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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is Seok Jan 15. 2025

공부하는 카지노 게임, 일하는 아내


올해로 서른 다섯이 됐다. 옛날 한국 나이로 말하자면 서른 일곱. 불과 몇 년 전이었더라면 내 나이가 어느새 불혹을 바라보고 있구나 싶어 덜컥 겁이 났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지금 미국에 살고 있고, 한국에서도 '만 나이'가 공식적인 나이가 됐으니, 두 나라 모두에서 난 '서른 다섯'으로 살 수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난 삼십대의 딱 중간 지점에 와있다.이십대 청춘의 마음과 사십대 안정된 마음 그 사이에 있는 것. 즉, 난 청춘도 아닌데다 매우 불안정한 어느 시점을 살고 있다.


남편은 올초부터 MBA에 가겠다고 본격적인 공부를 하고 있고, 두 아들은 초등학교에 다닌다. 난 지난해부터 LA시청 시의원실 보좌관으로 이직해 새로운 일을 배우며 지내고 있다. 언뜻 보면 안정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남편이 동부 학교들을 목표로 MBA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빠르면 1~2년 안에 미국 내에서 주거 지역이 아예 바뀔지 모르는 상황에 처해 있다.


1년이 지나자 새로운 직장에 정을 좀 붙이고 다닐만한 감정이 드는데, 또다른 변화를 맞이할지도 모르다니. 지난해까지만 해도 새로운 직장을 떠날만한 합리적인 이유가 필요했기 때문에 남편이 동부쪽으로 MBA 가는 일에 적극 찬성했으나 막상 남편이 올초부터 공부를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자니 묘한 감정이 든다. 이게 맞나? 싶은. 아예고국으로 돌아가는 게 아닌 이상 그 어떤 변화를 원치 않는 나를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도전해보겠다는 카지노 게임을 막을 마음은 없다. 난 운명론자인지라, 주어진 운명대로 내가 살아갈 방향이 이끌어지리라 믿는다. 동부에 갈 운명이면 갈테고, 이곳에서 더 살아야 할 운명이라면 이곳에서 또다른 길이 열리겠지. 뭐 그런 마음.


미래의 문제는 미래에 생각하기로 한다. 어쨌든지금 당장 성가시는 일은 공부하는 남편을 둔 아내로서 몹시 버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것. 남편은 2025년 첫 3개월 동안은공부에 최대한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여행, 육아, 가사를 이전보다 소홀히 할 수밖에 없다고 내게 양해를 구했다. 내 대답은 당연히 예스. 그런데 이게 말이 쉽지, 막상 남편이 지금까지 해오던 일들까지 내가 다 떠맡다 보니 불과 일주일이 지났을 뿐인데 살짝 버거움이 느껴진다.


퇴근을 하면 Part.2의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아이들을 픽업하고, 저녁하고, 학원에 보냈다가, 숙제를 봐주고, 재우는 일상... 물론 지난해라고 다른 삶을 살았던 건 아니다. 지난해에도 같은 루틴으로 살았다. 그러나 그때는 정확히 카지노 게임의 몫과 나의 몫이 나눠져 있었다. 내가 저녁을 하면 카지노 게임이 설거지를 하고, 내가 바쁘면 카지노 게임이 아이들 픽업과 학원 라이드 등을 도맡거나 이런 식으로 유동적인 스케줄로 생활이 가능했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 육아, 가사의 85%는 나의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전까지는 적어도 6:4의 비율은 맞춰졌던 것 같은데...



그래서 그런지 퇴근하고 나면 '아, 피곤해'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절로나온다. 이렇게 피곤한 삼십대 중반의 삶이라니. 게다가 더 불만인 건 자신이나아갈 목표를 위해 공부하는 남편 곁에서 나는 '보좌'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이 상황이 썩 달갑지는 않다는 것. 남편이 이 가정의 주인공이고 내가 조연이 된 느낌이랄까. 신혼 초에 내가 대학원에 다닐 때 남편이 회사를 다니며 우리집 가장 역할을 해줬으니, 어떻게 보면 과거의 빚을 지금 갚는 거라 봐도 무방하다. 물론 그 때는 두 아들 녀석이 우리 곁에 없었다는게 함정이지만.


저녁을 먹으며 카지노 게임에게 한 마디 한다.


"지금 이 순간들을 잊으면 안돼!

언젠가내가 또 공부를 하거나 뭔가에 집중하고 싶을 때, 그땐 당신이 날 서포트해줘야돼."


답정너이긴 했지만 남편은 흔쾌히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는다. 부부 사이란 이런게 아닐까. 서로 필요할 때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관계. 마치 부모와 자식처럼. 지금은 내가 남편에게 도움을 줄 차례다. 맘껏 공부해봐, 남편!



(사진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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