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기 4.SM의 2번째 실패
슬픈 마네킹으로 데뷔하여 한미일의 절묘한 시스템 조합을 선보이며 야심차게 출발한 SM은 현진영의 대마초 사건으로 1차 위기를 겪고 마지막 활동을 함께 했던 와와 멤버이현도, 김성재는 이 사건을 계기로 회사를 떠나게 된다.
초창기 SM기획에는 현진영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노래그림이라는 4인조 통기타 그룹에서 활동하던 한동준을 2번째 가수로 영입을 했다.
(변진섭의 새들처럼을 작곡한 지근식, 일밤 러브하우스로 유명한 건축가 양진석이 같은 멤버)
한동준은 김광진을 회사로 데리고 오면서 3번째 가수가 된다.
지금은 아이돌만 제작한다는 인식이 강하지만 이수만과 SM의 행보를 자세히 살펴보면 다양한 장르 음악을 담으려 했던 시도들을 엿 볼 수 있다.
특히 자신이 했던 포크, 락, 발라드 장르의 인재 영입과 다양한 형태의 밴드카지노 게임 제작하려 했던 것을 보면 단순히 유행하는 카지노 게임 쫓기 보다는'카지노 게임 잘 만드는 녹음실, 좋은 후배들을 양성해 정말 좋은 소리를 내는 좋은 카지노 게임 만들어내고 말겠다'는 SM기획 초창기 그의 인터뷰가 진심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당시 둘 다 전업 카지노 게임인으로 올인 하기엔 성공이 보장 되지 않아 한동준은 대학을 다니며 영어학원에 다녔고 김광진은 투자자문회사를 다니고 있었다고 한다.
1991년 1월 김광진, 지근식, 박용준의 곡을 담은 한동준 1집이 발표되고 그해 10월 김광진도 정규 1집을 발표하게 된다.
결과는 실패.. 둘 다 실력있는 뮤지션이었지만 아직 때가 아니었을까?
회사를 차리고 현진영 1집을 제외하면 제작한 모든 앨범에 실패를 한셈이다.
이수만 역시 실패를 인정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고결국 두 사람은 SM기획을 떠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두 사람은 카지노 게임적으로 엄청난 히트곡을 발표하게 된다.
한동준은 '너를 사랑해', 김광진은 박용준과더 클래식을 결성해 '마법의 성'으로 큰 성공을 하며 카지노 게임 활동을 이어간다.
이수만은 계속 제작자 업무만 볼 수 없던터라 다시 방송인으로 복귀했고 월미도의 헤밍웨이 카페 사업을 통해 제작 실패로 인한 자금난을 조금이나마 이겨 낼 수 있었다.
현진영의 감옥생활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만큼 자숙의 시간도 필요했고 당장 대중 앞에 선보일 무기 조차 준비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덜 알려졌을때 발생한 사건이라 많은 이들이 알지 못한다는게 불행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절치부심 재기를 준비하던 현진영은 이태원의 문나이트에서 이탁을 만나게 된다.
둘은 금새 의기투합해 합숙을 하며 카지노 게임 만들었고 다시 SM으로 복귀한다.
카지노 게임 듣고 제작을 결심한 이수만은 편곡에 대한 부분과 춤, 의상 등 전체적인 부분에 대한 검사를 정기적으로 하며 오디션 아닌 오디션을 실시했다.
현진영은 '노래는 금방 나왔는데 편곡에만 약 1년의 시간이 걸린듯 하다, 선생님께 계속 검사를 받았고 매니저 정해익를 숙소로 보내 수시로 작업 진행 상황을 체크하셨다'고 회고 했다.
제작 마무리 단계에서는 '이제는 단순히 카지노 게임, 춤뿐만 아니라 입고, 먹는 행동 양식까지 영향을 줄 수 있어야 성공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며 조금은 부족했던 부분에 스스로 보완점을 찾길 원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태원에서 교류하던 미군들을 통해 좀 더 미국의 감성, 그들이 표현하는 힙합에 가까워지려 노력했고 의상까지미군부대 PX에서 구매했다.
사실 현진영과 이수만 모두 더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연이은 제작 실패를 한 이수만과 한번의 실수, 가족의 생계까지 떠안은 현진영 모두 누구보다 성공이 절실한 사람들이었다.
컴백하기에 모든 상황이 좋았다.
세상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으로 한차례 들썩이며 청소년들은 댄스 카지노 게임에 목말랐고 새로운 스타를 원하고 있었다.
추천곡 (기준: 내맘)
한동준 - 그대가 이 세상에 있는 것만으로
김광진 - 멀리 있어도(이승환 4집 '흑백영화처럼'의 원곡), 일보접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