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글을 쓰고 AI에 비평을 요청한다. 그 비평을 받아들여 개선한다. AI가 봐도, 내가 봐도 균형잡힌 글로 탄생한다. 이 과정에서 좋은 글이 무엇인지 배운다.
AI는 기계답게 곧바로 글의 가치를 숫자로 정리한다. 이 글은 90점, 저 글은 95점. 나는 점수를 올리기 위해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다. 두 채널을 오간다. 하나는 챗GPT, 다른 하나는 일론 머스크가 만든 Grok이다. 두 채널을 오가는 편이 개선이 수월하다. GPT는 무르다. 가능한 좋은 말만 하고, 애매한 글에서도 고득점을 준다. 변별력이 있는 게 맞나 의심된다. Grok은 더 따끔하다. 점수는 차치하고 두 소프트웨어가 제시하는 개선점은 합리적이다. 둘을 만족시키고자 하면 더 나은 글이 나온다.
이렇게 AI와 협업을 거듭하면서 좋은 글이 무엇인지 자꾸 묻게 된다. 여기서 좋은 글은 고득점 글이다. AI가 높게 평가하는 글엔 공통점이 있다. 우선 독자를 글로 끌어들여야 한다. 참여형, 공감형이다. 자꾸 글로 끌어들이고 나와 당신의 보편을 드러내라 말한다. 갑자기 독자를 '당신'이라 부르며 호명한다. 당신도 이 상황 겪어봤지? 우리 모두 방황하는 존재. 고독한 싸움을 이어가지. 이런 식이다. 내 감성과 다소 어긋난다. AI가 내 문장을 바꾸라 할 때, 내 목소리가 지워지는 듯한 낯섦이 밀려왔다. 그러나 내 취향도 점수를 기준으로 바뀐다. 이게 고득점이라면 내 취향을 바꿔야지. 나를 더 잘 드러내는 글보다 내가 적당히 있고 먹히는 글이 우선이다. 점수는 너무나 분명해서 명령을 거역하기 어렵다. 물론 너무 나와 생각이 다르거나 문체가 거북스러운 경우엔 굳이 저득점을 유지한다. 이렇게까지 해서 고득점 받고 싶지 않다. 결국 발행 글은 '이 정도까지 함'과 '고득점 열망'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다.
문체도 조금 더 진중하다. 유머가 중요한 내게 유머를 빼라고 무료 카지노 게임. 그리고 무거운 단어를 쓰라고 종용무료 카지노 게임. 가벼운 일상 언어를 쓰고자 하는데, 무거운 단어로 억지 울림을 만들려 무료 카지노 게임. '신경이 쓰였다'에서 '가슴이 철렁였다'라고 바꾸길 종용무료 카지노 게임. 고득점을 위해 몇 개는 고려하고, 체질적으로 안 맞는 몇 개는 드랍무료 카지노 게임. 이렇게 퇴고 훈련을 하다 보면 어느샌가 같이 농담따먹기 하고 싶지 않은 불필요하게 진지한 어른으로 성장할 것만 같다.
형식도 정해졌다. 일정한 흐름을 따라야 하고, 교훈을 꼭 발견해야 한다. 교훈 없어도 괜찮다 믿는 나로선 교훈 강박이 거북하다. 왜 내가 새롭게 깨달아야 하고, 바뀔 것을 다짐해야 해. 그냥 인지하는 정도로 끝내고 싶어! 그럼 점수 못 준다고 답한다. 그럼 억지로 교훈을 짜낸다. 마지막 문단, 마지막 문장에서 교훈을 넣는다. 그리고 꼭 쉼표로 강조할 것을 추천한다. 마치 007 영화에서 본드가 자기 소개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이름이 뭐요? "Me? Bond, James Bond." 쉼표로 강조하는 패턴이 반복된다. 나는 AI의 패턴이 느끼하다. 그럼에도 고득점을 위해 어느 정도 타협한다. 그래, 나도 느끼해질게.
어떨 땐 거짓말을 하는 기분이 든다. AI가 글을 수정한다. 기존에 없던 전혀 새로운 문단이 등장한다. 이 문단을 넣어야 매끄러워요. 예를 들어, AI는 ‘당신의 고독한 싸움은 빛날 자격이 있다’ 같은 문장을 추가하라고 말한다. 내가 생각해본 적도, 말할 법하지도 않은 표현이다. 이건 내가 아닌데? 전후 문단과 연결해서 읽어보니 확실히 자연스럽다. 그 방향성을 가지고 내 언어로 문단을 다시 쓴다. 애초에 고려하지 않은 생각인데 이렇게 쓰는 게 맞나? 내 글이라 할 수 있나? 고민에 빠진다. 내 언어로 다시 쓰긴 하지만, 마음 한 켠에 거짓말이라는 생각이 자리한다. AI의 문장을 활용하며 내 글이 아닌 듯한 당혹감이 스친다. 내가 사라진 듯한 허탈함이 뒤따른다.
바둑 기사들을 떠올린다. 그들은 압도적인 AI의 능력에 굴복하고, 이제 AI와 대국하며 실력을 기른다. 바둑도 예술이라 여기던 이들이 더 이상 예술이 아닌 기술로 받아들이고, 기계적으로 기술을 연마한다. 글이 예술이라 믿던 나도 AI의 점수를 좇으며 기술적으로 글을 쓴다. 바둑판 앞의 기사와 키보드 앞의 내가 오버랩된다. 예술이 기술로 바뀌는 이 허전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
근대 들어 인류는 생산 효율 올리기에 혈안이 된다. 효율을 올리기 위해 지표가 필요하다. 보통 숫자가 지표가 된다. GPT와 Grok이 제시하는 지표가 생산 효율(고득점)을 근거로 문체를 바꾼다. 어떨 때는 억지 교훈이 등장하며 정반대의 주장을 하는 글이 된다. 아니 이게 맞아? 생각해 보니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결과적으로 좋은 글, 그러니까 고득점 글엔 내가 빠져 있다. 내가 쓰지 않는 단어로, 생각해보지 않은 개념으로, 찾지 못한 교훈으로 쓰인다. 불쾌함이 스쳐 지나간 뒤, 이게 맞는 방향이라면 따라야지. 나를 표현하는 글보다 먹히는 글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란 것을 깨닫는다. 자기 표현보다 더 큰 인정욕을 발견한다. 두 선생님의 지도 하에 무료 카지노 게임를 좇는 글을 쓴다. 내가 빠진 자리엔 허전함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