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읽은 책 중『왜 결혼과 섹스는 충돌할까』는 나에게 지적 흥분을 주었다. 제목도 흥미롭지만 내용은 더 흥미로웠다. 내용인즉, 여태까지는 우리의 행태 기원을 제인 구달을 위시한 침팬지에서 찾았지만, 이젠 침팬지보다 보노보에서 찾는 게 더 현명하다는 내용이다. 특히나 성생활 관점에서 말이다! 보노보가 권장하는 성생활은 난교다. 일부일처제는 우리네 본능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 영장류는 섹스를 놀이쯤으로 생각하며, 침팬지와 달리 섹스를 적극 활용해 친교 행위나 집단 내의 긴장감을 조절한다. 그리고 이 같은 행위는 아직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원시 부족에게서 충분한 증거를 찾았다고 책은 설명한다.
아직은 주류에 받아들이지 못한 주장이지만 충분한 논증과 설득력은 있는 책이었다.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에 올라 많은 주목은 받긴 했다.) 그리고 보노보가 내 머릿속에서 떠나갈 때쯤, 이 늦은 2018년에 저명한 학자의 책으로 다시 찾아왔다. 이번엔 성생활뿐만 아니라 도덕성의 기원까지 찾는 여정이었다.
저자는 세 가지를 반박하고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첫째, 이타심의 기원이 이기심이 아닐 수 있다. 순수한 이타심 발휘와 그 행동에 대한 쾌락(보상)도 존재할 수 있음을 연구들은 보여준다. 지금까진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의 영향이어선지 주류 학계는 우리의 선한 행위 뒤에는 이기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생각해 왔다. 상호 호혜성은 결국 나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에 착한'척'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최신 영장류 연구를 통해 얻은 결론은,우리가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타인에게 도움 주는 행위를 하는 걸 보아순수한 이타심 자체도 우리가 내재한다는 걸 보여준다.
둘째,문명과 종교 발생 이전 유인원에게도 이타적인 면(선함)은 충분히 있었다. 이는 종교 때문에 무료 카지노 게임가 도덕적으로 길들여졌다는 종래의 주장과는 다르다. 흔히들 성경과 다른 종교는 도덕에 관한 최고(古) 계율로 여겨졌다. 가만히 놔두면 악해질 무료 카지노 게임들을 종교가 교정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피엔스 이전 유인원에서도 장애인을 죽을 때까지 돌봐준 흔적, 아이를 잃은 어미를 위로하거나 다친 친구를 걱정하는 영장류를 볼 때, 이타심이나 선한 본성은 종교와 문명 발생 이전에도 기능해 왔음을 보여준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종교에 승리할 수 없다. 딱히 승리할 필요도 없다. (이 부분은 굴드쪽 생각을 많이 따라간 듯하다.) 종교는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으며, 과학은 자연현상에 대한 비밀을 밝혀내는 데 목표를 둔다.종교와 과학은 지향점이 다르며 충분히 양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종교를 믿는 신자라 해도 선교자처럼 성경의 모든 것을 따르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ex]성경 속 예수의 가르침은 좋지만노아의 방주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듯이) 굳이 종교 자체를 거짓으로 매도해 모든 신자들을 적으로 돌릴 필요가 없다. 종교가 만들어낸 대학살극(십자군, 마녀사냥)은 종교의 반대편(무신론자들인 공산주의)에서도 충분히 저질러졌다. 큰 악행은 종교의 개입 여부없이 일어난다.만약 종교를 밀어낸다고 해도 그 빈자리를 다른 이데올로기나 사상이 채울 것이니 헛수고다.또 한 폭포 밑에서 괴이한 행위를 하는 침팬지 연구를 볼 때, 종교적 행위나 신성함에 대한 가치는 영장류 때부터 가진 듯하다. 신성함이 우리 유전자 어느 구석에 프로그램 되어 있다면 종교를 몰아내는 일은 정말 고단할 것이다.
이타심에 대한 나의 여정은 길었다.(『이기적 유전자』를 읽은 게 2006년이니 10년이 넘었다.) 도킨스의『이기적 유전자』를 골자로 한매트 리들리의 『이타적 유전자』는 유전자의 이기적 유인이 동물과 인간의 행동에서는 이타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이타주의는 유전자의 이기적 발로라는 조금 허망한 결론이었다. 하지만 이번 책은 (유전자의) 이기적 동기가 아니라도 우리는 이타심 그 자체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증거를 침팬지와 보노보의 연구를 통해 보여주었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타심이 우리의 소중한 유산임을 알 때, 우리는 우리 자신과 종교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이 책은 단서를 주고 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책으론 딱이다.
p.s 보노보보다 침팬지가 더 활발히 연구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어 보인다.
1. 침팬지가 보노보보다 사람들에게 먼저 노출되었다.
2. 경쟁과 약육강식이 뚜렷한 침팬지가 그 시대 학계 조류나 세태에 더 맞았으리라.
3. 반대로 지금은 여성의 사회 참여 및 위치가 상승함에 따라 평화적이고 모계 중심인 보노보가 더 주목받는다고 볼 수도 있다.
4. 책에서도 나오지만, 나 역시 인류는 침팬지와 보노보 사이 어디쯤이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