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실타래 Jan 28. 2025

내가 흘려보낸 하루는 우리 아기에겐 평생이었다

우리 부부가 감사 일기를 쓴 지 꼭 한 달이 되었다. 공교롭게도 얼마 전 배우 송혜교 씨가 유퀴즈에 출연해서 감사일기를 하루에 열 가지씩 쓴다고 하였고 2주 후 출연한 정신과 교수님도 번아웃 극복방법으로 감사를 꼽으셨다. 두 편을 연달아보니 감사일기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많아진 것 같아 쓰면서 효과를 직접 느꼈던 우리 부부의 이야기를 공유해보고자 한다. 감사일기는 내가 학생 때도 오프라윈프리의 성공담과 함께 유행처럼 방송에 소개되었던 것 같은데 당시의 나는 감사라는 것을 왜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고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던 시기에 지금처럼 큰 슬픔을 겪어보지 않았었고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사소한 것들에는 그저 투덜거리며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게 하루하루를 살았다. 딱히 행복할 일도 없었고 그렇다고 깊은 구덩에 빠져 허우적거리지도 않는 지루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아기와 사별 후 몇 달간은 얼마나 더 깊이 지하로 떨어져야 하는지 모르겠는 악몽에 자주 시달렸지만 그 시간이 지나고 나니 가끔 나는 그저 살아있고, 남편과 함께할 수 있고,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있고, 밥을 잘 먹을 수 있는 평범한 나의 일상이 눈앞에서 반짝반짝 빛나 눈물이 날 때가 있었다. 물론 아주 드물게 짧은 순간 스쳐 지나가는 시간들이었다. 어떤 날은 이전보다 더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 이래도 되나 싶었고 그런 마음은 떠난 아기에게 잘못하는 것만 같아 고이 넣어둔 적도 많았다.


그 순간들은 문득문득 내게 와서 마음속에 남았다. 남편과 가끔 서로의 기분이 우울해 보일 때면 그때를 떠올리며 그래도 감사한 것을 생각해 보자며 번갈아 한 개씩 얘기하곤 했었다. 대부분 ‘오늘 맛있는 밥을 먹어서 감사하다.’ 같은 단순한 감사거리였지만 그걸 들으며 웃기기도 하고 상대의 감사가 나에게도 감사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일기를 찾아보니 나는 작년 8월부터 종종 일기에 감사하다고 표현하곤 했는데 그때 남편과 야구경기를 보고 와서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힘든 일도 결국은 지나가고 남은 건 현재의 나다. 내가 나의 하루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누가 그렇게 해줄까? 걱정 없이 보낸 오늘 하루에 감사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사별 후 2주쯤 지났을 때 나는 얼른 시간이 흘러 모든 게 해결되어 있기를 바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OTT를 하루종일 보며 누워있어도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하다못해 네이버에 ‘의미 없이 시간 보내기’라고 검색한 적도 있다. 그런데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검색어는 자동으로 변형되어 의미 있게 시간을 보내는 방법에 대한 글만 나왔다. 왜 시간을 버리는 방법은 없을까. 다들 무언가를 하고 있으면서도 더 의미 있게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강박에 불안한 걸까. 나는 단 1년이라도, 6개월만이라도 눈을 감고 일어나면 시간이 흘러 있기를 매일 바라고 또 바랐다. 지나고 보면 이 시간조차 축복이었다는 말 따위는 위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시간을 의미 없이 흘려보내면 벌이라도 받는 걸까. 이미 충분히 시간을 버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하루가 내겐 너무나도 길어 더 철저하게 아무 고민이나 죄책감 없이 시간을 버리고 싶었다.


그랬던 내가 야구 경기를 보고 맛있는 것을 먹고 남편과 행복하게 걱정을 잊고 하루를 보낸 것에 대해 처음으로 감사하다고 적은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종종 감사의 힘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화가 날 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한 것들이 있는지 찾으려고 애썼다. 그럼에도 여전히 잘 흐르지 않는 시간에 갇혀 있었다. 더욱더 애써 시간을 버리고 싶어 했던 날들이 공존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내게 말했다. 네가 그렇게 흘려보낸 하루가 우리 아기에게는 평생의 시간이었다고. 아기는 본인의 평생을 그렇게 짧게 보내고 갔다며 우리는 그걸 생각해서라도 하루하루 아기 몫까지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을 느꼈다. 우리는 이전처럼 어영부영 살아야 할 것이 아니라 떠난 아기에게 부끄럽지 않게 아기 몫까지 열심히 살아야 하는 부모였다.


그 시간 이후 말로 흩뿌려지던 그 감사함을 흘려보내지 않고 붙잡고 싶어 글로 적어보기로 했다. 초등학생 때 친구들과 유행처럼 썼던 우정다이어리가 떠올랐다. 나는 그게 재미있어 언니와도 시답잖은 일기를 주고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상대와 각자 편지처럼 일기를 번갈아 적는 것인데 남편은 연애할 때 내가 편지를 써주면 답장을 쓰는 것을 힘들어했기 때문에 우정다이어리라는 단어자체에 거부감을 표했다. 그래서 최대한 간단한 규칙을 정했는데 노트 한 장을 반으로 나눠 왼편과 오른편에 각자 그날 감사했던 점 세 가지만 적어서 서로 보여주기로 했다.


서로의 성격과 관심사가 너무 달라서 읽다 보면 재미있었다. 남편과 한 달 동안 빠짐없이 꼬박 적으며 매일 자기 전에 적는 것이 루틴이 되었다. 어느 날은 불안과 걱정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는 내게 남편이 감사일기를 쓰라며 먼저 건네준 적도 있었다. 우리의 감사는 정말 당연한 것들 위주였는데 적다 보면 모두 당연한 것이 아니게 바뀌어 있었다. 그중 몇 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나의 감사

친구에게 오랜만에 연락이 와서 카지노 게임.

부모님이 건강하셔서 카지노 게임.

남편이 감사일기를 기억해 줘서 카지노 게임.

글을 쓰게 되어 카지노 게임.

상추씨앗을 잘 심어서 카지노 게임.

책을 읽을 수 있어 카지노 게임.

남편이 무사히 출퇴근해서 카지노 게임.

보일러가 고장 나도 많이 춥지 않아 카지노 게임.

오늘 마트에서 전품목 15% 할인을 받아서 카지노 게임.

양배추를 1500원에 살 수 있어 카지노 게임.

감기에 안 걸려 카지노 게임.

남편이 설거지를 해주어 카지노 게임.

떡볶이가 맛있어 카지노 게임.


남편의 감사

넷플릭스 <피의 게임 3 볼 수 있어 카지노 게임.

내일 출근 안 해도 돼서 카지노 게임. (X5)

유튜브 프리미엄을 할 수 있어 카지노 게임.

내일 점심 제육이라 카지노 게임. (X3)

오늘 점심 제육이라 카지노 게임. (X3)

<나는 솔로 볼 수 있어 카지노 게임.

아침운동 할 수 있어 카지노 게임.

2000원짜리 아이스크림 먹어서 카지노 게임.

내일 금요일이라 카지노 게임. (X2)

하루하루가 카지노 게임.

낮잠 자서 카지노 게임.

출근해서 카지노 게임.

머리 잘라서 카지노 게임.

집 따뜻해서 카지노 게임.


감사의 효과는 여러 논문에서 밝히고 있는데 도파민, 세로토닌, 노르에피네프린 및 옥시토신과 같은 기분 조절 신경 전달 물질의 분비를 유발하고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솔의 분비를 억제하며, 시상 하부(스트레스 조절과 관련된 뇌 영역)와 복측피개영역(기쁜 감정을 생성하는 뇌의 보상 회로 부위)을 자극한다고 한다. 따라서 우울증상과 스트레스를 낮출 수 있고 면역기능 개선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얼핏 들으면 진짜일까 싶고 정말 그렇게 효과가 있는지 의문을 표할 가능성이 높지만 직접 해보니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다. 마음먹지 않으면 한두 번 하고 말기 때문에 오래 지속하기 어려워 시간을 정해놓거나 의무적으로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전날 적어둔 감사를 읽어 보며 오늘은 새로운 감사를 찾아보려고 노력하면서 감사할 것들이 세 가지로는 부족하다고 느낄 때도 있다. 어느 날은 오늘은 감사할 게 없다고 생각하다가도 옆에 남편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가 찾아오며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한다. 그저 살아있음에 감사할 때도 많다.


남편이 떠난 아기의 첫 생일날에 내게 이렇게 말하며 노트에 적어주었다. “아기를 낳아준 OO에게 감사하다.”라고. 남편의 말을 듣고 내 귀와 눈을 의심했다. 누구에게도 축하받지 못했던 출산이었다. 서로에게 슬픔만 남은 출산으로 감사를 받아볼 수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남편에게 아기도 없는데 그게 왜 감사하냐고 물었다. 남편이 내가 임신하고 출산하면서 많이 힘들었을 텐데 그걸 몰라주었던 것 같아 미안하다고 했다. 우리에게 와준 아기를 내가 낳아주어서 만날 수 있어 감사하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의 슬픈 기억도 감사로 바뀔 수 있었다.


우리 부부는 같이 쓰다 보니 감사할 거리가 세 가지가 아니라 여섯 가지로 두 배가 되는 효과가 있었다. 서로 열개씩 쓰면 감사함이 스무 번 찾아오겠지만 자기 전 짧게 끄적이는 지금 정도가 충분히 좋아 당분간은 세 가지씩이라도 꾸준히 써볼 생각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Zbo7UY8dxh8

영상은 요즘 제게 큰 위로가 되는 송소희 님의 <Not a Dream입니다. 모두 명절 즐겁게 보내시길 바랄게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