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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유 Dec 31. 2024

카지노 게임 연

올해 초, 일이 있어 부득이 서울로 갔고 지하철 9호선탔다.


버스표를 끊으면서도 예정된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원칙이 자기합리화로 느껴져 비겁하다 느꼈다. 서울로 가는 차에 오르는 건 다른 일이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가슴을 짓눌렀다.


늦은 오후 다시 내려오는 길, 깨달았다.

이 지하철은 여의도, 국회의사당역을 지난다는 걸.


미어 터지는 지하철 안. 조심 좀 하세요, 발을 밟으셨어요, 아우성 치는 사람들 틈에 껴서 나는 인상조차 쓰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고 해당 역에 당도해서는 잠시 내려 하차하는 사람들에게 길을 터줬다.


오래 전 그날의 아우내 장터처럼 쏟아지는 사람들을 보며 아, 작은 탄식이 흘렀다. 나도 저 성난 물길에 휩싸여야 했다는 죄책감, 부채감은 버스에 내려서도, 이튿날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20여 일이 지나 또 한번 있어서는 안될 사고가 났고 많은 이들이 떠났다.


나는 그 며칠 전 한해를 마무리하며 성탄카드를 쓰듯 글을 썼던 터였다.


글은 시의성이 중요하니 한해의 끝에 다다르기 전 발행 버튼을 눌러야 한다 싶었지만 불현듯 날아든 사고 소식을 접하고는 차마 발행할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그럴 수 없었다. 하나의 사고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생이 담긴 재난이었다. 내가 아니라고 아무렇지 않게, 산사람은 살아야 하는하루를 사는 게 버겁다고 느껴지는 일이였다.


일상을 살아야 했지만 쉴새 없이 뜨는 부고에 눈길이 자꾸만 부딪혔다.


부고에는 저마다의 생이 넘쳐 지나칠 수 없었다. 눈에, 마음에, 머리에 담으면서도 지나친 설명은 의도적인 자극성이 느껴져 눈길을 돌렸고, 형식적이거나 혹은 이기적이다 싶은 어떤 말들엔 거북함도 느꼈다.


생각. 생각이 쉬지 않고 흐르는 하루와 하루. 또 하루. 그 하루에서 나는 어떤 아이와 마주하게 됐다. 비행기 작은 창을 내다보는 21년생 꼬마의 동그란 뒷모습.


내겐 그 한 장으로 기억이 될 카지노 게임의 뒷모습을 보는데 아들이 내 무릎을 베고 누웠다. 아들의 보드라운 머리칼을 쓰다듬으니 봉긋한 이마가 드러났다. 아들은 어리다. 하지만 사진 속 아이에겐 제법 큰 형이다. 이렇게 큰 어린이도 귀며 관자놀이며 아직 솜털이 보송하다. 아들의 모습 위로 21년생 꼬마가 겹쳤다.


카지노 게임 연은 너무나 깊어 이리 마주보고 있어도 애틋한 것인데. 어떻게 그렇게 여린 생이, 귀한 연이 그렇게까지 짧을 수 있었을까. 이후로는 모든 소식들이 아이의 이야기로 비춰져 어떤 것도 끝까지 볼 수 없었다.


마음이 도무지 매듭을 짓지 못하고 이리 느린 걸음으로 서성이는데 올 한 해가 이렇게 강제로 마무리 된다는게 잔인하다 느껴진다. 생은 축복이지만 생은 또 비정한 것이기도 하다.


어떤 일들은 매듭을 짓지 못한 채 흘러가는 걸 허망하게 바라봐야 한다. 그게 미안하고. 그게. 미안하다.


다신,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 된다는 말도, 이젠 너무 무책임하다 여겨진다.


쉽지 않은 날들이다.

타자를 치는 손가락조차 무겁다.

이 글 또한 발행을 하는게 맞는지 모르겠다.





12월 29일 떠난 많은 어머님, 아버님, 친구, 이웃. 그리고 어린 생. 모두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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