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슴에서 쿨렁 소리가 났다
2002년의 사건 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이 가영 대리와의 만남이었다. 가영 대리는 나보다 입사가 한참 빠른 8년차 고참 이었다. 하지만 고교를 졸업하고 입사했기에 나와 동갑내기였다. 그녀는 대리 승진자 명단이 발표된 후 먼저 내 앞으로 와서 머뭇거리지 않고 말했다.
“조 대리님 승진축하해요. 승진기념으로 여친 어때요. 저 괜찮죠?”
그 때 나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녀를 쳐다볼 수 없었다. 고개를 수그리고 바짓단 끝의 구두코를 보다가 고개를 들었더니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저, 저에게 데이트 신청하는 거 맞아요?”
나는 그렇게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까닥하고는 바로 다가와 팔짱을 꼈다. 그녀의 가슴이 물큰 팔뚝에 느껴졌다. 내 가슴에서 쿨렁 소리가 났다.
사고 후 카지노 게임는 1주일이 지나 멀쩡한 모습으로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손바닥으로 카지노 게임의 차체를 쓸면서 한 바퀴를 돌았다. 매끄러운 감촉에 따스한 기운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광택은 어디 하나 흠난 것 없이 완벽하게 복원되어 제 빛을 퉁겨냈다. 원형의 엠블럼은 황금빛 보닛 위에서 도도하게 은색으로 빛났다. 광폭타이어는 날렵한 휠을 감싼 채 아스팔트를 탄탄하게 딛고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좋은 직장에서 제 때 승진하고 갓 출고된 황금빛 세단에 멋진 애인까지.
가영 대리는 한일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4강 진출에 성공한 날 저녁, 카지노 게임 안에서 내 입술을 훔쳤다. 나는 가영 대리를 태우고 빵 빠 방 빵, 빠방 빠 빵빵! 리드미컬하게 경적을 울리며 거리로 나왔다. 태극기로 배꼽티를 만들어 입은 가영 대리가 정지신호가 걸린 틈을 타 운전석의 시트를 뒤로 젖혔다. 천천히 눈을 감고 할 새도 없이 가영 대리의 촉촉한 입술이 내 입술을 덮쳤다. 카지노 게임 안에 별이 쏟아졌다. 나는 가영 대리의 가는 허리를 끌어당겼다. 어디선가 클락션이 울렸다. 빵 빠 방 빵! 그 키스 후 정확히 3달이 지나 나는 가영 대리에게 이별을 통보받았다. 아니 어쩌면 내가 이별을 통보한 것일 수도 있다.
대리로 승진한 내게 주어진 업무는 구매담당이었다. S카드 지역본부의 사무용품은 물론 마케팅에 필요한 판촉물을 구매해 각 지점에 배분하는 일이었다. 내가 그 자리로 배치를 받자 가영 대리는 축하한다고 박수를 쳤다. 실권이 주어지는 자리이고, 승진도 빠를 거라며 나보다 더 환호했다. 경리업무를 담당하던 가영 대리는 자기가 많이 도와줄 테니 업무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구매담당으로 배치 받은 후 첫 주말에 가영 대리는 거제도의 펜션을 예약했다며 1박2일 여행을 제안했다. 카지노 게임를 타고 거제도까지 달리는 동안 가영 대리는 내 손을 먼저 잡고 한 번도 놓지 않았다. 나는 구름 위를 걷는 기분으로 주말을 보냈다. 그날 가영 대리를 안았다.
구매담당으로 부임하자 여러 업체의 납품담당자들이 다투어 식사를 하자고 요청했다.
“대리님 믿을 만한 사람 명의로 통장을 하나 만드세요.”
“위에 보고할 때는 저희가 별도로 현금을 준비하겠습니다.”
“술은 좀 드셔야 할 거예요”
업무상 필요한 미팅이라 해서 나간 식사자리에서 그들이 내게 은근하게 말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다. 가영 대리에게 물어보고 나서 내가 어떤 자리에 있는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 가영 대리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자기가 미리 차명통장도 만들었고, 현금은 누구누구에게 주면 된다고 말했다.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다른 곳으로 발령 날 때쯤이면 단단히 한 몫 잡게 될 거라며 윙크를 날렸다.
1주일간을 고민한 끝에 나는 회사 감사실로 보낼 구매업체들의 로비상황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가영 대리를 만났다.
“카지노 게임 씨는 내게 가장 황홀한 3개월을 선물해 주었어요. 남자로서 행복했고, 내가 능력 있는 사람 같아 자신감을 가졌고, 미래를 꿈꿀 수 있어서 기뻤어요.”
“어머! 자기 너무 진지하게 나오는 거 아니야? 그렇게 말하면 내가 좀 민망하잖아. 난 결혼은 아직 생각 없는데.”
가영 대리는 내가 청혼 하는 줄 알고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가영 대리에게 내가 작성한 보고서를 내밀었다. 가영 대리가 미소를 머금은 채 웬 편지냐며 봉투를 열어 보고서를 보았다. 가영 대리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표정이 구겨지는 것을 나는 찬찬히 바라보았다. 가영대리가 나를 쳐다봤다.
“자기 바보야? 얼마든지 즐기며 살 수 있는데 이런 짓을 왜 해? 내가 맘에 안 들어?”
“그 보고서에 카지노 게임 씨 이름은 들어있지 않습니다. 고민했던 것은 과연 카지노 게임 씨가 얼마나 개입되어 있는 가 입니다. 나는 카지노 게임 씨가 다치는 거 원치 않습니다. 카지노 게임씨를 좋아합니다.”
“좋아한다면서 이런 짓을 해? 자기한테도 좋고, 모두가 좋은 일이야. 남들은 이 일을 하지 못해서 안달인데. 내가 사람 잘 못 본거야. 내가 준우 씨 찍었고, 추천했단 말이야. 왜 그렇게 사람이 꽉 막혔어. 우리 좋았고, 즐거웠잖아. 계속 갈 수 있고, 준우 씨 승진도 빠를 거야. 뭐가 문제야.”
가영대리의 목소리엔 짜증이 묻어났다. 상기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앞서기는 어려워도 하위권으로 밀려나지 않을 자신은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조금씩 사라졌다. 내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큰 문제가 바로 앞에 산처럼 버티고 있었다. 나는 가영 대리의 손을 잡고 드라이브를 하자며 밖으로 나왔다. 카지노 게임의 조수석에 가영 대리를 태우고 운전대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