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제가 쓴 글이 아닙니다. 철학의 기초 공부를 위해 책 속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은 글입니다. 다만 용어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필요한 경우 각 용어의 괄호 안에 적은 내용은 제가 직접 찾아서 적은 내용입니다.
제5장. 카지노 쿠폰 멜리소스의 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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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엘레아학파(소크라테스 이전인 B.C. 5세기에 그리스 식민지였던 엘레아에서 번성했던 학파로, 극단적인 일원론,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 자체로 충만하며 존재와대립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따라서 분화·운동·변화는 모두 환상일 뿐이라고 보았음)의 창시자는 크세노파네스였다. 그러나 크세노파네스의 견해(크세노파네스 또는 그 이전부터 시작된 엘레아학파는 모든 사물이 통일되어 있다는 원리에서 시작한다라고 플라톤이 말했고, '모든 사물은 카지노 쿠폰(이 세상의 모든 것이 나오고 돌아가게 하는 단 하나의 절대자)이며 그 일자는 신이다'라는 것이 크세노파네스의 생각이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인 테오프라스토스가 말함)들이 어떠했든지 간에, 철학적 관점과 역사적 관점에서 엘레아학파의 실제 창시자는 의심할 나위 없이 엘레아의 시민인 파르메니데스였다.
파르메니데스는 운문으로 저술했으며,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대부분의 단편들은 심플리키우스(5세기 중엽의 로마의 교황)의 논평 속에 보존되어 있다. 그의 이설은 간단히 말해서 존재, 일자는 존재하며, 전화(어떤 사물의 성질이나 내용이 바뀌어 다른 실체로 되는 것), 변화는 환상이라는 취지이다. 만약 어떤 것이 생성된다면, 그것은 존재로부터 생성되거나 또는 비존재에서 생성될 것이다. 만약 그것이 존재로부터 생성된다면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 되는데, 이 경우 그것은 생성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것이 비존재로부터 생성된다면, 그것은 무(無)이다. 왜냐하면 무에서는 무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화는 환상이다. 복수성도 또한 환상이기 때문에, 존재는 단순히 있을 뿐이고, 일자이다. 그러나 피타고라스주의 철학은 변화와 운동을 인정하기 때문에, 파르메니데스가 피타고라스주의의 철학을 거부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사실상 파르메니데스는 변화와 운동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피타고라스주의 철학과 일치하는 모든 철학을 거부(파르메니데스가 피타고라스학파의 일원으로 출발했으나, 자기 자신의 철학을 위해 그 철학을 버렸다는 말이 있음)한다. 파르메니데스는 변화와 운동을 거부함으로써 감각-현상의 길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의 눈에는 일자가 감성적이고 물질적이었을 거라고 상정하는 데에는 매우 충분한 이유가 있다. 따라서 그를 19세기 유형의 객관적 관념론자로 바꾸는 것은 시대착오의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변화를 부정한다고 해서 반드시 일자가 관념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파르메니데스가 일자를 스스로 실재하는 사유로 표현했다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반드시 그 사실을 기록했을 것이고, 소크라테스는 아낙사고라스를 그의 정신(보통 이를 '누스'라고 명명함) 또는 마음 개념을 근거로 최초의 깨어 있는 냉정한 철학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파르메니데스가 이성과 감각의 차이를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관념론적 체계를 수립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원적 유물론을 수립하기 위해서인데, 일원적 유물론을 수립하려는 이유는 일원적 유물론에서는 변화와 운동이 환성적인 것으로 추방되기 때문이다. 단지 이성만이 실재를 이해할 수 있으나, 이성이 이해하는 실재는 물질적이다. 그러므로 이는 관념론이 아니라 유물론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첫 번째 주장은 "그것은 있다"이다. "그것", 즉 실재, 존재는 그것의 본성이 어떠하건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것이 있으면서 있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존재는 말해질 수 있고 내 사유의 대상일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생각될 수 있는 것과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존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존재한다. 왜일까? 왜냐하면 만약 그것이 존재할 수 있는데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無)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는 말이나 사유의 대상일 수 없다. 왜냐하면 무에 관해서 말하는 것은 전혀 말하지 않는 것이며, 무에 관해서 생각하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만약 그것이 단순히 존재할 수 있기만 할 뿐이라면, 역설적으로 그것은 결코 생성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에서 나와야만 할 것인데, 무에서 나오는 것은 무이지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존재, 실재인 "그것"은 처음에는 불가능했다가, 즉 무였다가 그다음에 존재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언제나 존재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있다."
파르메니데스가 존재를 물질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존재, 즉 일자는 유한하다는 그의 주장이 분명하게 지적하는 것 같다. 그에게 있어서 무한하다는 것은 불확정적이고 무한정적이라는 것인데, 존재는 실재이므로 무한정적이거나 불확정적일 수 없으며 변화할 수 없고, 빈 공간 속으로 뻗어 가는 것으로 생각될 수 없다. 그것은 한정적이고 확정적이며 완전하다. 그것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므로, 시간적으로 무한하지만 공간적으로는 유한하다. 더구나 그것은 모든 방향에서 똑같이 실재적이다. 그러므로 형체가 구형이고 "그것은 어느 한 곳에서 다른 곳에서보다 더 크거나 더 작을 수 없기 때문에, 중심으로부터 모든 방향에서 똑같이 놓여 있다." 만약 파르메니데스가 존재를 물질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가 존재를 구형으로 생각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2) 멜리소스
멜리소스는 그의 스승인 카지노 쿠폰의 사상을 보충한 사람이었다. 카지노 쿠폰는 존재, 일자는 공간적으로 유한하다고 했으나, 사모스 출신의 제자인 멜리소스는 그의 이 논리를 수용하지 않으려 했다. 만약 존재가 유한하다면, 존재 저편에 무가 있어야만 한다. 존재가 무에 의하여 묶이거나 또는 제한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존재가 무에 의하여 제한된다면, 그것은 무한하지 유한하지는 않다는 뜻이 된다. 존재 밖에는 진공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빈 것이 무이기 때문이다. 무인 것은 존재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