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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먼지 Jan 25. 2025

이번 명절에는 산 사람에게 잘하자.

며느리 생일 잊어도 제사는 꼭 오라는 시아버님께



33년간 할머니 모시고 사신 우리 큰엄마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10년간 도리한다고 살아온 며느리가, 시아버지께 올리는 진지버전의

시아버지 전 상서쯤되시겠다.



아버님, 평일에 제사 못 가서 죄송한데,

작은 아버님께선 따님과 손주 데리고 왔는데 아버님 어머님 자식인 저희 남편이랑 언니는 안와서 "우리집은 아무도 없어서 낯이 안선다"고 하셨는데,

저는 사실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심한 감기몸살에 급체한 덕에 하루 한끼만 먹으면서 근무 중이었어요. 아프다고 말하면 꾀병같아서 그냥 말씀 안드렸는데,

아직도 제 부르튼 입술에 피딱지가 안 떨어져서, 직장동료들은 얼마나 아프냐 걱정해주는 마음에 괜시리 더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제사도 안가고 말이지요.


친정엄마가 제 생일이라고 보내주신 고기 6kg랑 LA갈비, 지인이 보내준 골드망고, 큰엄마가 시댁 드리라고 챙겨주신 씨알좋은 대추까지. 일찍 끝나 김포 가서 놀 생각뿐인 남편한테 어떻게든 아버님 어머님 얼굴 한번 더 뵙게 하려고 일산에 고기랑 대추 과일 들러서 드리고 가면 놀게 해주겠다며 꼼수부린 제가,

아들은 부모님 생각 거의 없는데도 어떻게든 그 머릿속에 부모님께 있을 때 잘해라, 하고 후레자식 되지 말라며 몇 번을 안 갈 아버님 댁에 억지로라도 아들 보낸 제 마음을 모르셔도 괜찮습니다.


그런데요 아버님,


하나 제가 언제 한번은 얘기드릴 게 있어요.

이미 눈치채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시외할머니한테 용돈 드린거 다시 뺏어서 어머님 드렸을 때 ,

제가 시외할머니 드리려고 사온 일본 양배추환소화제 드린다고 혼이 났을 때,

큰아버지가 친할머니 요양병원 직원분들하고 나눠마시라고 넣어준 박카스 두 박스를 다시 남편 차에 실으셨을 때,


저는 아버님의 그 인색함에 치가 떨린다는 걸, 언젠가 한번 얘기드릴 것 같네요.


가장 소중히 대해야 할 아버님의 배우자이신 어머님한테는 학교를 나보다 좋은 데를 나왔니 못 나왔니 하시고

그것도 모자라 제 동생 남자친구(지금은 제부가 되었죠)의 학벌까지 물어보시고는

전문대 나온 아버님의 아들, 제 남편한테 "너는 초대졸이라 기죽어서 어떡하냐?" 라시며 조롱인지 걱정인지 모를 말씀을 건네신 아버님을 보면서


무례함과 무식함은 나이가 들어도 고쳐지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어른도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아버님이 몸소 저희에게 보여주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왜 명절에 밤까고 대추 까느라 저랑 어머님이 부엌에서 바쁜데

소파에 누워서 야구 보시다가 리모콘은 아버님이 뒤로 떨어뜨려서 넘어간 것을

어머님을 툭툭 건드시면서 빼달라고 하신 겁니까.


왜 분리수거 하러 가면 자꾸 무거운 건 어머님을 주시고,

아버님은 가볍게 가시는겁니까.


왜 시할머님 요양병원 가서 아들이 비위가 약해 엄마 목욕도 못 시켜드리면서

며느리인 어머님이 군말않으시고 할머님 싹 씻겨드리고 로션도 발라드리는데도

그렇게 어머님이 아버님보다 뭘 모른다고 가스라이팅을 하시는겁니까.


도대체 왜.

감히.

남의 집 귀한 딸 데려다가 고생시켜놓으시고,

아버님의 부모님 제사에 그 귀한 딸인 어머님을

저보다도 뒤에 절하게 만드십니까.


제사에서 가장 높은 서열이 먼저 절을 해야 한다면,

저는 그 제사를 준비하느라 제일 고생하신 어머님이 먼저 절을 해도 시원찮다고 생각하거든요.

갈비뼈에 금이 갔는데도 장을 보시고 음식을 하시는데


그 갈비뼈 조금이라도 빨리 나으시라고 홍화씨볶아서 계피차랑 만들어온 저한테

쓸데없는 짓이라고 하시면서

아픈 어머님 더 못 부려먹어서 안달이 나신 분처럼 입으로만 바쁜 아버님이


제 남편이었다면 저는 제사상을 엎어버렸을지도 몰라요.

그나마 아들인 제 남편이 "우린 제사 안 받을거니까 엄마아빠 제사에 엄마가 마지막에 절을 하든 말든 나서서 분란일으키지 말자" 며 고삐를 잡아줬기에 이만큼. 이성을 찾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아이고 또 뭔 고기를 이렇게 보냈냐. 니네나 먹지~."

"아니에요 어머님 저희 둘이 어떻게 먹어요. 맛있는 거는 원래 나눠먹는거에요. 아버님께도 명절인사 드리게 바꿔주세요~."

제가 보내드린 것 잘 드신다고 짧게 고맙다 한마디 해주신 어머님 말씀이 달아서, 아버님께도 전화를 바꿔달라고 했던건데,

제 생일도 모르시면서 제사 안와서 낯이 안선다고 말씀하시고는 별 얘기 없이 내년엔 좀 와라 하시고 끊은 통화가, 제 마음을 아주 많이 어지럽혔답니다.


아버님.

죽은 사람이 산 사람보다 더 대접받아야만,

저와 제 남편이, 아버님의 아들이 더 잘 사는걸까요?


저는 골백번 생각해봐도,

이제 고인이 되신 시할머님보다야,

저 먼 강화도에서 다리가 불편하신데도 혼자서 사시는 90세가 넘으신 시외할머님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어머님은 티를 못내시는 게, 아버님 눈치를 보셔서 그러시는 것 같은데,

저는 소위 말해 며느리는 남입니다. 그러니

어머님이 당신 엄마이신 시외할머님챙겨드리는 게 못마땅하시다고,

손주며느리인 제가 시외할머님 용돈 챙기고 영양제 챙겨드리는 것까지 해라마라 하시지는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언제 우리 넷이 밥먹으러 갈 때 한번 말씀드렸죠?

"아버님 진짜 외할머님한테 왜 그렇게 인색하게 구세요? 아무리 예전에 외할머님이 반대하시고 그러셨어도 어머님 엄마고 장모님이면 좀 그거 돈 좀 쓰면 어때서요! 저는 외할머니 일찍 돌아가셔서 챙기고 싶어도 못 챙겨드리는데, 거 어르신 소화제 그거 뭐 만원짜리 사는게 어떻다고 맨날 그렇게 주지마라 소용없다 그러시는거에요. 저희가 이거 사는 데 돈썼다고 대출못갚고뭐 굶어죽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세요 그러지 마세요 진짜."


저 진심 담아서 드린 말씀이었는데, 그 뒤로도 딱히 아버님이 변하실 것 같지는 않으세요.

그리고 안 변하셔도 그걸 제가 어찌 할 방법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어머님도 저도 아버님이 장모님이신시외할머니께 못하시던지 말던지 그냥 흘러가게 둘거에요.

그런데 제가 챙기고 싶어서 챙겨드리는 것까지 못하게 하실 자격은 없으십니다.


아버님은 어머님의 기대보다도 일찌감치 은퇴하셔서 누리실 수 있는 여유를 즐기며 50중반부터 집에 계시는데, 어머님은 아직도 누리시지 못하고 일하고 계시는 게 마음이 썩 좋지만은 않네요.

남편 따라 제 직장 제 지역 다 팽개치고 모르는 동네와서 7년동안 고생하던 제 모습이 꼭 어머님을 닮은 것 같아서 더 속상할 때가 많았어요.

해마다 제사는 꼭 지내야 하니 시어머니 갈비뼈에 금이 가도 제사상 바라시던 아버님과 작은 아버님이 저는

그렇게 미울 수가 없더라고요. 코빼기도 안 비치시면서 감놔라 배놔라 하시는 작은고모님도 마찬가지.


어머님의 형제 되셨던 시외삼촌 병환으로 돌아가셨을 때에도 물색없이 "제사 잘 안 지내서 그런다"는 말씀,

갑상선 재발하셔서 항암하시느라 입원하신 어머님께 "갑상선암은 암도 아니다"라고하시는 걸 보고, 저는 제가 어머님이었다면 남편 따귀를 한 대 올려부쳤을지도 모르겠다는 말씀.

꾸욱 참고 목까지 차오르는 걸 가슴으로 쓸어내렸습니다.


제 결혼식 전날 남편 통해서, 제 친아버지 경비로 일하시는 거 아버님 쪽 친척들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는 말 잘 들었습니다.

연애시절에도 굳이 남편 전여자친구들 얘기하시면서 저를 긁으려고 하신 것도 잘 참았다고 생각해요.

가게는 남편이 하자고 한건데 저한테 갑자기 "니가 꼬셨냐?그래서 쟤가 저러냐?"라고 하신 말씀도 하도 생생해서 잘 안 잊어버려요.

딱히 계획적으로 살지 않는 아들 통장에 얼마 모아놨는지, 세금은 보험은 얼마나 내고 있는지 대답해주지 않을 아들 대신, 주기적으로 가게 오셔서 견적에 영업에 접대에 수금에 다 하는 저 보고 "아들은 열심히 일하는데 너는 노는 것 같다"라고 말씀하셨을 때도 하하하 웃으며 넘긴 저였지만요,


아버님 모든 것에는 적당한 선이라는 게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아버님께 결혼생활 10년간 아버님으로 인해 이혼할 뻔 한 적이 3번정도 있었다는 말을 안 드리는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남편의 아버지로서 아버님을 존경은 못해도 존중은 해드리고 싶어 말을 아껴왔을 뿐입니다.

저는 또 착한 며느리병에 걸려있던 멍청이였으니까요.


그런데 아버님.

저도 이제 며느리 10년차이고, 항상 친정보다 시댁에 뭐든지 더 좋은거, 더 큰 거, 더 비싼 거 챙겨왔던 저 자신을 위해서라도,

답답한 건 좀 이렇게라도 풀고 살아보려고 합니다.


제발 죽은 사람한테 제사 지내느라 산 사람들 잡다가 버림받지 마시고,

서로서로 있을 때 거리 지키면서 상호적으로 좋은 영향을 주는 가족이 되어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제가 얼마나 독한 년인지는 친부랑 연끊고도 4년째 잘지내는 것만 보셔도 아실거에요.


저는 제 친부도 가족에 해가 되면 버릴 생각으로 살아왔고, 그렇게 제 부모 제 원가족보다도 온전히 10년을 아버님의 아들을 위해서 살아왔다고 감히 자신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돌아가시면서 남겨주신 저희 할머니의 작은 통장 속 비상금마저 아버님의 아들의 가게에 쏟아부었거든요.

친정엄마한테 받은 5천만원은 100원도 안 갚고, 큰엄마한테는 염치없이 천만원 백만원 턱턱 받고 뭘 더 해드리지는 못했어도,

아버님어머님께 가게 하면서 꾼 돈 5천만원 중에 그래도 4천만원은 갚았거든요.

그래서 저는 떳떳하고 당당하게 할 말은 하고 살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안그러면 4년 전 추석 때처럼 제 정수리에 오백원짜리 땜빵 두 개가 또 생겨날 지 모르니까요.


아버님.

아버님의 며느리는 싸가지가 원래 별로 없습니다.

그런 무싸가지인데 저희 친정엄마가 늘 시댁에 어떤 미움이 있어도 어른들께 할 도리는 다 하고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았기에, 그나마 지금도 친정엄마가 맛있게 담궈주신 겉절이와 김장김치를 10년째 내내 버님어머님께 전달해드리고 있는 것 뿐입니다.

혹 이웃들은 제게 착하다고 하지만, 저는 절대 착했던 적이 없습니다. 선을 넘지 않기 위해 그냥 참아왔던 것일뿐 저는 10년간 아버님이 제게 보여주신 약간의 무시와 조롱과 걱정과 불신을 아주 잘 알고 있으며,

그러한 모습을 제 남편에게서 최대한 아버님을 닮지 않게 하기 위해 오늘도 내일도 노력중이고 계속 노력할 것입니다.


저는 죽은 사람이 아닌, 산 사람입니다.

아버님의 한마디에 마음이 일희일비하는 마음을 다잡으려,

지금도 심호흡을 크게 하며 새벽에 정리되지 않는 저의 마음을 글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부디 이번 해에는 어머님 너무 힘들게 하지 마시고,

제삿밥 먹으러 오는 죽은 조상님들보다,

아버님을 늘 책임지고 계시는 소중한 아내, 어머님한테 더 잘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제가 내년 제사부터 어떻게 나올지 아버님의 아들에게 꼭 물어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며느리 생일에 용돈까진 바라지 않지만, '생일에 맛있는 거 뭐 먹었냐', 한마디 해주시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새해복 많이 받으시고, 올해 건강 챙기시는 한해 되시기 바라겠습니다. (봄에 생신 때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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