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년생 카지노 쿠폰 이준수의 교단일기
꿈은 많았다.
하고 싶은 것도 참 많았다.
어떤 길을 걸을지 고민을 많이 하며 커왔다.
그 꿈 중엔 항상 '초등학교 카지노 쿠폰'가 있었다.
다른 카지노 쿠폰는 아니었다.
'초등학교'의 카지노 쿠폰였다.
막연하게 내 마음이 그랬다.
초등학교 시기의 아이들은 어른에게 많은 영향을 받는 시기니까.
내가 좋은 카지노 쿠폰가 되면 좋은 영향을 듬뿍 줄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항상 그런 마음을 갖추곤 있었으니까.
내가 완벽한 사람은 아닐지라도, 좋은 선생님으로서 아이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준비는 갖춰져 있다고 믿었으니까.
빨간 머리 앤을 수 차례 읽으면서 꿈을 키웠다.
애니메이션이나 짧은 어린이용 단편 동화가 아니라, 빨간 머리 앤 원본 장편 소설로.
거기에 나오는 앤처럼 언젠가 아이들을 사랑으로 가르치면서 글도 쓰는 멋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앤과 길버트가 '체벌'로 다툴 때, 당연히 체벌이 없어야 한다는 앤의 생각에 동조하면서도, 결국엔 말썽꾸러기가 살아있는 쥐로 장난을 쳤을 때 단호히 회초리를 든 앤의 모습이 가엽기도 했다. 카지노 쿠폰로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해 가기 위해 노력하는 앤이 참 멋지게 느껴졌다.
부모님은 딱히 바라는 건 없다고 했다.
하고 싶은 걸 마음대로 해보랜다.
그러면서도 한편엔 장남을 향한 기대감도 느껴졌다.
곰곰이 생각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뭘까.
돈 욕심은 크게 없었다.
권력 욕심은 솔직히 있긴 해도, 뉴스에서 보면 꼭 높은 자리에 있는 어른들이 싸우고 다치는 모습을 자주 봤다.
머나먼 일이지만, 나중에 사랑하는 여자를 만난 후에 저렇게 다치면 가족을 지킬 수나 있을까 싶었다.
그냥 돈도 권력도 크게 욕심 내지 않으면 안정적으로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또 찬찬이 고민했다.
내가 잘하는 건 뭘까.
우선 말발이 좋았다.
누군가를 설득하거나, 또 생각을 조리 있게 말하는 능력은 어릴 때부터 타고났다.
이벤트를 만들거나 기획하는 것도 좋아했다.
학생 시절 때부터 늘 그랬다.
친구들과 옹기종기 모여서 뭔갈 만들어내고 그런 걸 좋아했으니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되짚어봤다.
내가 해야 하는 건 뭘까.
그때의 나는 '소명 의식'을 참 소중히 여겼다.
어려운 아이들을 도와주고 싶었다.
내가 어렸을 때 만났던 좋은 선생님들처럼, 꿈과 희망을 길러주고 싶었다.
그렇게 나를 파악하며나의 꿈을 좇으면서도, 부모님의 기대도 충족시키기 위해선 나의 성적도잘 파악해야 했다.
적당히 괜찮은 대학교들은 여유롭게 갈 수 있었고, 대한민국에서 '하늘'이라 불리는 대학교에 가기 위해선 취업에 아주 불리한 몇 개의 과를 제외하고는 재수를 해야 했다.
담임 선생님은 일단 그 '하늘'의 낮은 학과를 써보고, 재수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 제안을 했지만, 상담 후 이내 그 의욕을 내려놓으셨다
"그래, 교육대학교는 스펙트럼이 넓어서 그냥 여유롭게 합격을 하겠다만.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겠냐.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건 어때. 혹시 재수가 하기 싫은 거면 SG대학교나 HY대학교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수 있는 이런 과들 써보는 것도 좋고. 그런데... 그래, 네 표정 보니까 알겠다. 네가 좋은 선생님이 될 거란 건 나도 잘 아니까. 담임카지노 쿠폰로선 좀 아쉽다만, 응원한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때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지역에서 입시에서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 혈안이었던 사립고등학교였기에 담임 선생님으로선 되게 아쉬우셨으리라 생각이 든다. 고등학교에서의 상황은 정확힌 모르지만, 높은 레벨의 대학교에 얼마나 많은 학생이 입학하냐에 따라 선생님에 대한 평가도 달라질 수 있다고 하니. 그래도 선생님은 나를 응원해 주셨다. 그리고 카지노 쿠폰가 된 이후에 절대로 후달리진 말라고 말씀하셨다. 항상 자신감 넘치게 살라고 하셨다.그래야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내 학생들을 더 잘 지킬 수 있다나.
그래, 교육대학교에 가기로 마음먹고 다시 생각해 보니, 난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 다행인 것 같았다.
고등학교 때 참 많이도 맞고 살았지만, 고등학교 3학년 땐 그래도 아이들을 함부로 때리지 않는 선생님을 만났으니까. 아마 다른 옆 반 선생님들을 만났다면 교육대는커녕 다른 대학교에 진학하라고 강요받았을 것이다. 실적이 더 중요한 선생님도 있으니까.
초등학교 1학년 때 선생님은 초임으로서 우릴 만나 항상 따뜻하게 사랑으로 우릴 대해주셨다. 다른 학교에 가서도 우리가 졸업할 때 졸업 영상에 등장하셨을 정도였다. 졸업 영상에 등장해서 '준수야, 민아야. 그리고 다른 친구들도 모두 졸업 축하해.'라고 내 이름을 특별히 언급했던 점을 떠올리면, 나를 되게 많이 예뻐하셨던 게 분명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선생님은 우리 부모님이 촌지를 주지 않아서 나를 되게 싫어했다. 똑같이 행동해도 옆의 아이는 예뻐하고, 내가 말하면 나무랐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그 당시엔 초등학교에서도 성적이 상당히 중요했는지, 공부를 잘하는 나를 계속 미워하진 못했다. 우리 어머니도 모든 걸 다 거부할 순 없었는지, 내가 반장이 된 이후엔 교실 청소를 하러 오셨던 기억이 난다. 그래, 그땐 그랬지. 부모님들이 학교에 와서 봉사하고 그런 게 당연하게 여겨졌던 시절.
초등학교 3학년 때 선생님은 나를 꼬마 신랑이라고 부를 정도로 애착 인형처럼 예뻐해 주셨다. 그해에 결혼을 하셔서 우리 반 아이들이 다 같이 축하하러 갔던 기억도 새록새록하다.
4학년 때 선생님도 참 좋았고, 아. 5학년 때 선생님은 좀 달랐다. 교육대 출신 선생님이 아니셨던 걸로 후에 들었는데, 아이들을 기분 나쁘게 때리고 혼내셨던 분이었다. 칠판지우개로 아이들 머리를 치고, 그런 게 반복되자 아이들 모두가 선생님을 싫어했었지.
초등학교 6학년 때 선생님은 그 야만의 시대에도 우리를 단 한 번도 때리지 않았던 분이시다. 나이가 좀 있으셨던 선생님인데, 언제나 나긋나긋하게 우리 이름을 불러주셨다. 6학년 아이들 특유의 못된 장난과 행동이 있어도 가볍게, 그러면서도 단호하게 나무라고 넘어가셨다. 쉽게 아이들을 조용히 할 수 있는 회초리를 들지 않고도, 아이들을 조용히 주목시키고 수업에 참여시키셨다.
그런 선생님들에 대한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이 나를 교육대학교로 오게 만들었다.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대카지노 쿠폰 입학하고 난 후엔 놀랄 게 참 많았다.
교육대학교엔 여자들이나 가는 거라고 조롱하던 고등학교 동창이 같이 입학한 것도 놀라웠고.
같은 과에 동갑인 친구들보다 재수생 형들이 더 많았던 것도 신기했다.
심지어 은행이나 대기업에서 일하다가 입학한 형님들도 계셨다.
다양한 연령대의 다양한 특성을 가진 여러 사람들이 모여 카지노 쿠폰가 되기 위해 성장하는 공간이었다.
그 당시엔 또 그랬다.
교육대학교에 다니는 교육대생이라면 이것저것 다 잘해야 한다는 인식이 암암리에 있었다.
선배들은 농담조로 '교대신'이라는 그림을 보여주기도 했다.
피아노, 단소, 장구, 기계체조, 음식 만들기, 작곡, 작사, 농구, 티볼, 배구, 식물 재배, 수영, 그 외에도 말하지 못할 수많은 것들. 이 모든 걸 다 해내야 하는 팔방미인을 의미했다.
물론 강의 수강 상황에서는 정말 이것까지 해야 하냐는 불평불만도 많았지만, 이런 인식은 동아리 활동이 학교 내에서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공동체의 문화를 만드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당장 나만해도 그 생각 때문에 아카펠라 동아리에 들어갔다.
노래를 배우면 언젠가 써먹을 수 있다는 합리화가 크게 작용했다.
동시에 좀 더 솔직히 까놓고 말하면 아카펠라 동아리라면 여자 동기들도 많이 있지 않을까, 기대감도 컸다.
아니, 그런데 이게 웬걸.
동아리실엔 남자들이 가득했다.
알고 보니 아카펠라 파트엔 남자 파트가 더 많단다.
퍼커션, 베이스, 바리톤, 테너가 남자이고, 소프라노, 알토 단 두 파트만 여자라니.
교육대학교에서 보기 힘든 남초 현상을 동아리에서 만나게 되었다.
날 동아리로 끌고 온 선배도 처음엔 많이 놀랐다고 한다.
나 데리고 올 땐 착하고 예쁜 선배들 많다 해놓고...
대카지노 쿠폰 다닐 때의 나는 솔직히 오만했다.
이미 교육대에 오기로 예전부터 마음먹고 꿈을 키워온 사람이라는 생각이 가득했다.
진정한 카지노 쿠폰가 아니라 단순히 안정적인 직장이라서 교육대에 온 사람들은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생각까지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다시 말하지만 착각이고, 교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