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시절 몇 년간 혼자서 한창 글쓰기를 이어가다, 처음으로 글쓰기 수업이라는 걸 찾아가본 때가 있었다. 몇몇 아카데미나 문화센터에 기성 작가들이 하는 수업들이었다. 나는 그런 몇 번의 수업들을 거치며 내가 쓴 글들을 작가들에게 보여주고 첨삭을 받았다. 다른 수강생들의 평가를 받는 ‘합평’ 시간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대부분의 수업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특히, 작가의 유명세는 글쓰기 수업이 얼마나 좋은가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딱 한 번, 내게 지대한 영향을 준 글쓰기 수업이 한 번 있었다. 내 기준에서 그 수업을 이끈 작가가 유명한 작가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특별한 점이 있었다. 진심과 정성을 느꼈던 것이다.
그는 내가 쓴 글의 거의 모든 문장을 거론하며 고쳐야 할 점들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직언을 했다. 그는 자기가 생각하는 좋은 글의 기준을 집요하게 알려주면서, 내 글이 가진 문제점에 대해 일깨워주려 했다. 그 시간은 내게 매우 고통스러웠지만, 그가 시키는대로 글을 고치려는 노력을 다했다. 그처럼 내 글을 열심히 봐준 사람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내가 처음 경험한 진짜 피드백이었다. 사실, 이후에 나는 그가 가르쳐준 많은 것들을 버렸다. 가령, 그가 강조한 단문 위주의 문체라든지, 지적인 깊이 보다는 표면적인 가독성과 속도감 있게 읽히는 문장에 대한 지향성이라든지 하는 건 나와 꼭 맞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어찌보면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세상에 글쓰기에서의 ‘절대적인 기준’을 아는 사람은 없다. 세상의 모든 작가는 조금씩 다른 각자의 기준을 갖고 있기도 하다. 나도 그런 나의 기준을 찾아나가며 ‘작가’가 되었다.
그렇지만 내게 명료히 제시되었던 그 ‘최초의 기준’에 따른 피드백은 매우 중요한 경험이었다. 따지고 보면, 세상 모든 예술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의 그림을 따라 그리기만 해서는 그는 자기만의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될 수 없다. 결국 처음에는 카지노 게임 사이트으로부터 배우더라도, 이후에는 자기만의 기준을 찾아나가야만 한다.
그러나 그 최초의 피드백이 주는 경험은 절대적이다. 내 작품을 타자의 시선에서 보는 것, 그것도 매우 꼼꼼하게 바라보는 것, 내가 내 글을 보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 그것을 진정성 있게 경험하고 나면, 모든 게 달라진다. 그것은 나만의 글을 ‘시작’하게 되는 시점이었다고 할 만했다.
결국 부처의 말처럼, 카지노 게임 사이트을 만나면 카지노 게임 사이트을 죽여야 한다. 그러나 일단 카지노 게임 사이트을 만나야 죽일 카지노 게임 사이트도 있게 된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을 죽이고 나면, 이제는 나의 길을 가는 것이다. 관건은 카지노 게임 사이트을 만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카지노 게임 사이트을 만나 박살날 준비를 한다는 것은, 동시에 카지노 게임 사이트으로부터 배우고 카지노 게임 사이트을 죽일 준비를 한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그것이 배움을 후회하게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럴 수 있어서 너무나 다행이었다고 믿게 된다.
요즘 아이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치면서, 언젠가 아이가 내가 가르치는 것들을 버릴 때를 가만히 바라본다. 아니, 이미 그런 '버림'은 벌써 시작되었다. 내가 가르친 그림, 놀이, 운동 등을 아이는 벌써 변주하기 시작한다. 나중에는 아빠가 완벽한 존재도 아니었고, 아빠에게 배운 게 전부가 아니었다는 걸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부처의 말대로,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카지노 게임 사이트을 만나면 카지노 게임 사이트을 죽여야 한다. 아이도 그렇게 어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