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고향, 알던 모두가 조금씩 죽음에 가까워진 것을 봤다. 외할머니의 허리는 더 굽고 여위었다. 흐린 눈동자로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시더니 문득 “늙지 마래이…”라고 당부하셨다.
“늙지 마래이…할미는 언제 니처럼 젊을 때가 있었나 싶다.”
늙지 않을 방법이야 있다면 뭐든 하겠다며 웃어넘겼지만 뒤늦게 말 뒤에 숨은 쓸쓸함을 눈치챘다. 늙지 말라는 당부가 찬란한 젊음에 대한 찬사라는 것을. 그리고 할머니, 당신은 이미 그것을 잃어 서글프다는 뜻임을 알았다. 외할머니의 젊은 시절은 어땠을까, 어떤 인생을 사셨을까. 나의 외할머니, 홍만자씨의 이야기를 찬찬히 들었다.
만자씨는 6.25 피난민으로 대구에 정착했다. 피난 당시 포탄이 떨어지는 소리에 논두렁에 몸을 숨기고 공포에 떨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먹고살기 바빠 혼기를 놓치고 노처녀가 됐다. 결혼시장에서 값 떨어진 취급을 받은 때 만자씨 나이가 24살. 중매쟁이는 대구에서 알부자집 첫째 아들을 소개해주겠다며 꼬드겼다. 물려받은 땅이 많다는 말에 솔깃해서 선자리에 나갔지만 외할아버지 첫인상이 썩 좋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키가 쪼매나고 궁디 덮는 돕바를 입고 나왔는데 영 보기가 싫어가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
남편이 바로 옆에서 듣고 있는데도 만자씨는 태연하게 남편 외모를 디스 했다. 그 유전자를 물려받은 딸들이 잠시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가 탐탁지 않은 티가 났는지 중매쟁이는 매일 같이 만자씨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까지 피하며 극구 사양하던 어느 날, 만자씨는 꿈을 꿨다. 선자리에서 본 그 남자가 말을 타고 집에 찾아오는 꿈이었다. 만자씨는 그 꿈이 어떤 점지, 계시와 같은 거라고 느꼈단다.
“내가 말띠거든…”
말띠 여자와 말을 타고 온 남자. 뭐, 그런 이유로도 결혼이 성사되는 모양이다. 신통하게도 남편을 업고 다닐 거라는 예지몽이라도 된 건지, 만자씨는 특유의 생활력으로 남편을 비롯한 육 남매를 먹여 살렸다. 사실은 일곱이다. 첫아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만자씨 마음속 깊이 첫아들을 묻어 뒀다. 딱 한번, 내게 강보에 싸인 아들을 보냈다는 말을 하신 적이 있다. 자식을 잃은 상처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만자씨는 생선광주리를 이고 장터에 나가기도 하고, 방앗간을 하기도 하고, 가끔 동네 일수도 놓으면서 조금씩 돈을 불렸다. 남편 명의로 물려받은 땅과 만자씨의 야무진 생활력이 만나 부동산으로 제법 먹고 살만해졌다. 두 분은 아직도 자식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사시니, 그것만으로 충분한 재산은 일구신 셈이다.
그럼에도 만자씨는 속에서 천불같이 들끓는 화를 주체하지 못했다. 여자로 태어난 것이, 남편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늘 화를 내셨다. 지금은 당신들의 전쟁같던 결혼생활을 보고 자란 6남매 중 3명이 결혼을 거부하고, 1명은 이혼한 것도 영 못마땅하신 듯하다.
만자씨는 결혼에서 도망쳐 종교에 몰두했다. 지금도 매일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고 철마다 김장이니 식사 봉사를 하신다. 좀 더 젊은 시절에는 소백산자락 구인사에서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머물면서 기도를 하신 적도 많다. 구인사에서 김장을 담을 때면 배추를 만 포기쯤 쌓아놓고 그 위를 걸어 다니며 소금을 뿌렸다고 하시기에, 과장이 심하시다 여겼다. 나중에 구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니 배추 만 포기쯤은 우스울 정도로 많은 양의 김장을 했다. 외할머니 같은 솜씨 좋은 아낙네들이 모여 일사불란하게 김치를 담는 모습을 보면 전쟁터의 군인 못지않은 절도가 느껴졌다.
만자씨의 사회는 그곳에 있었다. 그 안에서 존경받고 인정받았다. 열심히 기도 올리면 큰스님께 인정받고, 함께 봉사하는 어머니들과 동료애를 쌓고, 불교 경전을 공부하며 성취감을 느끼신 듯하다. 그런 만자씨가 요즘 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서 직장에서 제법 인정받는 커리어우먼이 됐을지도 모른다. 만자씨가 살던 시대에는 여자에게 많은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았다. 만자씨는 자유를 간절히 원했으나 가지지 못한 한을 부처를 만나 쏟아냈다.
부처님께 다음 생애는 남자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한단다. 그런데 막상 만자씨의 기도를 잘 들어보면 자식들 손주들 잘 되게 해달라고 빈다. ’엄마‘라는 이름은 만자씨에게 굴레일까, 아니면 지금껏 삶을 지탱해 온 사랑일까. 무엇을 위해 그리 간절하게 기도하시나. 인간에게 자녀는 영원을 꿈꾸게 하는 대상일까.
난 만자씨의 늙은 얼굴을 보면서 나의 미래를 본다. 만자씨는 나의 얼굴을 보면서 당신의 과거를 본다. 어쩌면 외할머니는 나에게 늙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라, 지난 날의 자신에게 말한 것일지도 모른다. 자유롭게 살아라. 결혼에 메이지 말고 아이들을 키우느라 세월 보내지 말고 하고 싶은 거 하며 살아라. 너의 젊음을 쉽게 포기하지 말아라. 내키지 않은 남자와 결혼하던 24살의 자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우리는 한 핏줄로 이어져 서로의 과거와 미래를 투영하며 현재를 공유하고 있다. 반드시 죽어 없어질 두 여자가 꿈같은 삶을 살다 한 줌 먼지가 될 것이다. 죽음과 노화는 우리 삶이 너무나 허망한 것임을 상기시킨다. 정신없이 살다 늙어버렸다는 외할머니의 말에서 나의 미래를 직감하고는 오래오래 울었다. 젊음은 찰나와 같아서 허망했다. 외할머니의 생명을 먹고 자라 엄마가 태어났고, 엄마의 생명을 먹고 자라 내가 태어났으니, 이제 나도 누군가에게 생명을 줄 때가 온 걸까. 34살이 되고 부쩍 아이를 낳고 싶다고 생각한다. 생명은 이렇게 다음 세대로 이어지고 개인은 늙고 병들어 죽는다. 이게 인간의 삶이다. 그런데도 자꾸 만자씨의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늙지 마래이…늙지 마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