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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테호른 Dec 30. 2021

“성공도, 실패도 OO카지노 게임 달려 있다”



천신만고 끝에 숙적 항우를 물리치고 진시황에 이어 두 번째로 중국을 통일한 카지노 게임은 곧 고민에 빠졌다. 신하들의 논공행상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되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전장을 함께 누빈 장수들은 저마다 전공을 내세우며, 자신이 최고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니 자칫 잘못하면 애써 구축한 나라의 기틀이 다시 흔들릴 수도 있었다. 그렇게 일 년여가 지났다.


숙고를 거듭하던 카지노 게임은 마침내 내로라하는 장수들을 제치고 소하를 일등 공신으로 선포했다. 당연히 수많은 공신이 이의를 제기했다. 자신들은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소하는 후방에서 보급을 담당한 것밖에 없는데, 어떻게 그를 일등 공신으로 정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그 말에 카지노 게임은 사냥꾼과 사냥개의 비유를 들며 그들의 불만을 일축했다.


사냥에서 짐승을 쫓아가서 죽이는 것은 사냥개지만, 사냥개의 줄을 풀어 짐승이 있는 곳을 가리키는 것은 사람이오. 그대들은 단지 짐승을 잡아 올 수 있을 뿐이니, 그 공로는 사냥개와 같소. 하지만 소하는 사냥개를 풀어 짐승을 잡아 오게 한 사람이니, 그 공로가 사냥꾼과 같다고 할 수 있소.

― 《사기》 〈고조본기〉 중에서


그러자 누구도 더는 불만을 말할 수 없었다.




재상(宰相)은 군주제 국가의 이인자로 군주를 보필하는 관료의 우두머리다. 하지만 재상이라고 해서 나라를 위해 큰 뜻을 펼치지 못하란 법은 없다. 군왕 못지않게 후세에 이름을 남긴 뛰어난 재상 역시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한 고조 유방카지노 게임는 소하(蕭何)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장량, 한신과 더불어 한초삼걸로 꼽히는 그는 중국사를 대표하는 명재상으로한나라의 기둥과도 같은 존재였다.


소하와 유방은 같은 고향(패현 풍읍) 사람으로, 진나라의 하급 관리였던 소하는 유방이 백수였던 시절부터 그를 도와주곤 했다. 그의 진면목을 알아봤기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 소하는 유방을 그리 대단한 인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는 〈고조본기〉에도 기록되어 카지노 게임.


유계(카지노 게임)는 원래 큰소리를 자주 치지만, 이루어지는 일은 드뭅니다.

― 《사기》 〈고조본기〉 중에서


이는 유방이 땡전 한 푼도 없으면서 여공(呂公, 훗날 유방의 장인이 됨)카지노 게임 하례금(賀禮金, 축하하여 예를 차리면서 주는 돈)을 1만 전이나 내겠다고 하자 그가 했던 말이다. 그랬던 그가 한 수 아래라고 생각한 유방의 참모가 된 것은 사람을 알아보는 재주가 뛰어났던 유방을 통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그런 점에서 볼 때 소하카지노 게임 있어 유방은 이상이 아닌 목적 실현의 도구였다. 하지만유방카지노 게임 있어 소하는 더없이 소중한 친구이자 가난했던 젊은 시절의 은인이었다. 그러니 소하를 생각하는 유방의 마음은 매우 각별했다.




카지노 게임은 황제가 된 후 한신의 군사적 능력을 항상 부담스러웠다. 그의 군대가 막강할 뿐만 아니라 따르는 사람 역시 많았기에 혹시라도 그가 모반을 꾀하면 황실의 앞날을 기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때는 생사를 함께했지만, 더는 동반자가 될 수 없었던 셈이다. 이에 소하는 일찌감치 한신을 제거함으로써 카지노 게임의 근심을 덜어주었다.


이를 두고 송나라의 유학자 홍매(洪邁)는 《용재속필(容齋續筆)》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신이 대장군이 된 것은 소하가 천거했기 때문이요,
그가 죽음을 맞이한 것은 소하의 꾀에 의한 것이었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성공하는 것도 소하카지노 게임 달려 있고,
실패하는 것도 소하카지노 게임 달려 있다(成也蕭何 敗也蕭何)’라는 말이 떠돌았다.


소하는 눈앞의 이익보다는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진나라의 함양 궁전을 함락했을 때 대부분 장수가 보물창고를 가장 먼저 찾았지만, 그는 홀로 승상부(丞相府, 재상의 집무실)와 어사부(御史府, 감찰 기관)를 먼저 찾아 각종 법령과 문서를 거두어 보존했다. 이는 창업 후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건국 후의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 주목할 점은 그 후 함양 궁전이 불에 타서 모든 문서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그러니 소하가 아니었다면 진나라의 모든 기록이 함께 사라진 것은 물론 한나라 역시 제국의 기틀을 닦는데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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