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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형만 Mar 22. 2025

신춘문예) 카지노 쿠폰 / 임후성

카지노 쿠폰를 보라
코끼리끼리는 볼 수 없는 카지노 쿠폰를 보라
꼬리를 위해 서 있는 네 번째와 세 번째 다리를 보라
걸음을 뗄 때 발을 남기고 벗겨질 것만 같은 발의 접힌 거죽을 보라
달라붙어 있지 않고
그것은 끌려다닌다
우리의 난제였던 바깥이다
실체는 헐렁헐렁하다
그 안에서 기관을 해체하는 망치질 같은 카지노 쿠폰의 걸음을 보라
눈앞에 직접 정의된 카지노 쿠폰를 보라
걸을 때마다 부서지고 있지 않은가
간신히 어금니로 연결되어 있지만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지 않은가
카지노 쿠폰 안으로 들어가지 마라
안과 바깥은 서로에게 통증이 그지없다

뒤쪽 숲을 보라
나뭇잎들이 가지에 붙어 벌어졌다 오므라들었다 한다
나무 주위를 맴돌며 탈출이 어려운
바람의 원숭이들을 보라
가장 가까운 붉은색을 볼 수 없는 원숭이의 눈을 보라
저 영특한 종족은 의혹의 못에 박힌 매혹이다
이때 고개를 돌려 완전한 불의 형태로 시간을 태우는 대관람차를 보라
오전의 하품 같은 간격을 보라
회전의 무의미 아래 네게 권해지는 네 머릿속을 보라


주차장에서 마주친 사 년 전 그 사람을 보라
하천이 흐르는 대로변에서
다리 아래로 유혹해
교량의 접합부마다 극렬하게 박힌 카지노 쿠폰를 해가 질 때까지 함께 보았던 그 사람을 보라
카지노 쿠폰 하나를 빼 보고 싶었던 그 사람을 보라
그가 너를 찾아 나섰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카지노 쿠폰 하나를 갖고 있다
그와 상관없이 혼자서 한 번 더 다리를 건너라
다리는 흔들거린다
그 아래를 보라
조그만 구멍을 남기고 녹슨 생략이 있다


2023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이런 시를 만나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좀 어려운가요? 와, 이게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싶은가요? 그런데 제 경험상현대시는 내용이 길면 길수록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오히려 단순할 때가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조금만 말하려고 했는데, 적어놓고 보니까 왠지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거든요. 그러다 보니 중언부언하게 되고 내용은 점점 길어지는 식입니다. 그런 점에서 정말 어려운 시는 10행 이내로 마무리한 시가 더 어렵지 않을까 싶네요.

심사평은 나중에 보기로 하고 일단 시부터 살펴봅시다. 제목이 ‘카지노 쿠폰’인데, 앞뒤 수식어가 없어서 그런지 일단 눈에 확 들어옵니다. 내용을 보지 않고 제목만으로 내용을 추정해보자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카지노 쿠폰의 기능을 먼저 떠올릴 수 있겠죠. 카지노 쿠폰는 우리말로는 나사쯤 될 텐데요. 이는 뭔가를 연결하는 부품이죠. 그럼 이 시도 뭔가를 연결하는 그런 내용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겠죠. 그러니 우리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내용을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면 어떡하냐고요? 아니면 아닌 거죠 뭐.ㅎ

자, 그러면 화자는 무엇과 무엇을 연결하고 싶은 걸까요? 1연을 읽고 바로 분석하지 마시고, 3연까지 내리 읽어봅시다. 우리가 현대시로 부르는 그런 종류의 시는 늘 이렇게 읽어가면서 바로 해석하기보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감상해보는 겁니다. 그렇게 두어 번 읽은 후에 전체적으로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이게 중요합니다. 다음으로는 제목과 매치해서 우리가 상상했던 내용이 맞는지 비교해보는 겁니다.




우리는 처음에 볼트니까 뭔가를 연결하는 거겠다, 그러니 관계에 관한 내용일 거라고 추정했죠. 그런데 내용을 보니까 얼추 맞는 것 같군요. 이제 큰 거 하나는 맞춘 겁니다.ㅎ 이 시는 관계를 말하는 거고, 이제 그 관계를 어떤 형식으로 말하고 있나, 그걸 살피는 겁니다. 어떤 형식으로 말하고 있나요? 1연에는 코끼리가 나오고, 2연에서는 숲과 대관람차가 나옵니다. 그리고 3연에서는 사 년 전 그 사람이 나옵니다.

사실 이 작품은 2연이 없어도 크게 무리는 없습니다. 혹은 1연의 절반쯤은 생략하고 2~3연으로 바로 넘어가도 됩니다. 가장 중요한 연은 마지막 3연이고, 이걸 말하기 위해 1~2연으로 떡밥을 던져놓은 거겠죠. 참, 그리고현대시에서는 한 문장 한 문장을 전부 해석하려 드는 습성은 좋지 않습니다.우리가 화자가 아닌 바에야 정확히 알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다만, 핵심적인 시구가 무엇인지, 주제가 무엇인지만 파악하고 넘어가면 됩니다.


내용을 보면 자꾸 뭘 –보라, -보라고 합니다. 이런 표현은 화자가 독자를 주도적으로 끌고 들어갈 때 쓰는 표현입니다. 이게 맞나? 왜? 독자가 그렇게 의문을 제기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독자로서도 막무가내로 끌려들어가는 겁니다. 아, 그렇지, 맞아. 카지노 쿠폰를 보라고 했으니 우리는 뜬금없이 코끼리를 떠올리고, 결코 꼬리를 위해 서 있을 리 없는 네 번째와 세 번째 다리가 꼬리를 위해 서 있게 됩니다.

또 코끼리가 걸음을 뗄 때 발을 남기고 벗겨질 것만 같은 발의 접힌 거죽을 보라고 합니다. 마치 장화를 신고 진흙탕을 건널 때 장화가 벗겨지는 것처럼요. 그런데 하고많은 동물 중에 왜 하필 코끼리였을까요? 제가 생각하는 첫 번째는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말하고 싶은데 거대한 사회를 말하자면 아무래도 약한 사슴이나 기린, 혹은 사나운 사자나 호랑이보다는 거대하면서도 조용하게, 그러나 묵묵히 존재하는(작동하는) 코끼리가 제격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로는 볼트가 지닌 뭉툭한 이미지가 코끼리 발과 닮지 않았나요? 저는 그래서 코끼리로 정하지 않았나 싶더군요.

코끼리끼리는 볼 수 없는 카지노 쿠폰를 보라고 합니다. 이는 동등한 입장에서는 서로가 동등해서 차이를 볼 수 없으니 제3자의 입장에서, 혹은 거대한 사회라는 조직의 안에서는 볼 수 없으니 바깥에서 보라는 말이겠죠. 안과 바깥이 서로에게 통증이라고 했으니 사회의 축을 이루는 중심과 소외된 바깥을 떠올릴 수도 있겠고요. 그렇다면 꼬리 역시 공동체의 가장 바깥이면서 소외된 부분으로 볼 수 있을 겁니다. 발의 접힌 거죽도 관계적 측면에서 보면 공동체의 가장 바깥이며 꼬리처럼 주변부, 혹은 필요 없을 것 같은 부분이죠. 그래서 바깥은 불필요하게 인식되는 곳이므로 난제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이들을 다 제거하고 나면 결국 중심의 실체도 부실할 텐데요.

이를 공동체적 관계로 보면 안과 바깥이 서로를 적대시하고 편을 나눠 밀어내려고만 하지 않나요? 이처럼 단단해 보이는 공동체도 밖에서 보면 불안하게 부서지고 있지는 않은지, 직접 정의된 카지노 쿠폰를 보라고 합니다. 강인함의 뜻을 품은 어금니가 간신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으로 보아 그만큼 위태롭다는 것이고, 그런 사회는 부분과 전체의 관계에서 필시 무너져 내릴 테니까요. 그러니 코끼리 안으로 들어가지 말고 전체를 보라고 합니다.정리해 보면 1연의 주 심상은 헐렁헐렁한 실체에, 해체하는 망치질, 걸을 때마다 부서지고,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관계겠죠.



2연으로 가면 이제 숲을 말합니다. 여기서 앞쪽이 아닌, 뒤쪽 숲을 보라고 하죠. 뒤쪽이라는 건 1연에서 언급한 접힌 거죽이나 꼬리와 같은 소외의 의미가 아닐까 싶네요. 바람의 원숭이가 무엇을 뜻하는지, 원숭이에 집중할 필요는 없습니다. 서두에 말했듯 하나 하나 해석에 매달리면 시는 어려워지니까요. 언제나 나무 주위를 맴도는 바람을 나무타기를 즐겨하는 원숭이로 비유했을 수도 있겠네요. 숲이 공동체고 나무가 중심이라면 그 곁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원숭이는 가장 바깥의 존재일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1연에서 코끼리끼리는 볼 수 없는 코끼리라고 했듯이 숲을 타고 노는 뒤쪽의 원숭이 역시도 가장 가까운 붉은색을 볼 수 없다고 말한 대목입니다.

코끼리에서, 뒤쪽 숲을 거쳐 이제 대관람차로 넘어갑니다. 이 역시 앞의 이야기와 같은 말을 반복적으로 하는데요. 지금껏 볼트가 관계의 연결이라는 기능에서 해석했으니 대관람차 역시 시간의 연결적 의미로 해석하는 게 맞겠네요. 불의 형태로 시간을 다 태우면 시간은 사라질 겁니다. 무의미하게 회전하는 대관람차에서 오전을 보내고 오후와 밤으로 이어지는 무의미한 시간을 봅니다. 불의 형태로 타다가 의미 없이 사라지는 오전과 오후가 삶을 어떻게 연결하고 있는지, 그 하품 같은 헐렁함을 보는 거지요. 마치 1연에서 언급한 헐렁헐렁한 실체를 보듯이.



이 시의 핵심은 바로 3연에 있습니다. 비로소 제목으로 사용한 볼트가 나오거든요. 그리고 그 볼트는 교량의 접합부마다 극렬하게 박힌 볼트였고요. 여기서 극렬하다는 건 바로 1연의 마지막 행에서 안과 바깥은 서로에게 그지없는 통증을 상기시킵니다. 2연에서 숲의 바깥을 봤으니 이제 다리 아래의 안쪽을 들여다 볼 시간입니다. 볼트 하나를 빼 보고 싶었다는 건 관계의 연결을 끊는다는 뜻이겠군요. 그래서 혼자 건너는 다리는 흔들거릴 텐데, 그때 관계가 빠져나간 자리에 녹슨 생략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시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1연의 거대한 사회적 관계에서 점점 축소되다가 마지막에서 개인적 관계로 나아감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거시적 관계라는 건 미시적 관계의 연결로써 가능한 법이니까요. 여기서 볼트가 이어주는 관계의 의미를 사랑으로 볼지, 혹은 공동체적 규범으로 볼지는 독자의 몫이겠지요.




그럼 마지막으로 심사평을 한번 보겠습니다. 아래와 같습니다.

‘볼트’는 코끼리 다리에서 볼트를 연상하고 코끼리 몸집과 사회 구조를 빗대어 전개하는 시다. 코끼리를 알기 위해서는 코만 만져 봐서는 안 된다. 펄럭이는 귀, 네 개의 튼튼한 다리, 길쭉한 코, 단단한 상아까지 만져 봐야 한다. 그의 시 쓰기가 톺아보기를 지향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막힘없는 상상과 내달리듯 호흡하는 문장은 읽는 맛도 더해 주었다.

보다시피 심사평에서도 자세히 말하진 않습니다. 심사평대로 코끼리 몸집을 사회라고 보면 사회를 잘 알기위해서는 여기 저기 다 살펴봐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한 것을 살피는 과정이 꼬리를 위해 서 있는 다리를 보는 것이고, 발의 접힌 거죽을 보고, 망치질 같은 코끼리의 걸음을 보는 것이며, 뒤쪽 숲을 보는 일이기도 하며, 원숭이의 눈을 보고 대관람차를 거쳐 극렬하게 박힌 볼트를 함께 보았던 그 사람(=관계)을 보라는 것입니다.




처음에 저는 게시판지기를 맡으면서 이곳은 시 창작에 관한 이론을 공부하는 곳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역시나 이 시가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지 주관적인 감상이나 해석을 하지도 않겠다고 했죠. 그저 지난날의 당선작을 살피면서 어떤 점이 심사자들의 눈에 띄어 당선작이 됐을까, 그쯤을 살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갈수록 해석을 겸하는 경우가 잦은 편인데 시의 해석은 저마다 다를 수 있으니 참고만 하시기를요. 기표는 기의를 포함하듯이,제가 하는 해석은 수많은 기의 중 하나로 보면 됩니다.

그럼 초심의 마음으로 이 시가 왜 당선작에 들었을까? 분석해보면 일단‘카지노 쿠폰’라는 금속성이 주는 단단한 이미지입니다. 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 하시겠지만, 서정적인 온도가 없으면서 단단하고 작은 이미지를 떠올리는 ‘카지노 쿠폰’라는 제목이 호기심을 자극했을 겁니다. 또한–보라, -보라, 로 이어지는 시의 형식이 눈에 들었을 것이고, 다음으로는개나 고양이가 아니라 무려 카지노 쿠폰가 나오고, 생뚱맞게도 원숭이를 등장시킨 게 먹혔을 겁니다.마지막으로 3연이 주제 연에 해당하지만, 솔직히‘녹슨 생략’이라는 진술을 빼고 나면 매혹적인 시구는 별로 없습니다. ‘사 년 전 그 사람’도 매력적이긴 하지만 이미 1~2연에서 관계적 의미를 다 설명했기에 3년의 ‘그 사람’은 약간의 포즈만 취해줘도 심사자에게 충분히 어필됐을 겁니다.



)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내용이 길면 오히려 단순하다는 걸 늘 염두에 두시길요. 짧을수록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여백이 그만큼 커서일 겁니다. 존 케이지의 <4분 33초를 떠올려보십시오. 4분 33초 동안 침묵하는 연주에서 관객은 스스로 소리를 내고, 그 공간의 울림이 주는 여백을 깨닫는 과정입니다. 아래 글은 케이지가 이 곡을 만든 이유를 Daum 백과사전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내가 죽은 뒤에도 소리는 계속될 거라는 말, 우리가 쓰는 문장 또한 그러할 것입니다.

『케이지가 결정적으로 〈4분 33초〉처럼 극단적인 침묵으로 구성된 작품을 구상하게 된 계기는 1951년 일어났다. 그는 하버드 대학의 무향실을 방문하게 된다. 무향실은 벽, 천장, 바닥 등이 방으로부터 나는 모든 소리를 흡수하여 아무런 소리의 반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러나 이 공간을 방문했을 때, 그는 아무런 소리를 못들을 것을 기대했으나,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나는 두 개의 소리를 들었다.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은 소리였다. 내가 이를 무향실의 기술자에게 설명했을 때, 높은 소리는 내 신경계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낮은 소리는 혈액 순환에서 비롯되는 소리라고 일러주었다. 내가 죽을 때까지 소리는 존재할 것이다. 그 소리들은 내가 죽은 뒤에도 계속될 것이다. 우리는 음악의 미래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결국 〈4분 33초〉는 완벽한 침묵의 불가능성에 대한 케이지의 깨달음을 반영한 작품이 되었다.』

https://www.youtube.com/shorts/Tx9U0XxN35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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