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구가 가족으로, 아는 사람으로 되어가는 길
"형님, 어떵허영 딸을 시집보내집디가? 사위가 육지사람? "
며칠 전 후배를 만났는데, 지난달 잔치를 잘 치렀느냐는 인사를 하다가 나온 말이다. 순간 나는 멈칫했다. 열린 사고,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후배라고 여겼기에 그에게서 받은 질문은 다소 생소하기까지 했다.
그 후배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사위가 제주 사람이면 그래도 1년에 몇 번 고향에 들르기에 딸 얼굴을 볼 수 있지만, 육지사람이면 그렇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었다. 여태껏 한 가족으로 애지중지 키웠는데, 다 키워놓고 보고 싶을 때 언제라도 봐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게 멀리 가버렸다는 데에 대한 부모로서의 아쉬움 표현이었다. 유독아빠와 딸사이는 더욱 그렇다고 한다. 교통이 발달하고, 소통수단이 많아졌지만 자녀들이 결혼을 하면서 육지로 떠나버리면 쉬 그렇게 머나먼 사람이 되어버리는 현실을 걱정하는 얘기였다. 얘기를 듣자니 내가 걱정하는 부분이어서 나는 긴 한숨을 내쉰 끝에 "그럼 어떻허나"하고 퉁명스러운 대답으로 마무리를 한 것 같다.
제주에서 흔히들 겪는 과정이 있다.
자녀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선택할 때쯤이면 제주에서의 탈출을 허용하느냐 마느냐 하는 부모와 자식 간의 일종의 힘겨루기다. 자녀들은 대부분 좁은 제주를 벗어나서 생활하고 싶은 마음에 탈 제주를 원한다. 그러나 핵가족 시대 많아야 둘, 셋의 자녀를 둔 부모들의 생각은 다르다. 일단 대학을 육지에 가면 다시 제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기에 대학 때부터 제주에 눌러 않기를 원한다. 육지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한다는 것은 배우자도 육지사람을 만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자녀들이 제주에 오는 일은 년중행사가 된다. 그러면 자녀들은 흔히들 하는 말로 육지사람이 되어 간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은 부모들의 자녀에 대한 생각은 그리움으로 변해버린다.
후배는 딸하나에 아들 둘을 두었다. 딸은 서울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그곳에서 직장생활을 준비했었다고 한다. 준비하는 직장이 공무원이어서 그 후배의 생각은 "제주에서 공무원을 하면 되지 왜 서울에서 하려고 하느냐"였다. 똑같은 대우를 받을 공무원이다. 친숙한 환경에 어머니가 해주는 따뜻한 밥을 먹고 다니고, 집세 걱정 없이 집에서 살면서 돈을 모았다가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면 되는데 왜 사서 고생을 하겠느냐는 걱정(?)이었다. 서울에서 취직준비를 한다면 하숙비를 보내주지 않겠다는 으름장을 놓은 협박(?)에 딸은 하는 수없이 제주로 내려왔다. 제주를 근무지로 시험을 보고 합격을 해서 여기서 지금 직장생활을 한다고 한다. 지금은 매일 출퇴근하면서 얼굴을 볼 수 있고, 생활을 같이 할 수 있어서 너무나 만족하고 있다고 한다. 딸도 속마음이야 어쨌든 행복하다고 얘기를 해준다고 자랑스럽게 얘기를 했다.
사실 나도 이젠 나이가 들어서인지, 처해 있는 환경이 그래서인지 후배의 그런 생각에 동감을 했다. 사실 후배가 그런 얘기를 하기 전부터 많이 걱정을 하던 부분이기도 하다.
나는 세 자녀 모두를 서울로 보냈다. 대학을 서울로 보낸다는 것은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허용하겠다는 묵시적 동의다. 사실 일자리가 없는 제주에서 그렇게 동의해 줄 수밖에 없는 현실인 것도 맞다. 결국 그들은 그곳에서 배우자를 만나고, 어머니가 흔히 말하듯 "육지사람"이 될 것이다. 어찌할 수 없는 환경,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일임을 알면서도 불만스러운 것은 현실이다.
난 가끔 TV를 보다가 눈물을 흘리거나, 아내에게 부러움을 얘기하는 경우가 있다.다 자란 형제들이 동네에 살면서 부모님과 함께 어울리는 스토리를 보는 경우다. 힘들 때 옆에서 거들어 주기도 하고, 삼겹살에 소주 한잔을 하면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모습을 보는 경우다. 너무나 부러운 생각이 앞서기에 "나도 저렇게 한번 해보고 싶은데..."라는 마음에 울컥하는 때가 있다.
부모님은 5남 4녀 대가족을 두었다. 먹고살기가 어려웠던 시절, 어릴 적 전쟁 치르듯이 삶의 하루하루를 보낸 전우 같은 형제들이다. 콩한쪽도 나눠먹고, 옷 한 벌로 교대로 입었다. 형제 때문에 피해도 입었고, 형제 때문에 혜택도 입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가족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지금은 전국적으로 이리저리 흩어 저 살고 있다. 어머니 구순 때 전무후무하게 모두 만나본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본가를 가면 어머님 혼자 적막강산이다. 언제 식구가 9남매의 대가족이 있었는지 아예 상상도 가지를 않는다. 어머니가 항상 하는 자조 섞인 말이다. "다 자기 살디 가부난.." 오늘 같은날이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적이 없을 것이다.
자식의 앞날만을 걱정하면서 하고 싶은 것을 하라던 부모님이었다.
여기서는 먹을 것이 없으니 떠나라고 들 떠밀던 부모님이었다. 자식들은 부모님의 말을 듣고 자기 살 곳을 찾아서 떠났다. 그리곤 그곳에 눌러앉았다. 이제는 가끔 보는 사이가 되었다. 낯선 사이, 서먹한 사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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