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 가입 쿠폰4.3 사건 그리고 오늘
착륙 준비를 알리는 기내 방송 소리에 창가에 기대 잠들었던 자세를 가다듬었다. 조금은 늦은 오후 시간 하늘에서 내려 다 본 검푸른 제주 바다엔 고기잡이 배들이 하얀 점처럼 떠 있었고, 멀리 보이는 12월 초순의 한라산은 오늘도 커다란 구름이 정상을 가득 덮고 있어서 눈이 쌓여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제주에 올 때 한라산 정상을 뚜렷하게 본 적이 있었던가 생각을 했다. 올 가을 세 번째 제주행. 걷기에 좋은 이유만으로 제주에 온다. 굳이 올레길이 아니어도 제주엔 걷기에 좋은 곳이 많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사방이 한적해서 평화로운 그러나 이국적인 나무들과 식물들을 마주치는 숲길이 있고, 360 여 개 오름들과 그 오름들 사이에 작은 들과 밭길이 있으며, 동서남북 땅 끝에는 오랜 세월 깎인 검은 현무암과 눈이 부시게 하얀 모래 해변을 따라 끝이 없는 길이 이어져 있다. 30만 년 전에 만들어진 한라산 백록담 보다도 훨씬 먼저 100만 년 전에 형성되었다는 서귀포층의 화석을 가까이서 직접 관찰할 수 있는 곳도 제주이다. 그래서 제주도는 어디를 걸어도 100만 년의 흔적을 따라 시간 여행을 하는 듯 신비로움이 느껴져서 좋았다.
10월에 왔을 때는 날씨가 썩 좋질 않았다. 닷새 내내 잔뜩 흐리거나 비가 내렸다. 어리목에서 윗세오름에 이르는 탐방로도 내내 비옷을 입고 안갯속을 걸어야 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씨에 누가 산에 오를까 싶은 생각에 주저했지만 딱히 생각나는 다른 일정이 없기도 했고, 비 내리는 등산길은 어떤 느낌일지 호기심으로 도착한 어리목 탐방안내소 주차장엔 비 내리는 이른 아침인데도 이미 적지 않은 차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이미 윗세오름으로 출발한 등산객들이 적지 않음을 확인하니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윗세오름까지 오르는 두 시간 여 동안 대부분 혼자서 빗속을 걸었고, 보이지 않는 풍경 대신 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느라 가쁜 숨소리, 비에 젖은 돌을 밟는 소리, 빗줄기가 나무들과 들풀과 돌계단에 부딪히는 소리. 사제비동산부터는 경사가 완만해지고 탁 트여서 맑은 날에는 한라산 정상과 멀리 카지노 가입 쿠폰 바다도 볼 수 있다는데 이 날은 비가 내리고 안개가 짙어 탐방로 주변에 지천으로 자생하고 있는 조릿대 말고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날씨 때문에 윗세오름에서 남벽 분기점까지의 코스는 닫혀 있어서 되돌아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빗속 등산을 했다는 새로운 경험에 의미를 두었지만, 날씨가 좋을 때 다시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빗길 등산을 마치고 나서도 남은 일정 동안 내내 날씨가 좋질 않아서 계획했던 산이나 바닷가 길 걷기를 포기하고 대신 평소에 잘 찾지 않던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비행기 시간이 늦은 오후인 마지막 날까지 날씨는 좋질 않았고, 우연히 카지노 가입 쿠폰 4.3 평화기념관을 들르게 되었다. 카지노 가입 쿠폰에서 그동안 가 보지 않았던 곳이 어디인지 찾아보다가 문득 5월에 어릴 적 친구들과 함께 왔던 봄 카지노 가입 쿠폰여행 기억 한 토막이 떠 올랐다. 친구가 이끌었던 송악산 근처의 작은 언덕에 올랐을 때, 탁 트인 남카지노 가입 쿠폰 바다 모습 반대쪽에 작은 표시판이 있었다, 다크투어리즘 코스를 알려주는. 내게 탄생의 신비감을 주는 카지노 가입 쿠폰도에서 다크투어리즘이란 말은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알뜨르 비행장과 군사 시설 공사에 제주도민들이 강제로 동원되었던 슬픈 역사는 사실 이곳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제주 전역에 걸쳐 많은 일본군 진지가 만들어졌으니 제주도민들의 고생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라를 빼앗긴 국민들이 감당해야 할 고통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비검속자 학살터와 추모비는 일제강점기의 일본에 의한 희생이 아니었다. 우리 국군에 의해 수 백명의 제주도민이 죽임을 당했고, 제주 4.3 사건의 한 부분이었음을 말하고 있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이 어떤 상황에서 무슨 이유에 의한 것이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추모를 마치고 무거운 마음으로 그 자리를 떠났던 그날의 기억이 문득 떠올랐던 것이다. 그때 제주도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에는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 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과 서청 (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 선거와 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이것만으로는 2.5만~3만 명의 민간인 희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경찰의 발포는 왜 촉발되었던 것일까? 제주도민들의 경찰과 서청에 대한 저항은 무슨 이유였을까? 38선 남측의 단독 선거와 단독정부 반대가 이유였던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와 이를 진압하기 위한 군경 토벌대 사이의 무력 충돌이 어떤 이유로 수 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 희생자를 만든 것일까? 최소한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하고는 제주 4.3 사건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세계 제2차 대전이 막바지였던 1945년 3월, 일본은 미국의 공격으로부터 본토를 방어하기 위해 카지노 가입 쿠폰도에 7만 명의 일본군을 배치했는데, 이는 당시 카지노 가입 쿠폰도민이 22만 명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얼마나 큰 규모였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7만 명 주둔에 필요한 주요 건물, 비행장 활주로와 비행기 격납고, 곳곳에 구축한 동굴 진지 등의 공사에 강제 동원되었을 카지노 가입 쿠폰도민들은 큰 고초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일제의 수탈과 탄압으로 피폐해진 삶을 견디지 못하고 육지로 또는 일본 오사카로 오로지 생존을 위해 수 만 명의 도민들이 카지노 가입 쿠폰를 떠났을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일제 못지않게 도민들을 괴롭혔던 친일파들에 대한 반감과 분노 역시 크게 쌓여 있었다. 그러던 중 일본의 항복으로 갑작스레 찾아온 8.15 해방은 카지노 가입 쿠폰도민들에게도 되찾은 자유에 대한 환희와 전국적으로 빠르게 퍼진 자주독립국가 건설에 대한 희망 그 자체였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했던 국내외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국가재건을 위한 움직임은 매우 적극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전승국 자격으로 한반도에 상륙한 미국과 소련은 일제 강점기에 설립한 임시정부는 물론이고 당시 자주독립국가로의 건국을 추진하던 일체의 정치단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승전 연합국이었던 미국, 소련, 영국이 그해 12월 말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조선 문제에 관한 4개 항의 결의서라는 이름의 합의서를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다.
- 민주주의 원칙에 의해 임시정부를 건설한다.
-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 미국과 소련, 영국, 중국은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최대 5년간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
- 2주일 이내에 미소 사령부의 대표회의를 개최한다.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추진하던 우리 국민의 열망과는 다른 신탁통치 결정은 커다란 충격일 수밖에 없었고,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진영 등 이념과 노선이 서로 다른 정치 세력들은 크게 분열되어 전국은 혼란 속으로 빠져 들었다. 일제 강점기에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 중에는 당시 러시아 혁명 성공으로 탄생한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과 공산주의 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은 이들이 있었고, 해방이 되자 새로운 국가를 공산주의 기반으로 세우고자 했다. 이는 대중의 호응과 지지를 크게 얻었는데, 당시 여전히 남아있었을 조선시대의 뿌리 깊은 신분제에 대한 반감과 일제 강점기의 착취에 대한 분노가 섞인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지주와 농민이 다 같이 잘 사는 나라를 세우자”, “기업가와 노동자가 다 같이 잘 사는 나라를 세우자” 등의 내용이 당시 카지노 가입 쿠폰도 민주주의민족전선 (민전)의 건국 5칙에도 반영되어 있었던 것을 보면 사회적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로부터 불과 40여 년 후에 공산주의가 몰락할 것을 알 수 없었겠지만.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북측은 소련이 남측은 미국이 점령한 한반도에 이어 11월에는 카지노 가입 쿠폰도에도 미군정이 시작되었다. 일본과의 전쟁을 끝내는 것에 집중했던 미국은 한반도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었기 때문에 신탁통치에 대한 준비도 충분치 않은 상태였다. 카지노 가입 쿠폰도에 들어온 미군정은 치안 확보를 위해 친일 경력의 경찰과 관리를 재등용하여 민심을 자극하게 되었고, 극심한 식량 부족 상황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도민들의 삶은 생존을 위협받을 정도로 어려워지면서 미군정에 대한 불만이 커지게 되었다. 육지에서 친탁과 반탁으로 나뉘어 정치적 갈등이 커지는 사이 육지와의 교통과 통신이 지금과는 달리 고립되어 있던 카지노 가입 쿠폰에서는 남로당 주도로 미군정과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었다.
1947년 3월 1일, 제주도 민주주의민족전선 (민전)이 주최한 3.1절 행사에 3만 명 가까운 도민이 참석했고, 행사 도중에 어린아이가 기마경관의 말에 차이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경찰에 대한 불만이 크게 쌓여 있던 시민들의 항의가 거세지면서 경찰서까지 몰려가자 폭동으로 오해한 경찰의 발포로 일반 시민 6명이 죽는 일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제주도민들을 크게 분노하게 만들었고, 미군정과 경찰에 대한 항의 표시로 제주도의 민관 직장인 95%가 참여하는 총파업으로 이어졌다. 미군정은 이 사건을 남로당 주도의 좌익 공산세력에 의한 폭동으로 결론 내렸고, 제주도민의 70%를 좌익 동조자로 규정하고 제주도를 공산화된 Red Island (붉은 섬)로 지목하기에 이르렀다. 대대적인 진압이 결정되면서 육지에서 당시 제주 경찰보다 많은 수의 경찰병력이 제주도에 급파되었고, 이때 반공산주의 극우청년단체인 서북청년회 (서청) 단원들이 제주도에 들어와 경찰, 행정기관, 교육기관 등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빨갱이 사냥 (Red hunt)’을 구실로 테러를 일삼아 민심을 자극하여 제주도민의 경찰과 서청에 대한 반감과 분노는 더욱 커지게 되었다. 이 무렵 미군정에 의해 불법화된 남로당은 제주 섬 전체에 걸쳐 모든 마을과 읍면에 공산주의 세포를 조직하여 도민들을 포섭하고 있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남로당 카지노 가입 쿠폰도위원회가 주도한 무장봉기가 시작되었다. 350명의 무장대가 12개 경찰지서와 서북청년회 등 우익단체 단원의 집을 습격했다. 경찰 탄압에 대한 저항으로 무장 봉기하는 것임을 주장하였고, 남한에서의 단독정부 수립과 단독 선거를 반대함으로써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 이란 구호를 사용했다. 당시 무장대가 도민에게 고하는 포고문 내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5월 10일 치러진 선거가 보이콧되고 이어진 6월 23일 재선거마저 실패하자 미군정은 많은 수의 군병력을 투입하는 강경 진압 작전을 결정했고, 이로부터 대대적인 무장대 토벌과 좌익 동조 민간인 검거 작전이 시작되었다. 8월 15일 남한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어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카지노 가입 쿠폰도에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이후 카지노 가입 쿠폰에서는 초토화 작전 아래 무장대뿐 아니고 군경의 탄압을 피해 한라산 중산간 마을로 피신해 있던 많은 수의 민간인들까지 토벌하기에 이르렀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 해제까지 7년 7개월 동안 2.5만~3만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고, 이중 33%가 노약자와 여성이었다. 군인 180여 명과 경찰 140여 명도 무장대와의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얼마나 많은 민간인이 좌익에 가담했고 동조했는지 정확한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누가 좌익이고 좌익이 아닌지도 구별되지 않았다. 좌익 무장대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희생된 주민도 많았고, 훨씬 더 많은 주민들이 좌익에 협조 내지 동조했다는 이유로 토벌대에 의해 희생당했다. 귀순하면 살려준다는 토벌대의 회유에 따라 백기를 들고 산에서 내려온 1만여 명의 주민 대부분이 노인과 부녀자 그리고 어린이들이었고,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집단 수용 후 처형되었다. 이들의 죽음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신탁 통치 준비가 부족했던 미국은 38선 이북 지역이 이미 공산주의 국가였던 소련과 내전의 승기를 잡고 있던 중국 공산당의 영향력으로 장악되어 괴뢰정부가 세워지는 것에 대한 대응책으로 남한만이라도 친미 자유주의 국가를 서둘러 세우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미군정과 결탁한 친미 정치세력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하여 남한 내의 좌익 세력에 대한 불안을 과장함으로써 반공 척결이라는 이름 하에 반인권적이고 반민주적인 정치 행동을 정당화하고자 했다. 남한 내 좌익 세력은 자주독립국가 건립을 내세우며 반미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적극적으로 반대했고, 소련과 중국 공산당의 지원에 힘입어 북측에서 이미 주도권을 잡은 공산주의 정치 세력은 남측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를 공산국가로 만들려 시도하고 있던 당시의 대립 상황에서 미군정과 친미 정치 세력이 강조한 반공주의는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특정 이념이나 사상과는 거리가 먼 일반인이 양쪽 정치 세력에 의해 이용당했다는 것이다. 좌우 어느 한쪽에 줄 서기를 강요받던 그들은 이념이나 사상보다는 배고픔 해결이 중요했던 이들이고,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낮에는 우측에 밤에는 좌측에 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 힘으로 만든 것이 아니기에 준비되지 않았던 해방, 그리고 준비되지 않았던 자주독립 건국 추진, 이념적 분열과 갈등으로 얼룩졌던 지도층 세력의 이기적 무능력, 패전국의 식민지에 서로 자기에게 유리한 정권 수립을 원했던 강대국들… 이런 상황과 역학 구도에서 굶주리고 헐벗은 대다수의 일반 사람들은 무엇을 어찌해야 했을까. 신탁 통치가 외세에 의해 결정된 것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이념과 사상을 초월한 타협과 협력으로 한민족을 통합하고 자주국가를 세울 수는 없었을까?
이번12월 제주 여행은 제주 4.3 사건의 역사적 현장을 걸어서 찾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사흘동안 올레길 18, 19, 20, 21, 1번 코스를 걸었다. 제주판 아우슈비츠 수용소였던 주정 공장 (제주 시내 소재. 올레길 18번), 곤을동 4.3 유적지 (올레길 18번), 너븐숭이 4.3 유적지와 순이삼촌 문학비 (올레길 19번), 성산 터진목 4.3 유적지 (올레길 1번)에서 당시 상황으로 돌아가 보고자 했다. 감히 슬픈 역사라는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아픔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다시는 절대로 되풀이되지 말아야 할 비극이다. 숙소에서 피로를 풀고 있던 어느 날 밤에 느닷없이 튀어나온 비상계엄 선포와 국회 상황 생중계를 보는 내내 준비되지 않은 해방을 맞은 혼란 속의 그때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든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 어쩌면 그때는 나와 내 주변이 죽음을 겪지 않았지만, 이번엔 아닐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은 아니었을까!
(제주4.3 사건 관련 내용은 제주4.3 평화기념관에서 발행한 자료를 참고하였고, 해방 후 역사적 상황에 대한 내용은 위키백과 내용과 관련 서적을 참고하였음을 밝힙니다.오류가 있다면 댓글에 달아 주시고, 저의 생각을 표현한 부분에 대한 정치적인 댓글은 사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