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글을 언제쯤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걸까
같은 일을 하며 얼마 전 그림책 작가까지 된 친구의 추천으로 1월부터 새로운 커뮤니티에 합류했다.
이 커뮤니티는 나와 같은 직종에 있는 분들 중 책 읽고 글 쓰는 것에 관심이 많은 8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공동이든 단독이든 저서를 갖고 있거나 준비 중인 분들이 대부분이다. 들어간 지 한 달 남짓인데 벌써 출간 소식만 다섯 번을 들었다. 다른 때 같으면 옥죄어오는 듯한 불안감과 조급함이 느껴졌겠지만 들어갈 때부터 이 분들의 열정 가득한 속도를 따라간다기보다 내 속도로 꾸준히 하겠다는 마음이었기에 '아직은' 괜찮다.
평소 글 쓰는 동기들과 단톡방에서 책이야기를 나누고 글 쓰기 인증도 하지만 여긴 좀 더 깊이 빠진 분들이라 그런 건지 성향이라서인지 체계적인 틀이 있다. 반년에 25권을 목표로 책을 읽고, 한 달에 한 권은 후보책 중에서 골라 같은 책을 고른 분들과 소모임 형식으로 단톡방이 따로 꾸려진다. 대략적인 일정표가 주어지고 매일 카톡방에 인상 깊은 부분을 적고 단상을 쓴다. 예전 같으면 혼자 했을 일이지만 같이 하니 무엇보다 건너뛰는 일은 줄 것이 분명하다. 아주 가끔 피치 못한 일로 한두 번이야 넘어갈 수 있다고 하지만 계속 그렇게 하기엔 면이 안 선다. 약간의 자존심도 걸려있다. OT를 통해 얼굴, 소속, 실명, 필명까지 공개한 입장이고 추천한 친구도 있으니 모범까진 아니더라도 낙오되고 싶지는 않다.
올해는 내가 좀 더 치열하고 싶은가 보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미라클모닝을 하는 것도 아니고 루틴을 만들고 체크하고 일정을 지워가며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다. 다만 책을 좀 더 읽고 글도 쓰고 싶긴 했다.
며칠 전 거실과 다락방에 사놓기만 하고 늘여놓았던 책을 안방 책장에 정리해 넣었다. 읽지도 않은 책이 못해도 20권은 되는 듯했다. 읽다 만 책도 많다. 책을 꼭 꾸역꾸역 다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읽고 싶어서 필요해서 산 책이고, 친구와 이야기 나누다가 언급되어 선물 받은 책이다. 이전과 같은 속도로 책을 읽다가는 갖고 있는 책은 그대로 남겨두고 책욕심에 올해 더 늘어날 것이 자명했다.
냉장고 파먹기를 하듯 책장 파먹기를 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후보책은 일곱 권이었다. 그중에서 한강 작가의 <희랍어 시간을 골랐다. 같은 책을 고른 사람들과 단톡방에서 만나 책을 고른 이유를 나눴다. 소설책을 좋아하고 한강 작가의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다른 책은 읽었는데 이 책도 읽어보려는 경우가 많았다. 난 반대였다. 소설책을 좋아하지 않아 별로 읽지 않고, 한강 작가의 책을 한 권도 읽어보지 않았다. 후보책 중 내가 혼자서는 읽지 않을 소설책을 고르고, 그중 불편한 진실로 다가와 가장 회피하게 되는 한강 작가의 책을 고른 것이었다. 혼자서는 하지 않을 일을 여럿이면 하는 군중심리를 제대로 이용할 태세였다. 이렇듯 같은 선택을 하더라도 이유가 다를 뿐만 아니라 나처럼 정반대의 이유로 선택한 사람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지난주까진 책을 마련하고 인증하는 시간이었고 오늘부터 일정표대로 읽어 내려가면 되었다. 물론 꼭 같은 양을 읽을 필요는 없다. 책 읽는 습관이나 상황에 따라 알아서 읽되 대강 큰 틀을 정해준 것이다. 난 되도록 그대로 하려고 한다. 워낙에 야금야금 책을 읽는 편이라서 기한 없이 읽으면 마냥 읽는다. 이런 까닭으로 도서관 책을 못 읽는다. 표시도 표시지만 기본 연장을해 놓고 읽기 시작해도 다 읽지 못하고 반납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오늘이 공식적인 책 읽기 첫날로 23쪽까지, 무제의 1과 침묵이란 소제목의 2까지만 읽으면 되었다.
읽을 책을 선정하고 수요일 새벽에 배송받은 이 책은 목요일 미용실에 갈 때 들고나갔다. 어차피 딴짓할 수가 없으니 책 읽기에 최적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십여 쪽을 읽고 왔다. 기억이 안 났다.
다시 처음부터 읽었다. 오후에 소파에 앉아서 조금 읽고 안방에서 정리하다 진력이 나서 침대에 기대 바닥에 앉아 일부를 읽었다. 11시가 넘어서는 주방 테이블에 놓고 서서 읽었다. 이 책은 절대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공간, 아무리 백색소음이더라도 소음이 있는 공간에서는 읽을 수 없다.
처음 본 낱말은 아니다. 낱말의 조합이 쓰임새가 흐름이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읽는 나도 이런데 작가는 어떻게 썼을까 싶다.
최근에 읽은 책이 에세이, 자기 계발서라서 그랬을까. 더디게 읽히고 새롭게 읽히고 생생하게 읽힌다.
평소에 읽지 않던 문장의 길이도 한 몫하고 <희랍어 시간이란 제목에 맞게 불어, 희랍어까지 쓰여 있으니 쉼 없이 읽어 내려갈 수가 없었다.
곱씹다. 그래, 곱씹어 넘겨야만 했다.
지식카드를 작성하려고 마음먹었으니 마음에 드는 문장을 찾으려는 노력에 더 오래 걸렸는지도 모른다.
글이 쓰인 첫 장은 7쪽에 23쪽까지니 실제 읽은 건 십여 쪽에 불과했으나 인용하려고 적어둔 것은 네 부분이었다. 해당 쪽수를 쓰고 인용문을 베껴 쓰고 그 아래 내 생각을 적었다. 처음엔 아무 생각이 없는 듯하다가도 쓰다 보면 누에가 실을 뽑아내듯 쭉 나오기 마련이다. 혼자 보는 지식카드는 부담 없이 써 내려갈 수 있다. 편하게 이 얘기 저 얘기를 쓰면 되는데 읽은 글이 보통이 아니여서인지 내 글마저 평소 같지 않게 조금 더 자세하게 쓰게 된다.
이제 단톡방에 단상을 적어야 했다. 인용한 글과 내가 쓴 글 네 세트를 블록을 잡아 복사하여 카톡방에 붙여 넣었다. 전송을 하려는데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읽을 글이다.
쓴 글을 다시 찬찬히 읽어보았다. 긴 문장을 나누고 중복되는 낱말을 바꾸고 흐름에 맞지 않는 문장은 잘라내며 간단하게나마 퇴고과정을 거친다. 카톡에서 조금만 편집하려고 했던 터라 엔터 버튼을 누르면 안 된다는 생각을 계속해야 했다. 그럼 미완의 글이 날아갈 테니.
카톡으로 글을 고치고 있는 사이 다른 글이 올라온다. 내 눈길이 멈추지 않았던 인용문 하나가 올라왔다. 글을 쓰다 말고 읽었다. 내 글이 조금은 유치하게 느껴지는 듯 하지만 다시 쓸 생각은 없다.
고민만 길어질 듯하여 전송 버튼을 눌렀다. 첫 단상 글치고는 꽤 길었다.
내 글을 올린 지 얼마 안 되어 댓글이 달렸다. 열정 가득하다고 하니 이제야 한숨이 놓인다.
작가의 말이 적힌 193쪽까지 이렇게 읽어야겠지.
책 읽는 게 참 어렵다. 이렇게라도 읽지 않으면 안 된다.
영양제 한 통을 화분에 거꾸로 꽂아두면 나오긴 하는 걸까 싶게 더디게 들어가다 언제 다 들어갔지 싶게 사라진다.
이 책이 그러면 좋겠다. 아주 서서히 내게 들어와 나를 채우고 내 글에 양분이 되길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