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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Mar 18. 2022

아무튼, 원주

화성에서 이주한 원주민


살면서 한 번은 마주쳤을까? 그 어디선가에서도 마주칠 인연이 없었을 것 같은 우리가 만났다.


우리의 첫 만남은 소개팅이었다. 고등학교 친구네 부부가 연결고리였고 소개팅하고 한 달 만에 서로 결혼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만난 지 두 번째 달에는 상견례를 했고, 열 번째 달에는 결혼식을 올렸다. 원주 토박이었던 신랑과 장거리 연애를 시작했고, 연애다운 연애는 해보지 못하고 결혼 준비에 여덟 달을 보내게 되었다.


원주는 내게 강릉 가는 길 중간에 있는 곳, 문막휴게소가 보이면 ‘앞으로 1시간만 세게 밟으면 바다에 도착하겠구나’하는 그런 곳 말이다. 내가 느끼는 원주는 무색무취 그뿐이었다. 그런 원주에서 나고 자란 그를 만났다. 곰돌이처럼 순한 얼굴에 수줍게 웃는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느 집단에나 있는 유연하고 인기도 많은 데다 똑똑하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무려 내가 존경할 수 있는 그런 사람 말이다. 내게는 부족한, 늘 잔잔한 호수 같았던 그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졌다. 내가 여태껏 많이 접하지 못한 ‘착한 남자’였다. 내가 만났던 사람들은 대부분 ‘나쁜 남자’였는데 운 좋게 내게 ‘착한 남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는 내게 존재 자체가 안정감이었다.


결혼하고 타지에서의 생활이란 기대감도 설렘도 아닌 두려움이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베스트 드라이버라고 칭해졌던 나는 마트조차 혼자 운전해서 가지 못하는 사람으로 퇴보하고 말았다. 그럴수록 이곳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뿐이었다. 그가 출근하고 난 뒤, 혼자인 카지노 게임이 오면 주로 책을 읽으며 보냈다. 그 카지노 게임들이 나쁘지 않았고 충분히 만족하며 보냈다. 외롭지 않냐 걱정하는 이들도 더러 있었지만 그 카지노 게임들이 감사했고 무엇보다 안심이 되었다.

그 만족감은, 근거 없는 자신감과 여유로움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됐고 했던 말을 곱씹어 실수한 건 없는지 자아성찰의 카지노 게임을 갖지 않아도 됐으니 근거가 영 없지는 않았다.


책은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었다. 주로 도서관에서 대여해서 읽었고, 소장하고 싶은 책은 구매로까지 이어졌다. 내가 결혼 전 살던 곳에는 도서관이 꽤나 멀어 갈 생각조차 하기 힘들었던 곳이었기에 이곳의 평생교육원, 시립도서관은 보물창고나 다름없었다. 얼마나 접근성이 좋지 않았는지 상상이 안 될 것이다. 책 선택이 실패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 시기만큼은 책 편식을 하지 않았다. 각종 카테고리를 두루두루 읽었던 것 같다. 물론 지금의 나는 아니지만.


결혼 후 제일 힘들었던 점은 친정 엄마와 떨어져, 이제 한 집에서 살지 못하게 됐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한 달의 반은 친정에서 보냈다. 친정엄마와 헤어지는 순간마다 서로 눈물바다가 되기 일쑤였다. 외동딸이었던 나는 그렇게 엄마에게 빈 둥지 증후군을 안겨주었다. 나 역시 신랑과 심야영화를 신나게 보고 들어와서는 뜬금없이 눈물을 쏟아내 그를 당황시킨 적도 있었고,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눈물이 터지는 날도 있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서야 눈물도 멈추고, 헤어짐의 절절함도 희석되었다. 이제는 친정보다 ‘원주 집’이 더 편한 공간이 되었다.


그는 우물 안에 살고 있는 나를 밖으로 꺼내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결혼 전 나는 틀림과 다름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걸 잘못됐다고 알려주는 이도 없었다. 생각이 다르다고 느끼면 자연스레 자의적 소통의 단절로 이어졌다. 그런 일련의 카지노 게임들이 쌓일수록 스스로를 자책하는 카지노 게임도 쌓여 갔고 자괴감은 높아졌다.


그 다름을 알려준 이도 역시 그였다. 연애시절부터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함께 많은 생각과 감정들을 공유하며 점차 나는 내 의지대로 긍정적 사고를 하는 인간으로 바뀌어 갔다. 우물 안 개구리였던 나는 그곳에서 나오려 노력했고, 격려와 신뢰를 주는 이가 곁에 있으니 느리지만, 또 빠르게 변화해 갔다.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단순하게 울음소리가 듣기 싫었기 때문이다. 나는 결혼 후 이 년 동안 딩크족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는 일반적이라 생각할 수도 있는 ‘보통의 가정’ 모습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이를 원하는 시기가 오기까지 기다려주겠노라 했고 그 카지노 게임은 엉뚱하게도 ‘슈퍼맨이 돌아왔다’를 시청한 뒤 찾아왔다. 한 개그맨의 둘째 아들을 보고 말이다. 속쌍꺼풀에 몸집이 통통한 아이라니, 세상에 너무 귀엽잖아.! 이렇게 단순한 이유로 아이를 원하게 되다니 실소가 터져 나왔다. 아이를 갖기 위해 식단은 건강식으로 바꾸었고, 운동과 함께 마음가짐도 바꾸기 시작했다. 소중한 아기가 우리를 찾아와 주기까지는 그리 오랜 카지노 게임이 걸리지 않았다.


임신하면 잠이 쏟아진다던데, 오라는 잠은 안 오고, 대신 눈물만 마르고 닳도록 흘렀다. 슬픈 기사는 슬퍼서, 감동스러운 영상은 감격스러워서. 갖가지 이유를 통해 호르몬의 변화를 받아들였다. 삼십칠 주간의 카지노 게임이 흘러, 첫째 아이와 행복하고 서툰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태지 하나 없이 말끔하고 오뚝한 코와 짙게 생긴 쌍꺼풀이 자리 잡은 예쁜 얼굴을 하고서는 면회 카지노 게임마다 나를 빤히 쳐다보던 우리 아가. 그것은 잠이 없는 아이가 내게 주는 신호였는데, 그 사실을 알리 없던 초보 엄마는 그저 생명의 신비로움을 느끼며 예쁘게 생겼다고 좋아했다.

조리원에서 집에 온 아이는 곧바로 신생아 영유아 산통을 시작했다. 더불어 배앓이와 성장통으로 시도 때도 없이 악을 쓰며 울어댔다. 그가 없는 카지노 게임에 아이와 단 둘이 있게 되면 극한의 공포에 휩싸이곤 했다. 심장의 두근거림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고, 머릿속은 하얘져 늘 버벅거렸다. 엄마의 서투름과 불안감이 아이에게도 전달됐는지 날카로운 울음은 도통 달래지지가 않았다. 한 번 울기 시작하면 두 카지노 게임도 거뜬했다. 어린아이들의 체력은 국가대표 급이라고 하던데 그 사실을 매일 깨닫게 해 주었다. 울다 경기라도 일으킬까 걱정하면서도, 우는 아이를 안고 어쩔 줄 몰라했다. 누가 더 많이 우나 겨루기라도 하듯 같이 엉엉 울기도 하고, 또 어느 날에는 밖에서 일하고 있던 그가 집으로 소환되기도 했다.


집의 시계는 철저하게 아이를 위해서 돌아갔다. 청각이 예민한 아이를 위해 발자국 소리가 나지 않게 다녔다. 귀한 낮잠이라도 자는 날에는 아이를 안고 소파에 내리 아홉 카지노 게임까지 앉아 있어 봤다. 아이를 소파에 내려놓는 순간 초토화가 되므로 화장실은 최대한 참았다. 방광염은 덤으로 생겼다. 소파는 주저앉았고 파자마는 헤지다 못해 구멍이 났다. 그래도 그 덕에 소파를 새로 바꾸게 되는 즐거움도 소소하게 누렸다. 피부가 예민한 편이던 아이가 발진이라도 나면, 아토피로 발전되지 않도록 병원에서 알려준 대로 알람을 맞춰 놓고 한 카지노 게임에 한 번씩 보습을 해주었다. 시판 이유식을 먹이면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고 각기 다른 육수로 삼시 세 끼를 만들어 먹였다. 후기 이유식부터는 삼일에 한 번씩, 여섯 카지노 게임 동안 만들었다. 몸에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 일절 만지지 못하게 했는데 생각해보면 강박이었던 것 같다. 오로지 내 만족일 뿐, 아이에게까지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나에게도 그리 행복한 삶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찌 사람이 완벽할 수 있을까, 빈틈도 있어야 이를 바탕으로 성장하는 부분이 있을 텐데, 늘 과정보다 결과를 생각하며 내 입맛에 맞는 정답을 요구하며 살았다. 존재하지 않는 완벽을 추구하고자 내 자신을, 가족들을 힘들게 했던 것 같다. 그걸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하는, 약자인 아이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하지만 이런 시행착오 속에서도 카지노 게임은 빠르게 흘러갔다.


우리에게 둘째가 와준 건 첫 아이 돌잔치 즈음이었다. 계획했던 것이 아니기에 눈물부터 났다. 일주일을 그렇게 울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첫째가 입원을 하게 되었다. 늘 오른손 세 번째, 네 번째 손을 빨던 아이는 엄마의 무지로 인해 오른손에 링거를 맞게 되었고 아이는 손을 빨지 못해 몇 카지노 게임을 내게 안겨 울기만 했다. 외할머니에게도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통에 급기야는 잠자던 다른 부모들까지 항의하러 나왔다가 차마 내 모습을 보고는 병실로 조용히 들어갔다. 배가 남산만 하게 나온 임산부가 바닥에 주저앉자 아이와 사투를 벌이는 모습에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했으리라. 친정엄마는 그런 내 모습을 안타까워하며 물끄러미 보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그때의 나를 아직까지도 마음 아파하신다.


아이가 십팔 개월이나 됐는데, 나는 왜 아직도 씻고, 볼 일 보러 화장실 갈 때가 되면 자유롭지 못할까 생각했었다. 볼 일을 보면서도 볼록 나온 배 위에 아이를 얹어 안고 있었다. 그럴 때면 한 아이의 엄마이기 이전에 여자로서, 인간으로서 수치스러움이 앞섰다.


온 카지노 게임과 사랑을 첫 아이에게 쏟기도 부족했던 내 체력과 정신력은 둘째가 태어나서 집에 온 뒤 얼마 후부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세심한 기질로 태어난 죄 없는 첫 아이에게 그 화살이 돌아갔다. 그럴수록 나는 더 깊은 좌절을 느꼈고 죄책감에 시달렸다. 나의 죄책감을 덜어내 보고자 남은 정신력을 다 끌어냈다. 최선을 다하여 아이들을 돌보려 애썼다. 다행히 둘째는 순둥이가 태어났다. 목청껏 우는 첫째 옆에서도 잘만 잤고, 배만 부르게 해 주면 자고 또 잤다.

육아는 예측할 수 없었다. 맑게 개인 것 같다가도 얼마 안 가 바로 벼락이 쳤다. 맑은 날씨에 안도하다 가도 별안간 번개를 맞으면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오기가 쉽지 않았다. 다른 집과 마찬가지로 연년생의 육아는 바쁘고 치열하게 지나갔다. 내게 서서히 우울증이 침습해오는지도 모르게 말이다.


산후우울증은 서른 넘어 첫 사춘기를 겪게 했다. 지긋지긋한 우울과 불안함으로 긴 카지노 게임을 보냈다. 망망대해 깊은 심해에 홀로 웅크리고 앉아 있는 기분, 그 심해에 모든 물이 내 눈물인 그런 나날 말이다. 매일 깊은 구덩이를 파느라 심신이 지치고, 지칠 때 한 번씩 바깥세상을 올려다보면 높고 먼 하늘이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그곳은 내가 올라갈 수 없는 곳이라고 깨닫게 해주는 것처럼.


오답을 알아채는 데는 긴 카지노 게임이 필요하지 않았다. 둘째가 태어나고 강박은 줄어들었다. 그 모든 걸 느낄 겨를 없이 집안 일과 육아에 매진했기 때문이다. 매일 네 카지노 게임씩 자며 수유하지 않는 새벽 카지노 게임에는 다음 유축을 위해 깨어 있었다. 쪽잠을 자지 못하는 탓에 내 모습은 점차 좀비처럼 변해갔다.


첫째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한 뒤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 그래도 하루 이십사 카지노 게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쁘게 일과는 돌아갔다. 살면서 도무지 하고 싶은 것이 하나도 없어서 걱정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카지노 게임적 여유가 없어지니 하고 싶은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동안 육아로 미루어 두었던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고, 모유수유를 하는 카지노 게임을 쪼개서 오전 카지노 게임에 프랑스 자수를 배웠다.


일주일에 한 번씩 가는 미술학원에 등록해 난생처음으로 데생도 그려보았다. 그림 그리는 것과는 영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었는데 칭찬을 들으니 자신감도 생기고 집에 와서 스스로 그림 그리는 카지노 게임도 늘어 갔다. 아이가 뭘 그려달라고 하면 식은땀만 났었는데, 이제는 잘 그리는척하며 쓱 그려주면 아이가 엄지를 척하고 내밀어 준다. 좀 더 크면 내 실력은 바닥을 드러내겠지만, 이 순간을 누리리라! 독서는 책을 읽는 것에서만 끝내지 않고 독서모임을 통해 읽고, 쓰기를 실천하려고 노력 중이다.


스트레스를 푸는 나만의 방법은 애정 하는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는 것이다. 여행의 묘미는 식도락보다 카페 투어라고 생각할 만큼 커피를 사랑한다. 원주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템퍼러리’라는 곳이다. 템퍼러리가 ‘원더 월 290'이었던 그 시간부터 쭉 단골을 자처해 왔다. 커피에 대한 관심은 마시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바리스타 자격증 취득까지 이어졌다. 배우는 삼 개월 동안은 자격증만 취득하면 바로 카페라도 낼 기세였으나, 커피 인구가 늘어 가는 만큼 우후죽순 생겨나는 카페들을 보고 ’ 내 카페’는 저 멀리- 멀리- 멀어져 갔다.


그 카지노 게임들만큼은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카지노 게임을 내어 카페에 앉아 조용히 카지노 게임을 보내기도 하고, 재작년부터는 재봉도 시작했다. 누군가에게는 흔하고 평범한 일상들이 내게는 치유의 나날이었다. 더디지만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내일이 없을 것처럼 슬퍼하고 기뻐했다. 상황은 흐림과 게임을 반복하며 흘러갔다.


타지 생활을 시작하며 나는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이 두려워 만남을 피했었고, 그 방법이 최선인 것처럼 적응했다. 한 가지 희망적인 부분은 이제 새로운 만남이 두렵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만든 벽을 깨기 시작한 것이다. 감사한 인연들이 생겨났고, 사람들과 함께 있는 카지노 게임만큼은 늘 특별하고 즐거웠다. 나와 함께 울고 웃어주는 이들과 함께 극복하는 카지노 게임들을 보냈다. 늘 곁에서 나를 지지해주고 내 말을 온전히 들어주는 그와 사랑하는 아이들과 함께. 원망이든 분노든 온갖 것을 쏟아 냈다. 언제나 참고 누르던 감정들을 비워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더없이 아팠고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지금의 내가 있다.


나는 지금의 내가 좋다. 결혼으로 인해 삶의 방향성이 달라졌다. 지금은 소중한 카지노 게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알아가는 과정 한가운데에 있다. 타인이 아닌 내가 주체가 되어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 타인을 위한 배려도 시선도 아닌 오로지 내 방식대로, 내 카지노 게임대로 말이다. 아직도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여전히 내 마음이 뭔지 알 수 없는 날이 있고, 그날로 인해 생기는 실수와 후회가 반복되고 있지만, 앞으로 보낼 카지노 게임들은 조금 더 값지고 지혜로운 카지노 게임으로 이어가고 싶다.


내가 그동안 썼던 글에서는 절망만 있을 뿐, 희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썼던 글들을 최근에 다시 읽어보니 마음이 저리기도 하고 어떤 일들은 기억마저 희미해 당시의 감정들을 알 수조차 없었다. 육아에서 벗어나 최대한 멀리 도망치고 싶었다. 꼭 꼭 숨어서 내게는 아이들이 보이지만, 아이들은 내가 보이지 않는 그런 곳에 있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은 하루하루 커가는 아이들이 아깝기만 하다.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즐겁고, 귀하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앞서게 되었다. 이제는 나 혼자서 도망가지 않고 아이들과 그이와 함께 천천히 걷고 싶어졌다. 돌고 돌아왔지만 그 카지노 게임들이 없었다면 그 귀함을 이렇게 크게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아쉬워할 카지노 게임은 내게 없다. 같은 아픔이 반복되지 않게, 아이들이 나와 같은 실수 속에서 살지 않도록, 옆에서 길잡이 역할만 해주면 되는 것이다.


이 글에는 전에 없던 새로운 희망이 추가되었다. 도무지 그 끝을 알 수 없던 심해 바닥에서, 물 밖 세상에 있던 나로 돌아가려 끊임없이 헤엄치고 있는 중이다. 드디어 물 밖 세상이 눈앞에 아른거리며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나도 육지에서 생활할 수 있는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원주는 새로운 삶의 터가 되었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소중한 추억을 쌓아가는 곳이 될 것이다. 내 삶의 방향성이 바뀐 곳이며, 아직 알아 갈 것들이 많은 곳이다. 무엇보다 내 가족과, 소중한 인연들을 만나 함께 하는 곳이기에 더의미가 깊다.


원주에 온 지 어느덧 십 년이 되어가고 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던데, 원주도 참 많이 변한 것 같다. 앞으로도 더 많은 변화들이 있을 것이다. 많은 것이 변할지라도 지금 내가 느끼는 원주의 정서만큼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미래의 내가 어떻게 변할지, 또 언제까지 원주에 있을지 확신할 수 없지만 늘 좋은 일들만 가득하기를 바라본다.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그럼에도 희망한다. 더불어 행복한 나날들이 기다리고 있기를.


나는 ‘원주’에서의 내 삶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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