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에 대해선 할 말이 너무 많아서 나는 제대로 시작조차 할 수 없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신형철 평론가의 이 말을 나는 지금 한 글자 한 글자 절절히 공감한다. <스토너를 두 번째 읽은 참이다. 책을 덮은 뒤 가슴 속에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이 차올라 잠까지 설쳤다. 몽롱한 아침일 거라 예상했지만 정신은 또렷하기만 하다. 문학이 내게로 와 나의 오감을 깨우며 살아있으라 한다. 한 문장 한 문장 버릴 것이 없고, 한 장면 한 인물 한 대화도 놓치고 싶지 않다. 이 책의 무엇이 이토록 나를 사로잡는 걸까.
잘 알려진 것처럼 이 책의 내용은 교수가 된 한 사람의 일생을 담고 있다. 대단한 클라이맥스도 없고, 눈물샘을 자극하는 아픔도 없다. 위대한 성공도 처참한 실패도 이 책은 다루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책에는 삶에 대한 모든 것이, 문학에 대한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이 말을 내뱉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는 문학을 아는가. 문학은 무엇인가. 삶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주인공인 윌리엄 온라인 카지노 게임는 대학에 오기까지 스무 해 동안 능동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산 적이 없는 사람이다. 고독이 무엇인지, 인생이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을 단 한 번도 던져본 적 없는 이다. 그에게 삶은 일생이라기보다 일상이었다. 흙을 만지고 씨앗을 뿌리고 거두는 성실이 기본인 삶. 그런 삶을 부모처럼 당연히 이어가리라 생각했고, 그 외의 다른 세계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그런 그가 아버지의 권유로 미주리 대학 농과대학을 진학하고 기초교양 필수과목인 영문학을 들으면서 조금씩 달라진다. 아처 슬론 교수가 스토너를 향해 질문을 하기 전까지 스토너에게 문학은 단어의 나열이었다. 그 안에서 무엇을 느껴야 하고, 무엇을 길어 올려야 하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감각하고 있었다. 이 안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 그것이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다르게 한다는 것. 아처 슬론은 셰익스피어의 73번째 소네트(14행으로 이루어진 시)를 읽은 뒤 스토너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셰익스피어가 300년의 세월을 건너 뛰어 자네에게 말을 걸고 있네, 온라인 카지노 게임 군. 그의 목소리가 들리나?” p22 <온라인 카지노 게임 존 윌리엄스 지음, RHK출판
질문은 그가 손끝으로 어설프게 더듬고만 있던 감각을 더 날카롭게 벼리는 계기가 된다. 작가 존 윌리엄스는 이 대목에서 오감이 열린 스토너를 무척 섬세하게 그린다. 문학의 질문을 품고 바라보는 세상이 어떻게 달라 보이는지 손 안의 작은 아기새를 다루듯 정성스레 묘사한다. 스토너는 문학을 만나 생애 처음으로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낀다. 그 감각은 고독으로부터 시작된다. 작가는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스토너가 살아있는 순간들에 집중한다. 스토너가 스토너가 되어 가는, 스토너로 존재하는 순간들에 정성을 기울인다.
그 정성을 알아채고 나면 한 장 한 장을 도무지 빠르게 넘길 수가 없다. 핑계 같지만 처음 <온라인 카지노 게임를 읽은 건 아이들 방학 때였고, 물장구를 치면서도 연신 엄마를 부르는 개구쟁이 아이들 틈에서 나의 감각은 책에 오롯이 집중하지 못했다. 작은 부분보다는 큰 줄기를 더듬느라 바빴다. 책을 덮고 눈물이 맺히고 잔향이 남았지만, 그에 오래 집중하지 못하고 나는 다시 육아의 세계로 복귀했다. 최근에 학교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는 책으로 선정돼 이 책을 다시 꺼내 들고서야 비로소 나는 고독 속에 <온라인 카지노 게임의 진정한 가치를 오감으로 느끼며 읽을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온라인 카지노 게임를 재발견한 책이라고 한다. 이 책은 2006년 '뉴욕 리뷰 오브 북스' 판으로 50년 만에 재출간되었는데, 오랫동안 절판되고 잊혀진 책을 출간할 수 있었던 건 뉴욕의 유명 서점 주인의 강력한 추천 덕분이었다고 한다. 번역된 책은 프랑스에서 입소문이 나며 인기를 끌고 곧이어 유럽 전역의 베스트셀러가 된다.
그 여파는 2015년에 한 번, 그리고 2025년에 또 한 번, 한국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최근 유명인이 추천하는 영상이 화제가 되며 다시 역주행하고 있다. 이 책이 역주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는 이런 역주행도 조금 예측하고 있었던 것 같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 출간 2년 전 에이전트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베스트셀러나 그 어떤 것도 될 것이라는 환상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중략) 내가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이 책이 좋은 소설이라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심지어 상당히 좋은 소설이 될지도 모릅니다.”
존 윌리엄스는 그 자신이 대학에서 문학과 문예창작을 가르친 교육자였다. 그는 자신이 쓴 이 책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영웅이 세상을 구하는 시대를 지나, 스토너처럼 나를 알고 내가 가야 하는 길을 묵묵히 가는 성실한 개개인이 세상을 구원하는 시대로 건너가면, 분명 이 책의 가치가 인정받을 것이라 짐작한 듯하다.
<스토너는 이렇듯 시대가 소환한 책이다. 스토너는 소위 말하는 성공한 삶을 살지 않았다. 결혼도 자식도 사랑도 뜻대로 되지 않고 교육자로서의 명성도 이루지 못한, 얼핏 초라해 보이는 인생이다. 제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적 없는 범인(凡人)의 이야기인 것. 그럼에도 스토너라는 인물이 일견 비범해 보이는 건, 그가 삶을 대하는 태도 때문이다.
그는 애쓰지 않는다. 자신이 사랑하는 일이나 대상에 열정을 보이고 때론 그 열정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빠져들지만, 그 외의 일들에는 안간힘을 쓰지 않는다. 그는 타인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타인의 범주에는 가족도 포함된다. 다만 문학을 공부하며 자신을 찾아갈 뿐이다. 자신의 삶조차도 관조하는 자세로 바라본다. 몸과 마음으로 사랑한 사람과도 결국 헤어질 수 있는 건 그 때문이다. 그는 안다. 교육자로서의 일상 없이 자신은 자신이 아니라는 것. 운명적인 사랑을 놓은 후에도 그가 그로서 살 수 있는 건, 그는 이미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자신이 암에 걸려 곧 죽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동요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에게 남아있는 몫을 해낼 뿐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 몸을 온전히 가눌 수도,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도 없는 상태에서도 그의 정신은 황혼처럼 빛난다. 세상이 멈춰버린 듯한 그 시공간에서, 유일하게 햇살만이 내리쬐는 그의 마지막 자리에서, 그는 지난날을 돌아보며 자신에게 반복해 묻는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마지막으로 자신이 쓴 단 하나의 저서를 손에 쥐고 그는 부정할 수 없는 그의 작은 일부가 그 안에 있고, 자신이 사라진 후에도 남아있으리라는 것을 상기한다. 마치 젊은 날 그가 미주리 대학의 교정을 산책하며 불에 타 덩그러니 기둥만 남은 과거 건물의 잔해를 바라보았듯이. 우리의 삶을 버티게 한 것도 그 기둥 뿐이며, 삶이 끝난 후에 남길 수 있는 것도 그 기둥 뿐임을. 온라인 카지노 게임를 일깨운 셰익스피어 소네트의 일부분처럼, 그는 “양분이 되었던 것과 함께 소진되어 반드시 목숨을 다해야 할 죽음의 침상처럼 젊음이 타고 남은 재 위에 놓인 불꽃처럼” 사그라든다.
이 책이 문학에 대한 헌사이자 찬사로 느껴지는 건, 이 대목 때문이다. 문학이 문학으로 연결되고, 삶이 삶으로 이어지는 이 반복의 고리를 작가는 결코 놓치지 않는다.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이 책의 저자 존 ‘윌리엄’스로 이어지고, 그가 낳은 걸작의 주인공 ‘윌리엄’ 스토너로 연결된다. 윌리엄이라는 흔하디 흔한 이름은 세 존재 안에서 꺼지지 않는 불꽃 같은 존재가 되고, 스토너는 단단하고 묵직한 돌(stone)처럼 흔들림 없이, 다만 대마초에 취한 사람(stoner)처럼 자신이 사랑하는 문학에 취해 교육자로서의 삶을 실천하고 마감한다.
작가는 공부가 삶 그 자체인 인물을, 세상과 타협할 수 없는 순수성을 지닌 사람을 대학이라는 공간에 앉힘으로써 ‘대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도 함께 던진다. 이 꼼꼼한 서사는 놀랍게도 스토너라는 한 인물의 삶을 통해 공부와 대학, 문학과 삶, 그리고 인간과 세상을 모두 조망한다. 이 이야기는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촘촘한 씨실과 날실로 엮여 ‘나’는 어떻게 존재해야 하며, 동시에 ‘세상’과 어떻게 조우하고 화해해야 하는지를 우아하고도 섬세한 문체로 담담히 날카롭게 그려낸다.
책을 덮고 표지를 바라본다. 이 책은 한국에서 두 가지 버전으로 판매되고 있다. 초판본은 노란 바탕에 온라인 카지노 게임가 바라보던 연구실 창이 담겨 있다. 창문 너머에는 미주리 대학의 푸른 풍경과 은빛 기둥들이 그려져 있다. 다른 책은 무채색이다. 책과 한 몸이 된 듯한 온라인 카지노 게임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표지를 넘기면 귀퉁이에 작은 글씨로 여치가 디자인하고 방아깨비가 그렸다고 적혀 있다. 여치의 정체는 북디자이너 김여진 씨이고, 방아깨비는 그녀의 남편이다. 바다 건너 한국 땅으로 건너온 작품이 온전한 이해를 담은 그림을 품고서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존 윌리엄스는 스토너와 마찬가지로 생전에 화려한 조명을 받지 못했다. 학문을 연구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며 조용하게 살다 1994년 세상을 떠났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스토너처럼 문학에 대한 사랑과 열정으로 성실한 교육자의 삶을 살지 않았을까. 그는 떠났지만 그의 작은 일부는 세상에 기둥처럼 남아 6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말을 건다. 너의 기둥은 무엇이냐고. 너는 살아있느냐고. 너는 인생에서 무엇을 기대하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