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미하다. 32
농촌에서의 시간은 항상 계절, 즉 철에 따라 움직였다. 한겨울 추위에 보일러 빵빵하게 틀어 얇게 입고, 한여름 무더위에 에어컨 빵빵하게 틀고 두껍게 입는, 철없는 일은 없었다. 철 따라 입고, 먹고, 일하고, 쉬었다. 그렇게 철의 흐름 속에 있던 우리 시간은, 내일의 모습이 오늘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르다 해도, 거기서 거기였다. 그래서 친척 결혼식 때문에 서울에 며칠 다녀온다는 어머니 말씀은, 예상치 못한 엄청난 소식이었다. 나도 따라가고 싶었다. 서울애들이 진짜 그렇게 허여멀건한지, 진짜 말끝마다 ‘~니?’라는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지, 내 눈과 귀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던 내가, ‘결석 금지’라는 선생님 말씀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게다가 멀미도 있었다. 내 멀미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지금도 유효하다. 멀미 올림픽을 만들어만 준다면, 시내버스, 고속버스, 택시, 자가용, 기차, 배, 비행기 등 기종을 가리지 않고 메달 딸 자신이 있다. 최소 3관왕은 보장한다. 국가를 위해 나의 멀미가 봉사할 날을 고대해 본다.
결국 어머니는 막내 남동생만 데리고 결혼식에 가셨고, 여동생과 나의 삼시 세끼는 오롯이 아버지 책임이 되었다. 아버지가 비벼주시던 비빔밥이 무척 맛있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어머니의 손길을 거쳤을 때 이야기였다. 도시처럼 전기밥솥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지금처럼 반찬 가게와 즉석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다행히 굶는 일은 없었다. 다만 ‘밥상에 고추장, 멸치, 김치 외 반찬 금지’라는 팻말이 우리 집을 둘러싸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저녁, 농사일과 가게일 틈틈이 어린 두 딸까지 챙기는 고단함이 쌓이셨을까? 동네 아저씨들과 주고받은 막걸리에 아버지의 두 볼과 눈이 노을빛으로 불타고 있었다. 운동회 때마다 찍은 기념사진 속 아버지의 실사판이었다. 우리의 운동회는 단순한 학교행사가 아니었다. 마을과 학교가 하나 되어 즐긴 공동체의잔치고 축제였다. 학부모가 아니어도 근처의 모든 남녀노소, 하물며 키우던 똥개들까지 학교로 모였다. 청군과 백군으로 나누어 앉은 학생들과 달리, 마을별로 모여 앉은 어른들은 학생들의 부채춤 같은 장기 자랑도 보고, 마을 대항 달리기에 응원도 하면서, 직접 해온 맛있는 음식을 나누었다. 바쁜 농사일로 만나지 못했던 이웃 친구들을 만나 회포를 풀기도 했다.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레 막걸리도 오갔다. 그러나 걱정은 안 하셔도 된다. 아이들 다니는 학교에서 추태를 부릴 정도로 술을 마시는 철없는 어른은 없었다.시끌벅적 운동회가 끝나면, 어머니의 지휘 아래 붉은 노을을 배경 삼아 운동장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막걸리 덕분에 사진 속 아버지 얼굴은 항상 노을빛이었는데, 그날 저녁도 그랬다.
아궁이 속 불길만큼이나 요란한 소리를 내며, 가마솥이 뜨거운 김을 푹푹 내뱉고 있었다. 그리고 어쩐 일인지 가마솥에는 밥 대신 뜨거운 물만 찰랑였다. 의아해하던 내 눈에 오로라보다 더 아름답고 찬란한 빛을 내뿜으며 도도하게 자리 잡은 카지노 쿠폰이 보였다. 우리 가게에서 팔던 모든 건, 우리에게도 상품일 뿐이었다. 즉 ‘가겟집 딸’인 나에게도 카지노 쿠폰은 언감생심, 그림의 떡이었다는 소리다. 그런데 그 귀한 카지노 쿠폰이 가마솥 옆에 무더기로 쌓여있다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버렸다. 눈치 없는 내 웃음은, 카지노 쿠폰이 우리의 저녁임을 눈치챘다는 뜻이었다.
십여 봉지의 카지노 쿠폰이 우수수 가마솥으로 직행했다. 무엇이든 맛있게 끓여주는 가마솥과, 무조건 맛있는 카지노 쿠폰의 만남은 빅뱅에 버금가는 맛의 폭발을 예고했다. 아버지는 김치를 꺼내 부뚜막에 올려놓으셨다. 부뚜막이 밥상이라는 신호였다. 여동생과 나는 한 손에는 젓가락, 다른 손에는 밥그릇을 들고 부뚜막에 쪼그려 앉았다. 드디어 가마솥뚜껑이 열리고, 동해만큼이나 넓은 카지노 쿠폰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혼자서 다 먹고 싶을 만큼 맛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내 조그만 위는 겨우 한 개였고, 배부름을 인지하는 뇌의 능력은 쓸데없이 활발했다. 다음날을 기약하며 미련 가득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빨리 아침을 되기를 바라며, 일찍 잤다. 그리고 드디어 맞이한 아침, 부리나케 달려간 부엌은 이상하리만치 깨끗했다. 가마솥에는 불어 터진 카지노 쿠폰은커녕, 국물도 없었다. “아빠, 카지노 쿠폰은?” “아빠가 다 먹었어.” 이것이 바로 말로만 듣던 증거인멸?
아마 아버지도 아침에 가마솥을 보고 놀라셨을 것이다. 사실 엄청난 양의 가마솥 카지노 쿠폰은, 술을 마셔도 절대 흐트러짐 없던 아버지 인생 최고의 주사였기 때문이었다. 벌건 얼굴로 신나게 카지노 쿠폰을 끓이던 아버지를 생각하면, 붉은 노을빛 가득했던 운동회가 떠오르고,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제자리인 몸뚱이가 원망스럽고 부끄러워 새빨갛게 불타오르던 순간이 생각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꼴등으로 달리던 내 옆에서 같이 뛰며, 조금 과한 응원을 해주시던 어머니 발견하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던 순간이 떠오른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마음속 어린 내가 신나게 웃는다.
어쩌면 가마솥 카지노 쿠폰은 어른이 되어서도 아이의 웃음을 간직하길 바란 아버지의 큰 그림이었을지 모른다. 받은 만큼 돌려줘야겠다. 막걸리 진탕 마시고 아버지 찾아가서 가마솥에 카지노 쿠폰 끓여드리겠다는 소리 아니다. 나만의 방법으로 사람들의 시절 시절을 유쾌하게 지켜주고 싶다는 말이다. 그럼 큰 그림 그리러 출발해 볼까?
준비! 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