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각형 Apr 06. 2025

카지노 게임적 글쓰기

카지노 게임북한강을 마주보며 삼악산 중턱 그 어딘가에서



어떤 사람이 내게 남긴 말이었다.

"당신의 글에는 카지노 게임이 메말라 있다는 게 느껴진다."


다시 말해서 나는 카지노 게임적 글쓰기를 하지 않는다는 지적이었다. 반면에 그 사람이 구독을 누를 정도로 칭송해지 마지않았던 어떤 사람의 글은 온통 카지노 게임적 발자취가 남겨져 있었다.


그의 글을 발견하고 자신과 동일한 카지노 게임선을 거쳤다는 걸 알게 된 그 사람은 그 사람을 응원하고 동조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내겐 당신 글에는 카지노 게임이 메말라 있다고 핀잔을 주었다.


다른 인간의 조건을 동일하게 부여받은 내게 과연 카지노 게임이 없었을까?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나는 카지노 게임을 느끼고 있다.


뼈가 시릴 만큼의 회한과 치기 어린 질투를 망라한 카지노 게임이 내 마음속에서 치솟고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이토록 사람들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이들이 왜 그토록 자신의 카지노 게임에 몰입되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을까?


인간의 역사에서 볼 때 철학에 의해 카지노 게임이란 것은 그동안 억눌려 왔었다.유교적 가족관에 따라 우리도 카지노 게임을 표현하지 말라고 어른들에게서 교육받았다.


아무 이유도 없이 우리는 그저 불문율을 답습하고 수용하기에 바빴다. 3세기 전에 우리와 똑같은 일을 겪었던 천재가 있었다.


그는 북받쳐 오르는 자신의 카지노 게임을 억누르지 못했던 어린아이였다. 그런데 그는 천재였다.


철학사에서 그를 빼고 논한다면 중간에 뚝 끊긴 국수를 먹는 듯 무언가 허전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카지노 게임이 존중받고자 하기 위해 카지노 게임을 무시하게 된 원인을 찾았다.


그가 찾은 것이 무엇이었을까? 그는 플라톤을 저주했으며 심지어 플라톤이 암시했던 절대선이자 절대미인 하나님이 플라톤의 등 뒤에 서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래서 니체가 선택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나를 방해하는 것을 없애는 것은 제거하는 것이다.


니체는 결국 신을 죽여버렸다. 그러나 니체가 죽인 신은 인간이 발명한 신에 불과했다.


인간이 발명한 신은 무엇인지도 그 속성을 깊이 있게 파악하는 작업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표현하고 싶어 조급했던 그는 인간이 발명한 신을 살해하고 말았다.


그러나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신의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과연 신을 죽일 수 있겠는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니체가 신을 죽인 뒤로 나머지 인간에게는 자신의 카지노 게임을 마음껏 표현해도 좋다는 권리를 얻게 되었다. 인간 카지노 게임의 해방, 그것이 바로 니체가 열어젖힌 포스트 모더니즘의 캐치프레이즈였다.


그 뒤로 니체를 뛰어넘는 지성인이 출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자신의 카지노 게임에 취한 인간들은 두뇌를 활용하기를 기피했다. 왜냐하면 두뇌를 작동시키는 데에 필요한 에너지는 카지노 게임에 몰입하는 데에 필요한 에너지보다 훨씬 더 크고 부자연스럽게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들은 자신의 이성을 충분히 활용하기보다는 카지노 게임에 휩쓸기를 훨씬 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도 더 훨씬 강하게 휩쓸리고 있다.


카지노 게임의 충만함이 주는 쾌락이 얼마나 큰지, 일부의 사람들 중에서 스스로 카지노 게임을 창출해내지 못하게 되자 마약에 손을 뻗치게 될 정도이다.


그러나 카지노 게임이란 과연 무엇인가? 우리가 카지노 게임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단 말인가?


카지노 게임이란 해변을 훔치는 파도와 같이 그 높이가 같지 않다. 그래서 카지노 게임은 통제가 되지 않으며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운 카지노 게임을 소비하기 위해선 바깥으로 분출하거나 관망해야 한다.


카지노 게임을 외부로 분출하는 일은 대부분 파괴적인 양태를 띄게 된다. 그렇기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카지노 게임에 치우쳐 취한 행동에 대해서 후회에 빠지게 된다.


자신의 카지노 게임에 취해 선택한 자신들의 행동을 뒤늦게 뉘우치고는 이러한 고통과 괴로움에서 해방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지혜를 찾아 헤매고 있다.


이러한 요구에 부응한 가짜 스승들은 이러저러한 행동원칙을 제시하지만 여전히 21세기의 인간들은 자신의 카지노 게임이 부추긴 행동에 따른 결과를 책임지지 못한 채 후회에만 빠져 있다.


이러한 카지노 게임의 폐단을 잘 아는 사람들, 다시 말해 그 속성을 명확히 파악한 사람은 우리에게 이러한 해결방법을 제시한다.


카지노 게임이 북받쳐 오를 때 그 카지노 게임을 해소시키는 아주 단순한 방법이 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그저 그 카지노 게임이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바라보기만 해도 된다.


나머지는 시간이 해결해 준다. 대신에 카지노 게임의 정체를 확인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해소가 되지 않는다고 조언해 줬다.


즉 카지노 게임은 충만한 것이지만 일시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감성적 글쓰기에 치우쳤다면 그의 가슴에는 카지노 게임뿐이라는 사실을 방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에게는 카지노 게임 말고는 얘기할 게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결국 빈털털이 신세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카지노 게임의 속성은 무엇인가? 일시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영원하지 않다.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가 무엇인가? 찰나에 불과한 이 순간을 영원히 남기기 위한 것이 아닌가?


따라서 감성적 글쓰기에 치우친 작가들에게 유일한 컨턴츠는 일시적인 감성일 뿐이다.


우리는 영원히 해방되고자 한다. 영원히 안식하고 싶다.


이 순간의 안정감이 순간에 그치지 않기를 원한다.


그런 우리가 과연 감성적 글쓰기에 혈안이 되고 목매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이러한 카지노 게임의 속성을 잘 알고 있는 나는 카지노 게임적 글쓰기를 극단적으로 지양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카지노 게임을 표현하는 언어를 차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 글은 인기가 없으며 내 글을 찾는 불나방이 없다.


이러한 생리를 모르고 있지 않다.


나는 세상 사람들의 인기에 영합하기를 지향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내가 발견한 세계의 일부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나를 지지해 줄 사람을 찾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