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아이 없는 삶’을 살기로 한 건 아니었다
첫 신혼집의 인상은 굉장(?)했다.분명 한참 계단을 올라가야 있었지만 반지하 같은, 1층이지만 지하 같기도 한 독특한 위치와 구조의 전셋집이었다. 가파른 30여 개의 계단을 오르고 하나의 커다란 대문을 넘어 긴 복도를 지나가면 그 끝에 나타나는 집. 채광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데다가 전체적으로 집안보다 높은 위치(?)에 화장실이 있는, 아주 오래된 주택의 1층 집이었다.
양가의 도움 없이(받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지만) 無의 상태에서 신혼살림을 꾸려가는 건, 마치 게임 속 캐릭터가 되어 아이템을 하나둘 씩 획득해가는 것 같았다. 마치 아이템이 하나씩 늘어갈 때마다 레벨업을 하는 듯 한 느낌?‘아무것도 없는’ 캐릭터 역할의 우리 둘이었지만, 오히려 수많은 레벨업의 기회(?)—어쩌면 극한의 상황에서 의지할 사람이라곤 우리 둘 뿐이었기 때문일 수도—가 있었기 때문에 그때는 채워나가는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대부분 가성비 좋은 이케아 가구들로 신혼집을 채워나갔고, 값이 비싼 가전제품들은 월급을 탈 때마다 하나씩 채워갔다. 물론 할부로(할부 만세!). 자취방 필수품이나 다름없는 전자레인지를 가장 먼저 구입했고 무슨 이유였는지 전기밥솥은 무려 거대한 10인용짜리를 구매했다. (나중에는 이 덕에 미리 많은 밥을 한꺼카지노 게임 사이트 해두고 냉동실에 얼려놓는 생활의 지혜(?)를 얻었다.)
결혼 후 조금 지나서야 겨우 구매한 양문형 냉장고는 애매한 대문 크기 때문에 끝내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배송 오던 날 다시 돌려보내기도 했다. 이런 황당한 일도 그냥 웃어넘겨야 했다.결혼하면서 유일하게 지인에게서 받은 선물은 다름 아닌 세탁기. 하지만 사주시는 분의 큰 뜻(백색가전은 L사라는 남편의 취향과 반대되는, 그분은 S사 마니아였다)을 거스르지 못해 원치 않는 걸 얻게 되었다. S사, 심지어 새빨간!!통돌이 세탁기였다. 물론 우리에겐 엄청난 선물이었지만.
평생의 반려자를 만난다는 건 인생에 있어 대단한 변화의 분기점이 되기도 한다.
결혼으로 하나가 된다는 건, 둘에게 있어 분명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 특별하고 좋은 일 중에 하나가 되기도 한다. 물리적으로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신적으로도 분명 인생에 있어 큰 변화가 되는 사건(?)이니까. 갈수록 점점 결혼을 안 하거나 늦추는 시대가 되고 있지만, 그때로 보나 지금으로 보나 나는 주위에서 결혼을 일찍 하는 몇몇 중의 한 명이었다.
여러 가지로 불안정했던 시기에 남편을 만났고, 결혼을 한 2012년은 나에게 있어 변화의 분기점이 될 만큼 분명 특별하고 대단히 소중한 해였다. 그럼에도 때로는 안 좋은 일들이 한 번에 몰려오기도 했다. 정말 여러 가지 사건사고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생계(?)를 위협하는, ‘월급’이라는 단어로 소속감을 주는 곳, 회사 복이 지지리도 없던 해가 바로 그해였다.
첫 번째, 월급 '떼임' 사건.
결혼 하기 바로 전에 회사를 한번 옮겼었다. 제법 규모 있는 출판사라는 안정적인 회사를 두고, 나는 지인의 추천 및 권유로 디자인 회사에 들어갔다. 신생 회사였지만 그만큼 새로웠고 도전적이었다. 주도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6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서 무너졌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가 망해버렸다. 지금 냉정하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카지노 게임 사이트는 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풋풋했던(?)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월급 3개월치와 그 카지노 게임 사이트에 있는 동안의 4대 보험 중 하나인 국민연금 금액 6개월치가 고스란히 밀렸다. 노동부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기간도 지나버려 민사소송까지 신청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때 받지 못한 월급은 여전히..(말잇못)
+번외+
결혼 후 다녔던 첫 회사에 있는 동안, 갑자기 월급통장이 압류된 적이 있었다. 내가 미성년자이고 부모 아래 있던 그 시절부터 수년간 밀려있던 건강보험료 장기 체납, 그로 인한 주거래 계좌 압류 통보였다. 소득은 진작부터 있었는데 왜 하필 그때 통보가 내려진 걸까. 월급도 안 나오는데 압류까지 되고 정말이지 아주 가관이었다. 200만 원이 넘는 금액을 갑자기 내야 했던 우리는 급한 대로 현금서비스를 받고 나서야 압류를 풀었다. 와- 쓰고 보니 진짜 엄청나네.
두 번째, 월급 '밀림' 사건.
이미 한 사람 치 월급만으로 몇 달을 생활하고 있었기에 가만히 놀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논 건 아니었다. 하루라도 뭘 하지 않으면 세상 불안해하는 나는야 프로걱정러니까.한 달 정도의 구직활동 후 나는 곧 다른 회사를 들어갔다. 두 번째 회사는 제품 회사의 홍보 디자이너. ‘홍보’라는 이름으로 ‘제품’을 판매하기 위한 대부분의 모든 디자인을 혼자 맡았다.덕분에 디자이너로서 이것저것 해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패키지부터 웹, 로고, 배너, 광고까지 다양한 분야를 거기서 다 경험했다.
하지만 역시나 안타깝게도, 회사 운영이 잘못된 것인지 다니기 5개월이 지났을 무렵부터 제 날짜에 월급이 들어오지 않았다. (왜 이런 시련이ㅠㅠ) 전 회사에서의 타격이 없었더라면 그냥 좀 더 버텨봤을지도 모를 회사였다. 안 좋게 말하면 디자이너가 별걸 다 해야 했지만, 좋게 말하면 디자이너로서 다양한 경험을 해볼 수 있는 곳이었던 곳이니까.퇴사를 이야기하는 나에게 ‘밀리긴 하지만 떠나지 않으면 월급을 올려주겠다’라는 말도 안 되는 말에 결국 나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를 나왔다.
처음부터 아이 없는 삶을 살기로 한 건 아니었다.단지 그때 우리의 상황이 그리 녹록지 않았을 뿐이었다. 당장 우리 둘이야 그런대로 이렇게 으쌰 으쌰 힘을 내어 살면 나름대로 살아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부족한 환경 속에 아이가 생긴다면, 내 아이에게 풍요보단 절제와 인내를 먼저 가르쳐야만 할 것 같았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 것만 보이고 카지노 게임 사이트 것만 먹여도 모자랄 판에. 적어도 내 아이를 지금의 이런(책임져야 할 빚이 한가득하고, 월급이 나오네 마네를 걱정하고 있는) 환경 속에 태어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달콤한 신혼 생활 속에서 꿈꾸는 행복한 가정의 모습과 빠듯한 현실 생활 속에서 바라는 행복한 가정의 모습의 간극은 생각보다 꽤 컸다. 이런 상황을 너무나도 잘 아는 부모님은 다행히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으셨다. 한편으로는 내심 바라셨던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가 바라는 대로 사는 게 당신들이 바라는 것이라며 우리의 의견을 존중해주셨다.
아이가 생기면 돈이 없어도 다 저절로 채워지게 된다는 말, 어떻게든 다 살아진다는 말. 다들 그렇게 산다는 말. 전혀, 하나도 와 닿지 않았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나는, 우리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빚이 좀 줄어들면, 내 직장생활이 좀 더 안정화되면(월급이 밀리지 않고 제때 들어오는 멀쩡한 카지노 게임 사이트를 바라며), 이 집이 아닌 조금 더 나은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 언제가 될지는 당장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뚜렷한 시기를 모른 채 우리 둘은 이렇게 막연하게 ‘조금 더’ 나은 상황을 기대하며 하루하루 그냥 미뤄내고 있었다. 아이의 보호자가 되는 부모의 길을.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사실은.
'신혼'임에도 불구하고 신혼 치고는 열악했던 환경은 우리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어머님 댁에서 가져온 낡은 선풍기 앞에 얼굴 맞대고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시원함 가득했던 여름이었다. 꽁꽁 얼어버린 가파른 계단을 매일같이 손 붙잡고 오르내리는 동안 얼굴에 스치는 차가운 바람보다 맞잡은 손의 따뜻한 온기가 더 기억에 남는 겨울이었다. 사람 때문에, 가족 때문에, 돈 때문에 겪은 갖은 수난과 슬픔, 어려움들을 이겨낼 수 있었던 건 남편과 내가 서로 의지하며 키워나간 ‘단단한 마음’ 때문이었다.
‘온갖 시련이여, 어디 올 테면 한번 와 봐라,
내가 못 이겨낼 것 같냐’하는 식의 베짱이 생겼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의 추억들이 지금의 단단한 우리를 만들었다. 과거와 다른 현재의 문제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존재하지만 어떻게든 다 이겨낼 수 있을 거라는 이상-한 믿음. 당장 로또가 안되더라도, 당장 프리랜서로서 일감이 떨어지더라도, 이사 갈 집을 구하지 못해 고민이 앞서더라도. 그래도 어떻게든. 방법을 찾게 될 거라는 믿음.그 시절 짧은 시간 동안 쌓아 올린 추억들은 결국 우리에겐 세상을 이겨낼 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