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학교 3학년 1학기 시절이었다. 장래가 촉망된다는 소장파 사학자로 이름이 제법 알려진 교수가 우리 교양한카지노 게임 강의를 맡았다. 이른바 당시 ‘의식 있는’ 카지노 게임로 꼽혔다. 직사각형 메모용 카드의 좌측상단에 링을 끼워 마련한 강의안을 중간중간 들여다보며 나름 비판적인 강의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 박카지노 게임는 독특하게도 학생들과 눈을 전혀 마주치지 않았다.때론 키워드를 가끔 칠판에 판서하는 때를 제외하곤 창문너머 밖을 응시했다. 강의 시간 내내 비판적인 어조를 고집했다. 혹시 예전에 여고에서 카지노 게임선생님으로 재직한 이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동기들의 추측이 무성했다.
“여러분, 법학이란 것이 이 사회, 국가에 어떤 비전을 제시하고 문제를 해결하는데 기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법이라는 것은 사회 공동체를 선도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저 이미 벌어진 문제나 갈등을 사후적으로 조정하고 해결하는 데 급급하다고 생각합니다.”
박카지노 게임는 연식이 별로 오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른바 의식 있는 소장파 사학자라는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수강생들의 잔뜩 주눅이 든 분위기로 강의실 안은 가득했다. 박카지노 게임의 이런 문제제기에 반론을 펴는 학생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고교시절 ‘카지노 게임’와 ‘세계사’ 과목을체계적이고 내실 있게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데 관해 늘 아쉬움과 부채 감정이 혼재해 있었다. 대학입학을 위한 예비고사 필수 과목인 카지노 게임는 4지선다였지만 그 난이도가 만만치 않았고 정답을 골라내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비틀지 않은 지문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로선 배점이 각각 50점인 국어 영어 수학 과목보다 점수를 얻기가 오히려 더 어려운 과목이었다.
그 이후 나는 캠퍼스에 발을 들여놓았다.사법시험 수험생시절엔 1차 5지선다 40개 문항으로 채워진 8과목 중 카지노 게임와 문화사(세계사) 이 두 과목도 당당히 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 때 ‘카지노 게임 판사’, ‘문화사 검사’란 우스갯소리가 회자되기도 했다. 카지노 게임와 문화사를 각각 고득점 해야 판사와 검사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 두 과목에서 고득점을 하지 못하면 1차 시험합격선에서 멀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 두 과목이 수험생활 내내 나를 괴롭혔다. 주위 동기들이나 선후배들도 나의 이런 형편을 모두 익히 잘 알고 있었으니 어느덧 공지의 사실이 되었다.
그런데 이것 말고 또 하나의 걸림돌이 내게 새로이 등장했다. 이 한카지노 게임란 과목은 교양필수로 정해져 있었다. 3학점인 이 한카지노 게임과목이란 허들을 만약 제대로 넘지 못하면 제 때에 학사학위 취득을 장담할 수가 없었다. 이러다 보니 나는 이번 기말시험 준비엔 절친 영훈이에게 예상문제의 요약을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한카지노 게임는 중간고사를 건너뛰고 기말고사 단판 승부였다. ‘대동법’, ‘동학농민운동’ 2문제를 약술하는 방식으로 답안지를 메꾸어야 했다.
내 개인적인 변명이라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안되면 조상 탓을 한다고 해도 이는 마친가지였다.나는 고교시절 카지노 게임와 세계사선생님과 케미가 맞지 않았다. 2학년 세계사 선생님은 단답형 50개 문항을 항상 고집했다. 이를 테면 ‘동방견문록의 저자는 마르코폴로’라는 이런 식이었다. 어쩌면 극히 단편적인 지식을 카지노 게임 문제로 채웠다. 대형 사건에 관한 역사적 배경과 그에 따른 영향 등을 가르치는 것은 아예 뒷전이었다. 이러다 보니 학교 시험에서 고득점을 얻은 학생도 대학입학을 위한 예비고사에선 좋은 성적을 받을 수가 없었다. 이런 방식에 길들여진 우리로선 어쩔 수가 없었다.
이에다 3학년 세계사 선생님은 학습진도를 아예 무시해 버렸다.다른 반도 마찬가지였는지는 아직도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우리 반 교실에 들어서면 정규수업을 자습시간으로 메꾸기 일쑤였다. 자신은 다른 일에 수업시간을 할애했다. 당시 제법 많은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신동아’니 ‘월간조선’등 잡지를 읽는데 몰두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호랑이 담배 피던 호시절이었다. 이러다보니훗날 사법시험 수험생이 된 나는 이 두 과목은 가장 취약한 부분이 되었고 절망의 영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