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스틸크로그
2024년 무더운 여름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삶을 조명해 보는 글쓰기’라는 매혹적인 타이틀이 마음속에 들어왔다. 메모도 잘하지 않으면서 이상하리만치 마음 바닥에 조용히 꿈틀거리고 있던 글쓰기에 대한 호기심은 이동시간이 1시간 30분은 족히 걸리는 에세이 수업을 신청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서울 후암동의 작은 독립서점에서 글로 자신의 삶을 표현해 온, 혹은 표현하려는 5명이 모였다. 손님들의 카지노 게임 너머로 책방 관계자만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은, 소위 관계자 외 출입 금지 구역의, 테이블에서 3주라는 기간 동안 우리는 목요일 저녁마다 서로의 글을 읽고 감상했다.
글로 만난 사이
굳이 정의하자면 이렇다. 서로에 대해 따로 묻지 않지만 와인에 어떤 안주를 좋아하는지, 어머니가 어떤 반찬을 해주시는지, 태어나서 자란 곳이 어디인지, 가족에 대한 어떤 애틋함이 있는지, 전 남자친구와의 추억이 어떤 것이 있는지 알고 있는 사이.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깝다고 할 수 있는,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가지고 있는 열린 결말의 사이랄까?
'스틸크로그'도 5명 중에 한 명인 샬롯의 글로 먼저 접했다. 스틸레토 힐을 즐겨 신던 그녀가 크록스를 신고 뛰어다니게 만들고, 사천진해변의 파도소리와 달빛을 안주삼아 와인을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하던 그 공간. 샬롯과 샬롯의 반쪽이 하고 싶은 것, 모든 낭만을 다 때려 넣은 곳이라던 이 공간을. 나머지 낭만주의자 4명이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12월의 어느 날, 코끝은 시리지만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하던 날, 우리는 강릉행 기차에 발을 올렸고 글로만 보던 그 공간을 실제로 만나게 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2박 3일 동안 지냈던 스틸크로그는 나 자신을 조명하는 카지노 게임이었다.
밖의 소음에 방해되지 않기 위해 두텁게 쌓은 벽과 견고한 창과 문. 해가 저물며 주황색으로 물들어가는 하늘과 함께 사색할 수 있는 작은 마당과 테라스. 경험을 공유하려는 책방지기의 고집이 느껴지는 독립서점 ‘한낮의 바다’에서 샬롯이 엄선해서 방안에 놓았을 책들. 그 위로 커피포트와 함께 가지런히 놓여 있는, 커피마니아들의 방앗간인 '봉봉방앗간' 드립백과 차분함을 찾아 줄 '맥파이 앤 타이거'의 논카페인 티백. 그 옆엔 생소할 수 있는 감잎차에 대해 샬롯이 손수 적은 우려내는 방법과 바닷가로 나가는 길을 귀엽게 색연필로 그려놓은 그림 지도.
하루를 묵더라도 일상에서 가빠졌던 호흡이 잔잔해지고, 잔잔해진 템포에 맞춰 차를 우리고 노을을 마주하며 책을 펼쳐볼 수 있도록, 고요함 속의 묵직함을 느끼기를 바라는 샬롯의 선택들이 모여 아늑하게 방을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공간, 스틸크로그의 BAR, '리그넘파인트'가 있다. 뭐랄까. 집으로 따지면. 거실 같은 장소이다. 함께하기에도 혼자 있기에도 좋은 장소. 따뜻하게 실내를 데워주고 있는 벽난로와 그 옆에 놓여있는 장작들. 애니메이션 '고양이의 보은'이 생각나게 만드는 흑단, 포터, 영신이라는 이름을 가진 고양이들. 그리고 그 안을 가로지르는 짙은 검은색의 긴 원목테이블. 더할 나위 없이 겨울을 즐기기에 완벽한 장소였다. 검은색의 긴 원목 테이블은 ‘블랙홀’이라고 불린단다. 한번 앉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우리는 그곳에서 6시간 동안 화장실도 가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와인과 생맥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간직하고 싶은 문장들과 영감이 한데 어우러져 한도 초과된 벅차오름을 어떻게 하면 더 잘 간직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사람들과 어떤 시간을 보내느냐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여기서의 시간은,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함께하는 즐거움은 물론이고 그 즐거움을 빗어내는 카지노 게임의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었다.
누구에게나 공간은 존재한다. 일을 하는 공간, 밥을 먹는 공간, 잠을 자는 공간 등. 그 공간의 형태는 바뀌기도 하고 고정되어 있기도 하다. 언제부터인지 변화 없이 고정돼 있는 공간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게 나만의 공간을 찾아 헤맸었다. 온전히 나의 호흡을 느낄 수 있는 곳. 그런 갈망 속에서 혼자서 하천변을 뛰기도 하고, 카페를 가기도 하고, 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가곤 했다.
그럼, 혼자 있을 수 있다고 해서 그곳이 나만의 카지노 게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여행지에 가서도 숙소에 가만히 있기보다는 다른 조용한 공간을 탐닉하러 나갔었다. 그래서 항상 떠나기 전에 하는 일은 구글맵에 규칙 없이 초록색, 파란색 점들로 점묘화를 그리는 것이었다. 강릉도 마찬가지였다. 각자의 시간을 보내기로 한 둘째 날, 습관적으로 책과 노트를 챙겨 설레는 마음으로 스틸크로그 근처의 카페로 향했다. 카페의 꼭대기 층에 앉아 여느 때처럼 책을 폈다. 근데, 집중이 되지 않았다. 넓은 공간에 고작 나를 포함해 두 테이블만 앉아있을 뿐인데 책도 읽히지 않고, 일기도 써지지 않았다.
그저 숙소로, 아니 스틸크로그로 돌아가고 싶었다.
신기한 감정이었다. 항상 찾아 헤매던 카지노 게임이, 밖이 아니라 현재 머물고 있는 그 카지노 게임이라는 것이. 이미 주어져 있는 카지노 게임을 더 탐닉하고 싶고 머물고 싶어 한다는 것이. 언제나 숙소는 숙소일 뿐이었는데.
박웅현 작가 曰 ‘좋아하는 것을 가지는 삶에서 가진 것을 좋아하는 삶으로’.
스틸크로그에서는 찾아 나갈 이유가 없었다. 이미 그곳에 있었다. 내 호흡을 느끼고 조명해 줄 곳이.
여행이라는 단어는 아직 가보지 않은 곳, 매 순간 환경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활동들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기분 전환이라는 명목하에 새로운 지역의 맛집과 카페를 가기도 하고 자연을 찾아 산과 바다를 찾아가기도 한다. 왠지 모를 인생의 전환점이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속 작은 기대감과 함께. 이 모든 것을 즐기기에 강릉은 충분히 매력적인 곳이다. 실제로 이번 여행에서도 각자의 취향을 여과 없이 뿜어내고 있는 소품샵(개인적으로 강릉 예술가들의 쇼룸이라고 하고 싶다.) 분홍색과 연보라색이 유화 물감처럼 어우러지는 달이 뜬 바다, 바닐라와 초콜릿 향이 조화롭게 번지고 있는 카페, 무엇하나 놓치고 싶은 곳이 없었다. 그 중심에서 스틸 크로그는 매력적인 장소를 가기 위해 잠시 머무는 숙소가 아닌, 그 장소들에서 느낀 기분들을 잘 꺼내서 내 안에 예쁘게 담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곳이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있을 수 있게 그리고 그 모습이 제법 마음에 들게 해주는 나만의 은신처. 나에게는 스틸크로그가 그렇게 다가왔다. 든든한 비밀 은신처가 생겼다는 설렘 때문일까 2024년의 겨울을 충만하게 마무리하고 다가올 2025년을 시작할 용기를 얻은 기분. 내 안의 작은 불씨를 찾아 준 강릉의 멋진 예술가들과 스틸크로그, 무엇보다 공간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 샬롯의 배려를 포함해 숨은 취향과 영감을 찾게 해 준 4명의 낭만주의자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충만한 마음을 안고 마무리한 2024년의 행복한 겨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