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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의 서재 Jan 2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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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신발이 푹 빠질만큼 내린 눈을 마음껏 밟았다. 새벽의 쌓인 눈 위에 숨을 참아 불룩해진 눈송이들이 흔들거리며 가라앉는 것을 보며 집을 나섰다.


그때만 해도 새벽은 흰 눈과 어둠의 사이에서 흐릿한 회색 펄럭임 정도였다. 찬 바람이 눈을 볼에 부대끼게 하며 녹아 흐르는 것을 즐기며 설 이브의 새벽이 행복했다.


내가 사는 곳과 다른 두께로 내려앉은 눈은 북쪽의 더 센 바람에 날려버렸는지 길바닥에 얇게 풀썩거리고 있었다. 거기서부터 머리카락을 하얗게 태워버릴 듯한 빛에 시달렸다.


서울의 빛은 불의 온도다. 새벽은 그 조용한 기세를 전광판에 내어주고 저 멀리서만 글썽이며 애를 태웠다.


왼손으로 눈을 가리고 계속 걸었다. 썬블록이 아니라 빛블록 크림을 바르고 다녀야 할 것 같다. 손가락 사이로 새는 빛이 눈을 찌르며 찬 바람과 합쳐져 눈물이 났다. 우울로 덮치는 행성의 비유를 보러 가는 곳에 채 도착하기도 전에 마음이 눈물에 젖어 묵직해졌다.


보는 눈이 제대로 열리지 않으니 앞을 향해 앉아서도 안개만 가득이다. 그러다 망막을 찢을 듯한 황홀한 푸른색의 행성이 화면에 가득 차는 순간 아찔한 현기증에 머리를 받치고 있어야 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없음의 심연은 원래 투명한 푸른색인 걸까. 라스 폰 트리에를 다신 안 본다 했다가 미장센에 다시 돌려 앉았다. 멜랑콜리아, 마음과 다르게 속도를 내지 못하는 느리고 느린 저. 런. 느. 낌... 을 알기에 더 화들짝 놀랐다. 식은땀이 나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얕은 신음으로 끝까지 의자를 움켜 안았다.


그 새벽, 서울이라는 도시의 빛에 영화의 푸른 행성의 쨍한 찬란함을 더해 몸과 마음이 다 바래져 힘이 없었다. 물 한병벌컥이며 '이상한 여자가 되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밝아진 낮에 맞춰 더 활기를 띤 빛의 향연이었다.


건물의 대형 전광판의 원색 빛들, 횡단보도 주위를 커다랗게 감싸는 빨강과 초록의 번쩍임, 하늘에서 내리는 흰 눈마저도 빛으로 꽂히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인지 빛을 예민하게 느끼며 먼 핏줄 중에 뱀파이어가 있는 게 아닐까 혼자 상상하며 키득거리곤 한다.


지하철 환승구의 커다란 사각기둥들의 헐떡이는 백색 광고는 빛으로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수백 개의 단도처럼 날아들었다. 어쩐지 지하가 땅 위보다 훨씬 더 밝은 것 같았다. 다음에는 버스를 타야지.


번쩍이는 기둥들을 피해 지하철에 올라 자리를 잡고 눈을 감았다. 사람의 눈은 감은 것이 기본형인 건가. 편안하고 고요했다. 세상과 눈으로 맞짱 뜨려면 큰 용기가 필요하다.


눈을 감으니 귀가 두 배로 커지는 것 같았다. 소리에 맞춰 지하철에서 내려 터덜거리며 걸었다. 눈 속에 파묻혀도 소리 지르는 것 같은 횡단보도 주변 불빛을 피해 서둘러 걸었다.


내가 사는 곳은 여전히 함박눈이 오고 있었다. 두 세계를 겹친 오전이 마법 같았다. 마법은 별을 볼 수 없는 빛의 세계다. 빛이 두려운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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