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안녕, 안녕.
사람들이 쳐 주는 박수 소리가 그렇게 좋았다. 수 개의 눈동자는 나를 향해있고 두 손바닥이 맞부딪히며 가벼운 리듬을 만든다. 그들의 눈빛에서 감탄을, 환호를, 경외감을 읽을 수 있었다. 두 발이 조금씩 바닥에서 떠올라 공중을 헤맨다. 솜사탕처럼 가벼워진 몸을 이리저리 흔드는 동안에도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 춤을 추는 자아가 분명 내 안에 살고 있다. 그녀를 지금부터 ‘카지노 게임’로 칭하기로 한다.
정확히 5살이 되던 무렵 카지노 게임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부모님의 증언으로는 피부도 까무잡잡한 5살짜리가 TV에 나오는 마이클 잭슨을 보며 두둠칫 춤을 따라 추었다고 한다. 고된 밭일을 하고 돌아오면 까만 콩 같은 5살짜리 딸은 위문공연을 펼쳤다. 그 모습을 보며 부모님은 소소한 재미를 느꼈다. ‘빌리진’에 맞추어 문워크를 추는 5살이 흔치는 않았을 테다.
카지노 게임 신체의 나이보다 성숙했다. 12살이 아직 동요를 즐겨 부르던 시대였다. 그러나 카탈레나의 부추김에 의해 어른들과 비슷한 몸동작을 취하는 방법을 알았다. 없는 몸의 볼륨을 이용해 열심히 몸을 파도처럼 일렁이며 흔들었지만 생각만큼 웨이브는 멋들어지게 나오지 않았다. 어서 빠른 발육과 성장이 일어나 몸에 굴곡이 생기길 바랐다. 아주 야하고 매끄러운 웨이브를 보여주고 싶었다. 물론 발육은 생각과 달리 옆으로만 이루어졌다.
사춘기가 시작될 즈음 카지노 게임 동네 친구들을 모아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가정용 컴퓨터가 몹시 드물고 유튜브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때라 요즘처럼 느린 화면, 거울 모드 등의 영상은 있을 수 없다. 안무를 읽어낼 방법은 오로지 브라운관. 매의 눈으로 가요톱텐 무대를 지켜봐야 했다. 운이 좋으면 비디오테이프로 무대를 녹화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할아버지 춘일에게 TV 시청의 전권이 있는 우리 집에서 녹화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별수 없이 춘일의 심부름을 수없이 해내고 시청권을 따냈다. 수요일의 가요톱텐을 눈 빠지게 지켜보며 춤동작을 복사해야 한다. 게다가 아직은 댄서들이 전면에 나서지 못하던 시대였다. 카메라는 춤을 추는 전체적인 모양새보다 가수들의 별 뜻 없는 몸짓과 꽃 같은 얼굴만을 가까이 잡아주었다. 결국 몇몇 동작은 무대에 비친 댄서들의 그림자로, 또는 방금 스치고 간 듯한 화면의 잔상으로 잡아내야 했다.
CCTV에서 범인 잡아내듯 따낸 안무를 가지고 카지노 게임 당당하게 등교했다. 정규 수업을 마친 뒤, 비어 있는 학교의 강당에 몰래 모여 서로가 서로에게 춤을 가르쳐주었다. 물론 카지노 게임 단연 리더의 역할이었다. 안무를 따는 실력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중요 동작들 사이사이 비어 있는 곳의 안무는 오로지 카탈레나만이 알고 있었다. 어느새 하나의 크루가 되어버린 친구들도 인정했으며 아무도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불만이 필요 없다. 카탈레나가 없으면 춤 자체를 배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리더가 된 카탈레나의 지휘에 맞추어 안무가 만들어졌다. 이제 무대와 관객만 준비되면 모든 것이 완벽하다. 하지만 12살에게 무대가 쉽게 주어지던가? 연습은 매일 했지만 아주 가끔 우발적으로 생겨나는 학급의 오락 시간 이라던가, 소풍에서의 장기 자랑 때에만 준비한 안무를 보여줄 수 있었다. 그것이 카지노 게임 조금 슬펐다.
중고생 시절의 카지노 게임 함께 춤추던 크루들을 모두 잃었다. 다들 공부하는데 시간을 써야 했고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언젠가 찾아올 무대를 위해 거울을 보며 꾸준히 연습했다. 경탄의 눈빛도, 박수갈채도 없지만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바라볼 수밖에. 시험공부를 하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거울 앞에 섰다. 부모님이 싸우실 때도 소리 나지 않게 거울 앞에 섰다. 가끔씩 가족 모두가 집을 비우는 날이 있으면 반드시 거울 앞에 서야만 했다. 그래야 학생이었던 나는 카탈레나를 간신히 달랠 수 있었다. 그럴 땐 마뜩지 않았지만 막춤을 추었다. 그 와중에도 카지노 게임 왼쪽 팔 두 번 휘두르고, 오른쪽은 한 번. 즉석에서 안무의 형태를 갖추어 추곤 했다. 무대도, 관객도, 제대로 된 안무도 없던 암흑의 시기였다.
그렇게 맞이한 대학 생활에서 카지노 게임 등껍질 속에 구겨져 있던 날개를 꺼내었다. 함께 춤을 출 수 있는 동아리도 있었고 정식 무대와 관객도 있었다. 안무를 따는 실력은 여전했다. 며칠에 걸쳐 한 가수의 무대 안무를 모두 구성해 낸 뒤 동아리 회원들에게 쓰리, 포! 하며 알려주곤 하던 나날들이다. 그 지리멸렬한 과정을 견뎌낼 수 있었던 건 무대에 설 수 있다는, 누군가 내 춤을 봐준다는 기대 덕분이었다. 방송에 출연하는 가수가 아니었음에도 카지노 게임 몸매 관리까지 병행했다. 찬란한 무대를 만들기 위해서 둔중한 몸을 깃털처럼 만들어야 한다. 식단 관리를 하고 복근 운동을 병행했다. 더 많은 박수와 눈길을 느끼고 싶었다. 결국 대학 축제 무대에서 카지노 게임 루비처럼 반짝거렸다. 모두의 시선을 앗아가고 싶어 힘차게 팔을 돌리고 허리를 꺾었다. 기대한 대로 사람들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나의 무대에 온 기운을 쏟아버린 카지노 게임 박카스를 마시며 다음 무대를 준비한다. 바닥난 체력을 끌어 세우기엔 박카스가 딱이었다. 단숨에 마신 박카스 빈 병을 무대 한쪽에 밀어둔다. 흐르는 노래에 하얗게 웃었다.
춤 자체에서 행복을 느낀 것이 아니었다. 카탈레나에게 만족감을 줄 3 요소가 있어야 한다. 무대, 관객, 그리고 잘 짜인 완벽한 안무. 무대가 없는 곳에서 또는 나를 바라봐주는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는 춤을 출 마음이 도저히 생기지 않았다. 안무 없이 대충 틀어놓은 노래에 막춤을 추어야 하는 상황 또한 극한 마음으로 경멸했다. 보는 사람이 없는 춤, 무대가 없는 춤은 어떤 흥미도 일으키지 못했다. 같은 맥락으로 그래서 나이트클럽에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카지노 게임 모두가 한 공간에서 춤을 춘다는 사실에 기겁했다. 하나의 음악에 맞추어 각자 다른 춤을 춘다. 춤의 개수만큼 다양한 목적으로 모인 사람들은 나의 춤만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클럽에 가지 않을 이유는 충분했다. 오백 번은 가게 생긴 이미지였지만 발도 들이지 못했던 젊은 시절의 카탈레나.
그녀는 결혼과 출산 이후,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언젠가 찾아올 무대를 위해 가끔 노래를 틀고 몸을 움직여 보았지만 아무리 불러도 카지노 게임 대답하지 않았다. 춤을 추는 자아가 빠져버린 내 몸은 말캉하고 부드러운 분모자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말랑하고 둥그레진 어깨와 늦은 나이에도 계속 옆으로 발육 중인 허리, 무릎과 손목의 통증을 보고 카지노 게임 아주 먼 곳으로 도망가 버렸다. 더 이상 이런 몸에 갇혀 춤을 출 수는 없다며, 그동안 매우 즐거웠다는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나버린 것이다.
카지노 게임가 없는 나는 이제 아무리 신나는 노래를 들어도 춤추지 않는다. 무대도, 사람들의 박수 소리에도 흥미를 잃었다. 가끔 그녀가 내 안에 존재하던 눈부신 날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생활인으로서의 자아가 비대해진 바람에 밀려 나간, 그러면서도 제 발로 나갔다는 듯 자존심을 끝내 버리지 못하던 카지노 게임를 마음속 깊이 존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