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으로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은 이 시대에 가장 힘들지만 가장 필요한 일일 것이다. 얼마 전 본 뉴스에서 한국에 은둔형 외톨이(일명: 히키코모리)가 전국에 40만 명(서울 청년기준 13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는 뉴스를 접했다. 과거 일본에서 벌어져 남의 나라일로만 여겼던 일이 이제 한국으로 옮겨왔다.
은둔형 외톨이
뉴스는 매번 볼 때마다 느끼지만 항상 자극적인 내용으로 표면적으로 드러난 사실의 심각성에만 집중한다. 왜 그렇게 되었고 어떻게 하면 이런 현상을 완화 혹은 개선할 수 있을지에 대한 깊이 있는 얘기는 없다. 그냥 자극적이고 흥미 있는 기사 제목으로 조회수와 시청률만 유도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어두운 세상에 대한 어두운 생각만 심어주고 광고비만 챙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밝고 아름다운 것들만 보기도 아쉬운 시간에 어두운 것들만 접하니 세상은 더 빨리 어두워지는 것은 아닐까
한국에서라면 뉴스로만 듣고 그런가 보다 했겠지만 여기 호주에서 낯선 이들과 같이 셰어 생활을 하면서도 이런 모습을 여러 번 경험했다. 옆방에 사는 사람이 방에 있는 건 확실한데 방 밖으로 나오는 걸 보기는 너무 어렵다. 도대체 방에서 그 오랜 시간 무얼 하며 버틸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지만 그건 프라이버시의 영역이라 물어볼 수도 없다. 말을 걸면 부담스러워하는 눈치다. 나도 눈치는 있다. 그래서 말을 안 하게 된다. 꼰대가 되기 싫다. 나는 자는 시간 빼고는 방 안에서 반나절이상을 버티지 못하는 성격이다. 좀이 쑤신다. 호주 같이 드넓은 땅에 와서까지 왜 2~3평 남짓한 방 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지 나로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다.
과거 노래방에서 친구들 앞에서 빠른 템포의 가사를 따라 부르며 나의 랩실력을 뽐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는 유행곡의 빠른 랩을 따라 부르는 것이 마치 자랑처럼 여겨졌다. 그 빠른 리듬에 맞추는 것이 마치 이 세상의 빠른 흐름에 발맞춰가는 것인 양 따라 불렀다. 그때는 그 빠른 리듬에 심취했다. 지금 다시 본 이 노래의 가사에서 더 많은 감흥이 오는 듯하다.
최근 [더 글로리]라는 넷플릭스 드라마가 전 세계적으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불합리하고 불공정하고 강자들만이 누리고 독식하는 사회의 모습을 학교라는 축소된 공간에서 잘 연출했다. 세상의 냉혹함과 처절함을 너무 빨리 경험하고 자라난 한 외톨이의 분노가 처절한 복수극으로 이어진다. 그녀의 굳은 의지와 남다른 능력이 복수가 아닌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실현되었다면 어땠을까? 사회는 이제 이런 외톨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더 글로리]
사회 부적응자의 정의
은둔형 외톨이를 보는 부정적인 시선은 그들을 사회 부적응자라고 칭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사회의 개념을 다시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 사회에 적응한다는 사람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집단이나 조직등에 소속되어 활동하며 각종 사회 시스템인 법과 질서를 잘 따르며 살아가는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문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이제 일원화된 사회가 아니다. 예를 들면, 이제는 굳이 오프라인 세상이 아니라도 생계를 유지하고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온라인 사회 시스템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이후 이 현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제 너무도 커져버린 온라인 생태계가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시간으로 따졌을 때 이제 인간의 의식이 머무는 곳은 이제 오프라인보다 온라인 공간이 더 길다. 그리고 많은 국가들이 이 온라인 사회 구축에 더 많은 노동력(코딩 개발자의 높은 수요)을 투입하고 있다. 그런데 왜 아직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은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인가? 어쩌면 은둔형 외톨이는 미래 사회가 바라고 있는 인간형일 수도 있다. 다만 현재의 우리의 의식 변화가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에서 발생하는 괴리의 과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 다른 사회
이제 개인의 차이, 다양성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개인마다 타고난 본성이있다.내성적인 사람도 있고 외향적인 사람도 있고 사색하고 명상하며 깊은 생각을 카지노 게임 사이트 사람도 있고 대화하고 활동하면서 더 창의적인 사람도 있다. 인간은 딱정벌레의 종류보다 더 다양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 다양성을 다 받아줄 그릇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건 인간의 개별의 고유 성질보다 사회와 국가와 기업이 나아가는 방향에 부합카지노 게임 사이트 인간만이 지금 형성되어 있는 사회에 어울린다는 말이고 그렇지 못카지노 게임 사이트 이들에게 사회라는 무대에 발을 들이는 공간이 적다는 얘기다.
사회가 필요하고 요구카지노 게임 사이트 능력을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능력을 가진 자는 너무나 다른 대우를 받는 세상이다. 이곳 호주 사회도 그건 마찬가지이다. 이민자에겐 더욱 그렇다. 사회와 경제 발전에 필요한 전문 기술직 혹은 숙련공들에 대해서는 비자나 이민에 대해 많은 길을 열어주지만 그렇지 않으면 냉대받는다. 돈 안 되는 놈은 떠나라는 느낌이다. 사회는 왜 인간이 경제적(자본적) 부가가치를 창출카지노 게임 사이트 것으로만 존재의 가치를 매기는 것일까, (물론 아직까지 비자본적 가치를 책정할 기술력이 없다. 사실 비자본적 가치란 당장은 보이지는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복잡 미묘하게 퍼져나가 다수의 의식과 행동양식에 미치는 엄청난 효과이다. 예를 들면 과거 예수가 행했던 말과 행동이 시간이 지나고 사람들의 가치관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져간 것처럼...) 그렇게 경제적 가치가 없는 인간들은 사회에서 멀어지고 그래서 사회가 아닌 자신만의 다른 세계로 숨어들고 스스로를 격리한다.
은둔의 시작
그들이 처음부터 은둔 생활을 즐기진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는 분명 여러 가지 요인
들이 작용했을 것이다. 온라인 시대의 도래, 코로나로 인한 재택근무와 격리(비대면), 온라인 콘텐츠(흥밋거리) 홍수, 미세먼지 등등 여러 수많은 요인들로 인해 이제 굳이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전혀 지장이 없게 된 사회의 전반적인 시스템도 큰 몫을 했을 것이다.
영화 [김씨 표류기] 중에서
하지만 우리가 생각카지노 게임 사이트 그들의 은둔시작은 [더 글로리] 같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올 법한 스토리일 것이다. 다수가 대면 사회와 관계 속에서 받은 상처와 시련 때문에 숨어든다. 상처는 치유되어야 하고 시련은 극복해야 한다. 물론 인간이란 극복하는 동물이고 그 과정 속에서 성장한다는건옳은 말이다. 근데 말에서만 그치는 이유는 뭘까. 그들이 왜 상처와시련을 치유하고 극복하지 못하는가를 드려다 봐야 한다.
"넌 딴 거 필요 없고 그냥 공부만 열심히 해!"
과거 어른들이 살아가던 세상은 전쟁통에 생명을 부지하던 시대 아니면 다들 못 먹고 못 입던 시대를 살아왔다. 그때는 대부분이 다 그렇게 살았다. 다들 시련과 고난의 행군 속에 같이 카지노 게임 사이트 사회였다. 너도 나도 다 힘들면 동지애가 발휘된다. 이건 마치 군대 훈련소에서 만나는 동기들이 모두 출신은 다르지만 고된 훈련 속에 모두전우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하지만 한국이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고 부가 나눠지고 편중되며 상대적 빈부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는 배운자들과 가진 자들이 가져갔다. 못 배우고 못 가진 자들이 가난의 되물림을 끊어내기 위해 선택한 것이 바로 자녀에 대한 전폭적인 교육 투자였다. 어떻게든 자녀를 대학에 보내고 공부시키려 온실 속의 화초처럼 키웠다. 온종일 책상 앞에서 책만 보게 한 것이다. (난 과거 고교시절 아침 7시부터 밤 10시 or 11시까지 야간자율학습으로 학교에서 머물렀다. 중학교 때는 하교 후 학원을 갔다. 그렇게 대부분의 시간은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온실 속의 화초
안타깝지만 그때 보던 책(교과서 혹은 전공서적)이란 게 깊은 사고와 생각 혹은 지혜를 주는 책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그냥 짧은 시간에 누가 더 많은 지식 정보를 암기하느냐의 싸움이었다. 배운 지식은 카지노 게임 사이트의 생각과 경험이 융합되어야 새로운 생각과 지혜가 생겨나지만 과거 우리의 공부는 계속 지식을 주입하기만 했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이 생각할 여유는 없다. 누가 짧은 시간 더 많이 집어넣는 경쟁 속에 살았다.
그렇게 공부만 한 지식인들이 만든 책들이 바로 과거 우리가 대학 시절 손에 들고 다니던 두툼한 대학 전공 서적 같은 것들이다. 보기만 해도 답답하다. 나는 그 책들을 주로 도서관에서 잠을 잘 때 베개로 이용했던 기억이 있다. 시험시간과 수업시간에만 보는 책이다. 근데 또 비싸기는 왜 그리 비싼지. 이건 그냥 저자가 자신이 아는 것이 많다는 것을 자랑하는 책일 뿐이다. 책은 독자를 위한 것이지 저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많은 이들에게 쉽게 잘 읽히는 글과 책이 생명을 가지는 것이다. 사실과 지식만 열거한 책은 생명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 지식은 이제 구글과 네이버에 널려 있다. (오픈소스이다.)
사고와 생각이 부재한 지식만 쌓인 나약한 육체와 정신은 또 다른 온실 속의 환경(회사, 조직, 단체등)이 아니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 스스로가 새로운 것을 생각하고 만들고 도전카지노 게임 사이트 것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과거엔 대학만 나오면 다 취업하고 직장을 가지던 시대였지만 이제는 그런 시대는 막을 내렸다. 온실이 끝나면 야생으로 돌아가야 카지노 게임 사이트 세상으로 변했다. 길들여진 야생동물(가축)이 야생에서 살 수 없듯이 온실 속 화초는 야생에서 생존할 수 없다. 그럼 그동안 길들여졌던 온실(방안)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만의 온실
이전에는 대량으로 사육되던 온실(사육장 - 학교, 회사, 단체등)에서 살았지만 이제는 개인 온실(사육장)로 바뀌었다. 비록 공간은 협소해졌지만 생각과 표현의 자유는 넓어졌다. 저마다의 세상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과거 웹소설 공모전을 준비하면서 느낀 점이지만 요즘은 판타지 스토리가 대세가 되었다. 드라마나 영화 그리고 소설도 판타지가 대세를 이루어 간다. 판타지는 현실과 상반되는 의미로 해석된다. 왜 판타지가 대세가 되었을까? 난 이게 은둔형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세계라고 생각된다. 오프라인 세계가 아닌 온라인 세계 혹은 공상의 세계에 더 많은 시간은 보내는 이에겐 현실의 삶과 오프라인의 스토리보다는 판타지가 더 친근할 수밖에 없다. 아니 그들은 사실 오프라인 세상과 현실의 삶을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현실의 스토리를 쓸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과거에는 소설을 쓰는 사람들은 인생을 중반부를 넘기고 어느 정도 인생을 살아본 자만이 삶이 녹아든 인간적인 소설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비상한 상상력으로 무장한 젊은 작가들이 대세로 떠오르고 있다. 그들은 여태껏 현실의 삶에서 생각하지 못한 세계를 그려낸다. 그리고 이런 판타지의 수요가 많아지는 이유 또한 코로나19 이후 더 많은 사람들이 현실의 삶이 아닌 온라인의 세계에 머물며 이제 지겹고 식상하는 현실의 뉴스와 이야기에 신물이 난 것 일수도 있다.
그들은 판타지와 상상으로 자신을 드러내며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한다. 어둠 속에서 이를 갈며 복수극을 준비카지노 게임 사이트 자들이 되기보다 나의 어둠과 상처를 드러내어 그것들을 자신에게서 떨쳐내고 그것들을 예술과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뭉크 [절규]
은둔형 인간은 어찌 보면 만들어진 세상에 적응하고 순응하기보다 자신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을 선택한 자들일 수 있다. 새로운 세계를 만들며 새로운 세계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선하든 악하든 카지노 게임 사이트 드러내면 선(善)은 선을 낳고 악(惡)은 선이 되어간다. 그렇게 자신을 치유하며 더 나은 사람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