 역사 자체가 애초에 뛰어넘기 어려운 서사를 구현하는 까닭이다. 100여 년 전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들 앞에선 어떤 말도 납작해져 버린다. 언어로 형용하기 어려운 의지와 각오가 이미 실현되어 현실을 구성카지노 게임 사이트. 그러므로 그들이 바라던 미래를 살고 있는 지금의 우리는 그 역사를, 그 역사를 일군 조상을 경외심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이 거리감은 차마 좁혀지지 않는다.

그러니 카메라는 자연히 뒤로 멀찍이 물러나거나 위로 쭉 빠진다. 어둠 속에서 결연한 시선으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대상을 응시한다. 이미 완성된 서사에 미사여구를 덧붙이길 거부한 <하얼빈은 그렇게 인간적 시선에서 벗어나 숭고의 영역에 진입한다. 아름다움을 넘어 성스럽기까지 한 미장센은 <하얼빈의 또 다른 필연이다.

모든 장면이 정교하게 직조된 그림 같다. 안중근(현빈)이 등장하는 첫 장면은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의 풍경화를, 독립군들이 모여 논의하는 장면은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의 <성 마태의 소명과 틴토레토(Tintoretto, 1518-1594)의 <최후의 만찬을 떠오르게 카지노 게임 사이트. 이등박문의 등장 씬은 움직이는 초상화 같고, 열차 씬은 도미에(Honoré Daumier, 1808-1879)의 <삼등열차를 연상케 카지노 게임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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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절제함으로써 영화의 전체적 톤이 일정하게 어둡고 차가운데, 시대적 상황과 인물들의 감정선에 연결되어 묵직한 공간감을 전달카지노 게임 사이트. 대사에서 휘발된 무게감이 치밀하게 계산된 구도와 배치를 통해 밀도와 부피를 지니게 된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정적이고 성스러운 시각적 파노라마는 역사를 완성한 목숨들의 존재감을 절감케 카지노 게임 사이트.

절제된 화면에서 유일하게 자유롭게 유영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연기다.



자욱한 담배 연기가 꼭 혼(魂)처럼 영화 속 여기저기를 느긋하게 아른아른 떠돌아다닌다. 연기는 산 자의 입에서 뿜어져 나와 공기 중으로 나른하게 흩어지며 짙은 어둠의 윤곽을 드러낸다. 그 모습이 마치 산 자의 몸에 포개진 죽은 자들의 숨결 같아서 죽음이 환기된다.

이렇듯 <하얼빈에서 화면 가득 살아 움직이는 것은 삶이 아니라 도리어 죽음이다. 산 자들의 몸은 딱딱하게 굳어 두꺼운 외투를 뒤집어쓰고는 웅크린다. 반면 몸이 없는 연기는 독립군의 은신처, 일본 총리의 개인실 등 영화 곳곳을 가벼이 배회한다. 춥고 어둡고 황량하고 비참하기만 삶을 그럼에도 앞으로 이어나가게 하는 것은 결국 죽음이라는 사실이 영화가 진행될수록 명징해진다. 생존한 독립군의 삶은 죽은 동지들의 희생으로 연명하였고, 지금 대한민국의 시간은 역사 속 독립군들의 피에 빚지고 있다. 오늘은 어제의 소멸에서 비롯하고 내일은 오늘을 밑거름 삼지 않고서는 오지 않는다. 모든 삶은 죽음에 기대어 도래할 미래를 꿈꾼다. 그러므로 연기는 삶을 잇게 하는 동력으로서의 죽음을 지시하는 동시에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시각화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미래는 늘 기약 속에서만 존재한다. 마치 연기처럼 눈앞에서 아른대기는 하는데, 막상 붙잡아지지는 않는다. 지금 여기로부터 비롯하여 생겨나기는 하는데, 마음대로 되기는커녕 금방 사라져 버릴 뿐이다. 그럼에도 있다는 것은 분명하고, 시야에서 사라졌다고는 해도 없다고 단언할 수 없다. 우리가 볼 수 없을 뿐 어딘가에 존재한다. 이렇듯 불확실하고 모호함에도 놓을 수 없다. 지금 멈추지 않으면 불씨는 계속 타올라 연기를 피워올릴 테니까. 불붙이길 포기하지 않는 마음속에서 미래는 움트는 법이니까.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는 기억해야 한다. 앞선 목숨들이 무엇을 위해 희생되었는지 기억할 때 포기는 단념된다. 이것이 <하얼빈이 반복적으로 “기억”을 말하는 이유일 테다.

기억은 남은 자들과 도래할 이들에게 주어지는 권리이자 책임이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은 살아남은 자만이 할 수 있고 또한 해야 하는 일이다. 이로부터 역사가 시작되고 미래는 돋아난다. 기억 없이 기약할 수 없고, 기약하지 않고서는 미래를 도모할 수 없다. <하얼빈은 이 사실과 책무를 영화라는 형식을 통해 제시한다. 넋이 나갈 광경을 보여줌으로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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