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맹의 나라 캐나다에서 보낸, 나의 달콤쌉쌀한 30대
‘실업급여 받아낸 한 달간의 분투기’
2020년 초, 팬데믹이 터졌을 때, 나는 여전히 ‘열심히 하면 누군가는 알아주겠지’라는 착각 속에 구두로 약속된 모든 것이 지켜질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으며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이미 1년 전부터 시급 인상과 적절한 대우는 미뤄지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름 미래가 보장될 것 같던 회사에서 성격은 한국 아저씨 저리가라 욱하는 시칠리안 셰프에게 정통 이탈리안 요리를 배운다 자위하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3월 초 데이오프를 맞아 하버프론트에서 바람을 쐬고 있던 그날, 캐나다 전역에 셧다운 명령이 내려졌고,
카지노 가입 쿠폰 하루아침에 레이오프를 당했다.
운 좋게도 우리 회사 거래처인 그로서리 마켓에서 캐시잡으로 테이크아웃 메뉴 개발 일을 시작해 나름 새로운 곳에서 바로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한달을 오랜만에 매니징이 아닌 나름 편하고 재밌는 일을 하며 적응하던 그때, 회사는 테이크아웃을 위해 3개의 매장을 오픈한다고 각 매장 헤드와 수셰프들에게 연락을 해왔다. 비자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영주권을 위한 워크퍼밋을 도와주겠다는 말을 철썩같이 믿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나는 매장을 대표해 복직하게 되었다.
같은 시기에 나와 함께 승진했던 인도인 수셰프는 회사에서 비자 스폰 지원을 받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일하길 거부했지만, 나는 어리석게도 혼자서 회사를 돕겠다고 나섰다. 그렇게 5개월간, 혼자서 파스타 팬을 한번에 10개씩 돌려가며 하루 10시간 이상 일했다. 그 후 우리 매장이 재오픈하면서 셰프에게 임금 협상을 하자는 연락을 받았고, 나는 나의 공로를 인정받을 것이라 조금은 기대했다. 하지만 그 대답은 “다른 사람과 똑같이 대우할 수밖에 없다”였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다음날 바로 사표를 냈다. 물론 부당한 대우에 대한 장문의 이메일을 본사에 보냈지만, 그나물에 그밥인 그들의 반응은 예상한 대로였다. 내가 사표를 낸 것에 같이 일했던 다른 매장 셰프들도 적잖히 놀란 눈치였다. 특히 나와 친했던 셰프는 “너 참 미련하고 멍청하다”고 농담을 건넸지만, 그 말 속에 담긴 의미는 나도 잘 알았다. 결국 그 인도 애는 1년 뒤, LA 매장의 헤드셰프가 되어 떠났고, 왜인지 팬데믹 동안 내가 대신 일해준 건 그 아이의 공로로 돌려졌다. 화가 나지만 놀랍지도 않았다.
캐나다에서는 자발적 퇴사는 실업급여를 받을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억울한 마음에 실업급여 신청서를 작성했다. 몇 주 뒤, 관련 부서에서 연락이 왔고, 한 달 간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내가 자발적으로 퇴사했으니 실업급여를 받을 수 없다고 말하며 의문을 제기했지만, 나는 단호하게 맞섰다. "나는 비싼 학비를 내고, 4년 넘게 성실히 일한 이민자이다. 그런데 시급도 올려받지 못했고, 팬데믹 중에는 부당하게 차출되어 왕복 2시간을 오가며 일했지만 돌아온 것은 역시 부당한 대우와 차별이었다고. 그 대우를 받는 것보다 그만두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그간 학력도 경력도 없이 입만 살아있는 캐네디언들에게 당한 설움도 함께 올라오던 걸 간신히 참으며 싸웠다. 이후 일주일에 한 번씩 담당자는 회사와 나 사이의 상황을 맞춰보며 연락을 이어갔고, 카지노 가입 쿠폰 이민자로서 겪은 부당함을 적당히 감정에 호소하며이민국의 자부심을 자극하는 질문을 던졌다.
결국, 한 달간의 전화통화 끝에 실업급여 대상자로 인정되었고, 팬데믹 특수 상황에 맞춰 조금 더 많은 금액을 받게 되었다. 목소리 큰 놈에게 장사는 없다고 했던가, 입만 잘 열면 대우받고 무엇이든 가능한 캐나다에서 또 한 번 그들만의 방식에 맞게 살아가는 법을 터득했다. 그렇게 4년 넘게 일하며 받지 못했던 보상을 실업급여로 조금이나마 받았지만 믿었던 사람들에게서 한순간 버려졌다는 배신감과 허무함은 꽤 오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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