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그 따뜻한 이름
‘죽마고우’는 대나무로 만든 말을 타고 놀던 벗이라는 뜻으로, 어릴 때부터 같이 놀며 자란 벗을 말한다. 나의 어린 시절, 부모님이 일하러 나가시면 집은 아이들 놀이터다. 그때 어른들은 하루 뗏 거리를 해결하느라 어쩔 수 없이 일하러 나가야 했다. 첫돌 전 아이가 기어 다닐 때는 엄마가 업고 일하러 나갔다. 첫돌이 지나고 밥을 먹을 정도가 되고, 뒤뚱뒤뚱 걸어 다닐 수 있으면 형이나 누나에게 맡기고 나간다. 윗 형제가 없는 아이는 동네 큰아이들에게 맡기고 나간다. 나는 어릴 적 동네 어린아이들을 많이 업어주고 돌봤다. 우리들끼리 남았다고 외롭거나 무서운 생각은 하나도 없다. 집 사방이 열려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만 남은 동네는 금세 시끌벅적하다. 우리 집 남의 집이 따로 없다. 우르르 그날 몰려가는 집에서 밥도 먹고 고구마도 먹으며 하루 종일 놀았다. 넓은 마당에서 함께 뛰어놀며 스스로 만든 온갖 놀이로 놀다 보면 하루해가 짧다. 해거름이 질 때면 아이를 부르는 엄마들의 목소리가 크게 들린다. 그 시절 유년의 기억은 참 행복하다. 아무런 걱정이 없고 늘 친구들이 있으니 부러울 게 하나도 없다. 먹고사는 일만 해결되면 아무런 걱정이 없는 시기였다. 눈만 뜨면 보고 싶은 친구, 만나면 재미있고 웃음이 가득했다. 우리 동네는 내 또래 아이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민아는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다. 민아와 나는 언제나 함께였다. 학교가 끝나면 작은 손으로 물동이를 이고 우물가로 갔다. 우물가에서 한참을 놀다가 저녁노을이 질 때야 집으로 왔다. 물은 다 쏟고 바닥에 찰랑거려 엄마에게 지청구를 들었지만 즐거웠다.
가끔 걸레 하나 들고 남강에 가기도 했다. 어른들 빨래하는 흉내를 내면서 비누를 다 써서 혼이 나기도 했다. 하얀 비누 거품 속에 우리들의 웃음을 섞었다.
우리는 교회에서도 한 몸처럼 붙어 다녔다. 크리스마스 연극을 준비하고, 합창을 맞추고, 성경 암송을 외우던 순간들. 주일이 되면 손을 꼭 잡고 교회로 향하는 길이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우리 발길이 닿는 곳마다 웃음이 스며들었고, 함께 뛰어카지노 게임 골목길과 공터에는 우리의 발자국이 새겨졌다. 자치기, 줄넘기, 술래잡기, 숨바꼭질…. 그 시절은 온통 푸르렀다.
그러나 행복했던 날들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열두 살이 되던 해, 카지노 게임가 미국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들었다. 미국 사는 언니가 공부를 시켜주겠다며 불렀다는 이야기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지만, 어느 날 카지노 게임는 더 이상 편지를 쓰지 말아 달라고 했다. 영어를 배우려면 한글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였다. 나는 깊은 슬픔에 잠겼다. 눈을 감으면 들려오던 익숙한 목소리가 이제는 편지 속에서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카지노 게임가 보고 싶어 일기를 쓰며 마음을 달랬고, 가끔은 밤하늘을 보며 그녀도 같은 하늘 아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았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오십여 년이 지나갔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문득 카지노 게임가 너무나도 보고 싶어졌다. 어린 시절 함께했던 순간들이 떠오르며 그리움이 밀려왔다. 나는 문학회 활동을 하며 카지노 게임를 떠올리며 글을 썼고 동인지에 실었다. 그리고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더니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어느 날,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 너머 들려온 목소리는 뜻밖에도 카지노 게임의 동생이었다. "언니가 한국에 왔어요." 카지노 게임의 동생은 내가 교회에 나간다는 걸 기억하고 교회 요람에서 내 전화번호를 찾았다고 했다. 순간 심장이 두근거렸다.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 오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카지노 게임가 바로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카지노 게임가 있는 부산행 버스를 탔다. 멀미가 있어 평소 버스를 타지 않는데 그날은 아무렇지 않았다. 터미널에 마중을 나온 카지노 게임와 만난 그 순간 감동이 아직도 선명하다. 서로를 바라보는 순간, 지나간 오랜 시간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우리는 다시 열두 살 소녀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두 손을 잡고 한참을 있다가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민아는 조용히 말했다. "미국에서 힘들었어. 그곳에서 적응하는 게 너무 어려웠어. 한국을 떠올리면 괴로워서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어. 그래서 편지도 끊었던 거야." 민아는 하루 세 시간 자면서 열심히 노력해서 의사가 되었다. 혼자 떨어진 외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을지 그제야 이해했다. 그동안 내내 마음속에서 묻어두었던 슬픔과 원망이 위로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진한 그리움의 시간이 위로받는 하루였다.
어릴 적 친구는 오랜만에 만나도 어제 본 듯 반갑다. 순수한 마음으로 함께한 시간이 녹아 있어서 그런지 시간과 거리가 아무리 멀어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진정한 친구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으로 함께하는 존재이다."라는 말처럼, 오십 년이 흘러도 우리는 여전히 마음 깊이 이어져 있었다. 새해 민아에게서 소포가 왔다. 내가 치아가 좋지 않다는 말을 기억하고 잇몸 건강에 좋다는 건강식품과 비타민을 챙겨서 보내왔다.
요즘 아이들은 유년기 순수한 친구를 만들기 쉽지 않아 안타깝다. 함께 뛰놀고, 싸우고, 웃으며 시간을 보낼 기회가 줄어들었다. 죽마고우가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숨기지 않고 마음을 나누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의 큰 선물이다.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상관이 없다. 마음속에 그런 친구 한 명만 있어도 마음이 늘 따뜻하다. 친구와 함께한 추억이 주는 따뜻함을 요즘 아이들도 경험할 수 있으면 좋겠다. (2025. 1.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