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트 no. 36
비가 무대를 가리는 장막처럼 갑자기 쏟아졌다. 흠뻑 젖은 채로 건너편의 신호등을, 아니 신호등이 있던 곳을 바라봤다. 물안개 속에 빨간 불빛만이 간신히 보일 정도였다. 이미 모든 것은 틀려버렸다. 이제 와서 편의점을 찾아 우산을 사는 게 무의미하듯, 이별을 되돌리려는 모든 시도는 무의미할 것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은 푸른 신호를 기다리고, 건너편으로 건너가는 일뿐이었다.
신호가 바뀌었다. 차량통행이 많지 않은 곳이지만 홀연히 나타난 차에 20세기 한국드라마 같은 결말을 맞이한다고 해도 나쁘지 않을 거라 기대했다. 기대한 일은 언제나처럼 일어나지 않았고, 무사히 건너편으로 왔다. 비에 젖은 옷의 존재감이 육신의 존재감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지금 길을 건너온 것은 자작나무 껍질 색의 셔츠와 발목 부분을 접은 청바지이고, 영혼은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영혼은 길의 건너편에 붙들린 채로 온 세계를 볼 수 있는 시야만을 획득한 것이다. 영혼은 얼마 전까지 자신과 함께 있었던 옷에게 연민을 느끼며 관찰을 지속한다.
옷은 축축한 몸을 이끌고 잡초가 자라난 보도블럭 위를 하염없이 걷는다. 비는 그치지 않고, 옷은 지구의 중력을 점점 더 잘 감각할 수 있게 된다. 옷은 자신을 끌어당기는 무엇에라도 끌어당겨질 준비가 되어 있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대상이라면 누구라도 좋았다. 그것이 죽음이라도. 하지만 무엇도 진실로 옷을 끌어당기지 않았다. 부르지 않았다. 옷은 옷의 빈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돌아가는 것과 돌아가지 않는 것 사이의 차이가 그다지 없었기 때문이다. 어디든 혼자라면 옷은 차라리 폭우 속에 혼자인 쪽을 선택했다. 익숙해지자 옷에 부딪치는 비의 감촉이 좋아졌다. 옷은 옷의 주인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만져주기를 원했다.
폭우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도시의 배수 기능이 무용지물이 될 정도였다. 보도블록과 도로의 경계는 사라진 지 오래고, 물이 청바지의 종아리 부분까지 차올랐다. 걷는 것이 어려웠다. 옷은 자신이 가려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지만 계속 걷고 싶었다. 아니, 꼭 걷지 않아도 좋으니 이동하고 싶었다. 공간을 이동하든, 시간을 이동하든 무관했다. 시간을 이동한다면 어디로 이동하는 것이 좋을까 생각했다. 지나온 모든 온라인 카지노 게임의 처음과 중간과 끝을 떠올렸다. 어떤 온라인 카지노 게임의 어느 부분이 좋을지 선택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것은 옷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영혼은 여전히 지나온 그 길의 횡단보도 앞에 붙들린 채, 옷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어서 자문을 구할 수 없었다.
물이 청바지의 엉덩이 부분까지 차오르자 옷은 물살을 따라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애초에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옷이 어디로 갈지는 옷도 물살도 영혼도 알 수 없었다. 옷은 흙탕물 위에 둥둥 뜬 채로 탁한 하늘이 어둠에 물드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옷은 눈을 감을 수 없었으므로 스쳐지나는 모든 시간과 공간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옷과 시공은 서로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 몰랐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해야 할 이유를 모르는 채로 모두 살아가고 있었다. 옷은 언젠가 신을 만난다면 신에게 신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아시냐고 물어볼 작정이었다.
이유를 알게 된다면 살아갈 수 있는 걸까. 이유가 없다면 살아가지 않아도 좋은 걸까. 살아 있는 것들은 온라인 카지노 게임의 이유를 찾지 못해 온라인 카지노 게임을 한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은 삶의 이유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칠흑 같은 밤에도 머나먼 별들 저 편의 태양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캄캄한 밤과 멈추지 않는 폭우와 흙탕물 사이에 존재하는 중인 옷은 온라인 카지노 게임을 잃고 세상의 끝을 향해 떠내려가고 있었다. 영혼은 오래 전에 물에 잠긴 채로 한때 자신이었던 옷을 지켜본다. 폭우가 그치고 날이 개면 누가 먼저 상대를 찾으러 갈까. 길 건너편에 붙들린 영혼일까, 길을 건너가 한참을 떠내려가버린 옷일까. 아니면 그들은 영영 서로를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하나가 아니었던 것처럼. 이 글을 쓰는 내가 오래 전 그들의 곁을 떠난 뒤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우주의 모든 것은 아주 잠깐 동안에만 함께 온라인 카지노 게임하고, 이내 뿔뿔히 흩어진다. 사랑의 온라인 카지노 게임에는 이별이 있지만, 이별의 건너편은 다시 온라인 카지노 게임이다. 이별하기 위해 온라인 카지노 게임하고, 온라인 카지노 게임하기 위해 이별한다.
옷은문득반짝떠올렸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의이유를찾는건온라인 카지노 게임하고있다는믿음때문이다. 그러나생명이있는모든것은그저언제나깜빡이고있을뿐아닌가. 까마득한우주의무한한별들처럼반짝반짝빛나고까막 까막 어두워지며있음과없음사이를오가고있을뿐아닌가. 영혼이고개를끄덕였다. 나는그래서뭐라고생각했다.
2020. 8. 29. 멀고느린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