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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흔적이 남긴 주름이 늘어가고,
몸의 기능들이 하나둘씩 뒤로 물러나는 것이 느껴진다.
시간은 처음엔 스며들듯 천천히 쌓였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뚝이 무너지듯 한꺼번에 밀려와 나를 덮친다.
나이 들어감을 가장 먼저 실감한 건 시력이다.
책을 읽으려 안경을 이리저리 조정해 봐도,
흐릿한 글씨는 또렷해질 기미가 없다.
결국 흐릿한 채로 글을 읽는다.
흐릿한 글씨는 흐릿한 주제를 남긴다.
책을 덮고 지금껏 읽었던 책의 내용을 생각해 본다
그러나 책을 덮는 순간부터 책의 주제는 빠르게 기억에서 닫힌다.
기억에서 사라진 것이 책의 내용뿐일까?
흐릿해진 시야로 바라본 모든 것이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한 탓인지,
쉽게 잊혀진다.
나이 들어감에 따라 기억의 섬세함이 사라진다는 것은 이해한다.
그렇다고 해도 너무도 짧은 기억의 유효기간이 아쉽다.
세월은 점점 더 빠르게 달려가고, 기억은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멀어진다.
순간을 오래 붙잡을 수 없는 기억,
세심함을 잃어버린 감각.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오래된 기억은 자꾸만 되살아난다.
어떤 음악은 잊고 있던 기억들을 명확하게 되살려 그 시절의 감정마저
선명하게 되살려 놓곤 한다.
옛 친구들을 만나면 새로웠던 어제보다 오래된 옛날을 더 많이 이야기한다.
추억 속의 그날이 마치 요즘의 근황인 것처럼 즐겁다.
"라떼는 말이지"라는 꼰대적 대명사로 시작되는 대화가 잦아지는 것도 그 때문일까?
나이 들어간다.
세월에 스며들어 나이에 물들어 간다.
그렇게 물든 시간은 너무 빠르게 흘러간다.
이토록 빠르게 흘러가니 모든 게 흐릿해지는 걸까?
멀미가 날 듯한 속도는 가까운 현재를 더욱 흐릿하게 만든다.
그나마 먼 풍경과도 같은 오래된 기억들만이 속도의 영향을 받지 않아 또렷하게 보이는지 모르겠다.
또렷해진 것들은 너무 멀어서 손에 잡을 수 없는 데 명확해진 추억은 세월의 속도를 이기고 지금 여기서 살아나고 있다.
나이 들어간다.
오늘도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나는 세월에 물들어 가는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