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둥리지 Dec 20. 2024

내가 카지노 게임 만들어 쓰는 이유

커피 두 잔 값으로 시간여행자가 되어 봅시다.

어떤 사람은 서점 한편에마련된 매대에서 새 다이어리를 장만하고, 또 어떤 사람은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예약하며 연말을 실감합니다. 음료를 주문할 때마다 카페에서 주는 빨갛고 하얀 스티커를 모으며 올해 남은 시간을 가늠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요. 이렇듯 우리는 저마다 ‘12월의 의식’을 치르며 한 해를 마무리합니다.


저에게도 12월의 의식이 있어요. 12월이 되면 어느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해야 할 것만 같은 일, 못 본 척 미뤄두고는 한 해를 잘 끝냈다는 기분을 도통 느낄 수가 없는 그런 일. 미루던 끝에 잘 마치고 나면 괜스레 다가올 해에 대한 기대감까지 품게 만드는 나만의 의식. 저에게 그것은바로 ‘카지노 게임 만들기’입니다.




저는 12월이 되면 직접 카지노 게임 만듭니다.

올해로 5년째 이어오고 있는 이 작업은 사실 우연한 기회에 시작하게 되었어요. 때는 2020년 12월, 주인이 나인지 아이인지 모를 정도로 스마트폰 앨범을 빼곡하게 채운 아이의 사진을 정리해야겠다는 결심이 선 날이었지요. 사진을 추려 사진 인화 사이트에 작업을 의뢰하려고 보니 아뿔싸, 사진 인화는 장당 100원꼴인데 배송비가 무려 3500원이네요. 어차피 한 번 내는 배송비, 뭐라도 더 사야 배송비가 덜 아까울 것 같은 마법의 계산법이 작동하지요. (돈을 더 써 놓고도 돈 아낀 기분이 드는 것, 저만 그런 거 아니죠?)그때 제 눈길을 사로잡는 팝업 문구 한 줄.“나만의 카지노 게임, 일상 속 소중한 순간들을 남기고 기억해 보세요.”


어디 구경이나 한번 해 볼까 하는 마음으로 <포토카지노 게임 탭을 누릅니다.그곳에서는 구매자가 직접 고른 사진과 테마를 바탕으로 나만의 카지노 게임을 만들 수 있었어요. 가족사진이나 아이의 사진, 반려동물의 사진을 넣어 카지노 게임을 만든 사람들의 후기가 눈에 들어와요. “아이 사진을 넣은 카지노 게임을 받고 엄마가 감동해서 눈물을 보이셨어요”, “다음 달 사진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카지노 게임을 넘겨요”, “삭막했던 사무실 컴퓨터 옆에 반려동물 사진으로 만든 카지노 게임을 두니 기분이 좋아졌어요”.

더 이상 고민할 필요 있을까요, 커피 두 잔 값으로 일터를 산뜻하게 만들 수 있는 데다가 우리 엄마까지 울려 준다는데.


그렇게 시작한 카지노 게임 만들기는 생각보다 더 재미있는 일이었어요. 카지노 게임을 만드는 과정 그 자체만으로도 시간여행자가 되기에 충분했지요. 카지노 게임을 만들려면 우선 스마트폰 앨범을 열어 한 달을 대표할 만한 사진을 골라야 하는데요. 적게는 열두 장이면 뚝딱 완성될 카지노 게임이지만 그 달의 사진을 고르는 데까지 몇 번이고 멈춰 서게 되실 거예요, 지극히 정상입니다. 계속해서 열두 달을 대표할 사진을 신중하게 골라냅니다. 향기 좋고 빛깔이 고운 복숭아를 고르는 마음으로, 편지를 시작할 첫 문장을 지어내는 마음으로.


그런데 왜 하필 카지노 게임이어야 하냐고 물을 수 있겠지요. 저는 매년 아이들의 사진으로 카지노 게임을 만들고 있기에, 아이의 사진으로 카지노 게임을 만들었을 때 좋은 점을 알려 드려 볼까 합니다.

첫째, 아이들이 좋아합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요. 방긋 웃는 내 얼굴이 카지노 게임에 크게 실려 있고, 우리 가족이 매일 시선을 두는 위치에 본인의 얼굴이 떡하니 올려져 있으니 아이들의 어깨가 절로 올라가겠지요.

둘째, 아이들의 사진이 실린 카지노 게임은 인지책 같은 역할을 합니다. 우리 돌쟁이 아가 키우던 시절, 큼지막한 실사가 담긴 인지책 사서 읽어줬던 거 기억하세요? 이건 손이네, 발이 여기 있네, 하면서 사진 짚어주고 아이 눈 바라보며 어휘의 지도를 그리던 그 시절이요. 아이의 손발과 엄마 아빠의 얼굴, 본가에서 키우는 반려동물의 사진을 큼지막하게 넣은 카지노 게임은 그 어떤 책보다 매력적인 교구가 되어줍니다. 게다가 사진 속 장면에 대한 이야기까지 더해진다면, 스토리텔링 한 스푼 더한 인지책이라는 멋진 이름 한번 붙여볼 수 있겠어요.

카지노 게임"우리 아가 발 여기에 있지. 작년에는 발이 이렇게 작았는데, 우와 발이 정말 커졌다." 하며 카지노 게임에 아이 발을 대 봅니다. 이것은 카지노 게임인가, 인지책인가, 스토리텔링북인가.


뿐만 아니라 카지노 게임 속 사진은 아이들로 하여금 지난 시간을 되짚어보는 기회를 준답니다. 매일이 새날인 우리 아이들이지만 때로는 어른들보다 정확하게 그 시간을 기억하고 있을 때가 많아요. 사진에 담긴 그날을 다시 떠올려보고 함께 이야기 나누며 기억의 조각을 맞추는 일, 작년 이맘때를 떠올리며 다가올 계절을 미리 그려보는 일. 책장 맨 아래 칸에 잠들어있는 앨범으로는 쉽게 시도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래서 때로는 ‘출제자의 의도’가 다분히 담긴 사진이 선정되는 달도 있답니다. 2월의 사진으로는 반 친구들과 찍은 수료 사진을 넣어요. 작년 이맘때 너를 웃게 했던 친구들을 기억하니, 지금쯤 이 친구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이 친구 이름이 뭐였더라, 이 선생님 참 좋으셨는데 기억나니, 하며 아이를 스쳐 지나간 친구들을 함께 떠올려봅니다. 그리고 넌지시 한 마디 덧붙이지요. “같은 반 친구들과 헤어질 시간이 곧 다가오겠지만, 행복했던 기억은 사라지지 않을 거야. 그리고 3월이 되면 또 멋진 친구들을 만나게 되겠지, 지금 너의 옆에 있는 친구들처럼.”


마지막으로 소소한 팁 하나, 부모님과 아이가 함께 찍힌 사진이 있다면 카지노 게임에 꼭 넣어주세요. 어쩌면 우리보다도 더 애지중지하며 카지노 게임 속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실 분들이시지요. (이때, 양가 부모님의 출연 횟수를 엇비슷하게 맞추는 센스!) 그리고 이것은 카지노 게임 한구석에 새겨놓은 나의 작은 다짐이 되기도 합니다. 아이로 가득 찬 일상 속에서 부모님 얼굴 잊지 않겠다는 다짐. 내 아이만 생각하며 살지 않겠다는 작은 다짐.



정성 들여 완성한 카지노 게임, 일 년 내내 한 장씩 야금야금 꺼내 먹으며 천천히 음미해야할 차례예요. 이번 달에는 어떤 장면이 나를 반겨줄까, 작년 이맘때는 이런 일이 있었는데 올해는 어떤 모습일까 상상하고 궁리하는 우리는 매일을 시간여행자로 살아갑니다.


카지노 게임돌이 채 안 된 아가가 크리스마스 케이크 앞에 앉아 있었는데, 마지막 카지노 게임에는 어느새 동생까지 등장. 카지노 게임을 모았을 뿐인데 아이가 자라온 시간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사실 우리는 모르지 않아요. 새해가 밝았다는 이유만으로 멀어졌던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관계를 회복한다거나 내 몸 구석구석에 숨어있던 군살들이 운동도 없이 매끈하게 정리될 일은 없을 거라는 걸요. 어쩌면 지금 우리를 괴롭히는 일들은 내년에도 우리를 몇 번이고 울게 할 테고, 그곳에는 그저 나이만 한 살 더 먹은 내가 덩그러니 놓여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나를 웃게 하던 시간을 곁에 두고 사는 사람에게는 힘이 있어요. 지나온 시간의 사소한 순간까지도 찬미하며 살 수 있다면 우리 일상은 얼마나 많이 달라질까요.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응원하고, 지금의 내가 다가올 나를 기대하는 삶은 얼마나 눈부실까요.




우리, 올 한 해를 시작했던 때를 잠깐 떠올려봐요.

올해 1월의 명장면은 어떤 순간이었나요. 어떤 표정으로, 누구와 함께했나요. 무엇을 느끼고 깨달았던가요.


그리고 그 장면, 다가올 1월에 한 번만 더 떠올리기로 해요.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는 혼자가 아닌 셈이죠. 지난날의 내가 새해의 나를 응원하는 겁니다.

잘 될 거라고, 올해도 이만큼 웃을 수 있을 거라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