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사무실 식집사가 됐습니다
'김 이사님 덕분에 사무실에 들어와도 분위기가 부드럽고 생기가 넘치는 것 같아. 뭐라고 할까 괜히 쾌적한 느낌이 든 다랄까...'
작년부터 난 사무실에서 투잡(?)을 뛴다. 하나는 나의 본캐인 회사 일을 하고, 또 다른 하나는 사무실 식물을 관리하는 식집사 노릇을 한다. 사실 식물을 볼 줄만 알았지 내가 식물을 관리할 줄은 생각도 못했던 일이다. 이게 모두 아내 때문이다.
아내는 식물을 좋아한다. 결혼하고 좁은 두 칸 반지하 셋방에서도 여분의 공간만 있으면 작은 화분들을 놓고 키우는 게 취미였던 아내다. 집이 반지하방이다 보니 마당이 없어서 식물을 키울 곳도 마땅치 않았지만 집으로 들어오는 옆문 통로조차 아내에겐 식물을 키울 소중한 장소로 쓰였다. 해가 잘 들지 않는 곳이라서 음지에서도 강한 식물을 많이 키웠다. 그래도 가끔은 안방 창문 밖으로 해가 들 때면 화분을 그리로 옮겨 조금이라도 해를 보게 하곤 했다.
이사 간 두 번째 집은 베란다가 없는 작은 연립이었지만 아내에게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공간이 생겼다. 이사 간 집이 맨 위층이다 보니 옥상으로의 접근성이 좋았다. 하여 옥상은 아내의 놀이터가 되었다.
옥상 있는 집에서 식물을 조금씩 늘이다 이사 간 세 번째 집은 베란다가 없는 다주택이었다. 하지만 식물 놓을 공간조차 없던 반지하에서도 식물을 키웠던 아내다. 아내가 찾으면 그곳은 화단이 되었고, 가꾸기만 하면 정원이 되었다. 그렇게 찾은 화단이 집으로 올라오는 계단이었다. 겨울을 제외하고 철마다 피는 꽃들 때문에 바로 위가 주인집이었는데 주인아주머니가 계단을 오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고 볼 때마다 칭찬이었다.
그렇게 집을 넓혀갈 때마다 조금씩 기쁨은 늘었지만 아내에겐 한 가지 욕구가 채워지지 않았다. 정작 겨울에도 꽃을 가꾸고, 또 보고 싶은 생각이 마음 한 편에 늘 있었다. 그렇게 마음속에 작은 바람을 안고 있었고, 바라던 꿈을 이룬 건 8년 전이었다.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를 왔고, 겨울 내내 식물을 키울 수 있는 큰 베란다가 아내에게 드디어 생겼다. 결혼하고 15년 만이었다. 오롯이 우리집이다 보니 아내는 신이 나서 베란다 정원을 꾸미기 시작했다. 베란다에 한 번 나가면 한, 두 시간은 기본이고, 세네 시간씩 있을 때도 많았다.
처음엔 나도 아내가 좋아하니 좋아하는 아내를 보면 기분 좋아서 식물을 좋아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예쁜 꽃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어졌고, 한참을 보기도, 카메라에 담는 일도 많아졌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내게 식물을 키워보는 게 어떠냐고 권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난 아내가 키우는 식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변명하기 바빴다.
하지만 우리 사이엔 오랜 시간이 흐르고 있었고, 누구보다 많은 걸 함께하는 부부였다. 부부끼리는 닮는다는 말이 있다. 나도 어느샌가 아내의 취미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고, 볕 좋은 주말이면 아내보다 먼저 나서서 집 근처 플라워마트를 향하는 일이 늘었다. 이젠 그 시간은 아내의 시간이자, 우리의 행복을 채워주는 삶이 되었다.
예쁜 식물을 보는 것을 좋아했지 무언가 책임을 지고 키운다는 의미에서는 부담감이 컸었다. 특히나 식물처럼 내가 한 행동에 반응이 없거나 느려서 인지하지 못하는 것을 견뎌하지 못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건 내가 느끼는 반응속도일 뿐 아내는 언제나 대화하듯이 식물의 반응을 느꼈다.
'베란다에 이 꽃 봤어요? 어제는 작은 꽃봉오리였는데 하루 사이에 이렇게 만개했잖아요'
'물 달라고 난리네요. 분갈이도 해줘야겠네요'
'이 호야꽃 너무 예쁘죠. 누군 몇 해를 키워도 못 본다고 하는데. 에고 고생했어 매년 이렇게 꽃 피우느라'
식물은 아내가 좋아하는 모습이 예뻐서 더 지지하고, 응원했다. 그렇게 관심을 갖고 좋아하다 보니 어느새 나도 아내의 취미에 관심이 커갔고, 근무하는 사무실 곳곳에 식물을 가져다 놓게 됐다.
이제는 손으로흙도 만져보고, 흙상태만으로 물을 언제 줄지 정도는 알 수 있게 됐다. 새로 나오는 새순도 눈여겨보게됐다. 잎사귀를 만지며 건강상태 체크는 기본이고, 너무 솟구쳐서 잎이 쳐질 때는 줄기끼리 묶어서 지탱하게 할 수 있는 스킬도 생겼다. 하지만 아직까진 분갈이가 필요할 때면 카지노 게임 사이트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다. 다른 레벨의 작업이라는 생각에 애초에 포기했다. 덕분에 분갈이하러 함께 출근하는 주말엔 아내와 서울에서 데이트다. 딱히 분갈이를 배우고 싶지 않은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취미는 단순한 활동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의 세계를 이해하고 공유하는 다리가 된다. 아내의 취미인 원예(식물 키우기)가 이제는 우리의 취미가 되고 있고, 우리는 그 속에서 더욱 가까워진 기분이다. 서로의 손끝에서 커가는 식물들이 우리 사랑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의 취미를 함께 나누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을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기분 좋은 착각이 들게 한다.
난 사무실에서 식집사다. 관리하는 화분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그 식물덕에 사무실에 온기가 느껴지고, 상쾌한 기분이 들고, 생기가 있어서 좋다고 말한다. 그런 말을 들으니 더 잘 보살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히 든다. 사무실 식물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한 에너지를 주는 것 같다. 난 성장하는 식물을 보며 오늘도 작은 기쁨을 누리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