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진리는 추악하다. 진리에 의해 멸망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예술을 갖는 수밖에 없다.”
니체의 이 말은 단순한 표현이 아니다. 그는 삶의 본질을 직시하고, 인간이 버티기 위해 어떤 위장과 창조를 하는지 예리하게 파고든다.
우리는 종종 진리를 고귀하고 순수한 것이라 여긴다. 그것은 보편타당하며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마치 수학의 공리처럼 움직이지 않는 기준이라 믿는다. 그러나 니체는 이 신념에 의문을 던진다. 진리는 정말 객관적이고 고결한 것인가? 우리가 진리라고 부르는 것은 어쩌면 오랜 은유와 비유, 권력의 반복된 해석이 굳어져 만들어낸 하나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니체는 “진리란 은유, 환유, 인간이 망각을 통해 굳혀버린 착각”이라 했다. 우리가 지금 당연시하는 ‘진리’도 본래는 하나의 표현일 뿐이었고, 인간이 편의를 위해 만든 해석에 불과했다. 반복되고 잊혀진 은유가 곧 사실로 굳어진 것, 그것이 니체가 말한 진리의 정체다.
예를 들어 보자. “정직은 미덕이다”라는 문장은 오랜 세월 윤리의 핵심처럼 여겨졌지만, 현실 속에서 그것이 절대선으로 작동하지 않을 때가 있다.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진실을 숨겨야 할 때, 그 정직은 도덕이 아니라 잔인함이 된다. 이런 상황 앞에서 진리는 도리어 불편하고, 불쾌하고, 인간의 이상을 허물어뜨리는 힘이 된다. 그래서 니체는 진리를 ‘추악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보고 싶지 않은 세계의 이면을 들춰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진리가 악이란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중립적이다. 카지노 게임 감정을 가지지 않기에, 인간의 이상이나 기대와 충돌할 뿐이다. 문제는, 인간이 그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때다.
니체는 묻는다. “당신은 카지노 게임를 감당할 수 있는가?”인간은 카지노 게임를 원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견딜 수 있는 만큼만 받아들이려 한다. 우리가 고결하다고 믿어온 도덕, 종교, 이상은 사실 생존을 위한 방어기제이자 위장이었다는 점을 직시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비극적 인식’ 앞에 선다.
이 지점에서 니체는 예술을 소환한다. 예술은 우리가 이 세계의 고통과 모순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돕는 구원자다. 그는 말한다.“예술은 인식하는 자를 구제한다. 비극적 인식에 사로잡힌 인간을, 예술은 고뇌하는 자를 구원한다.”
삶은 본래 고통이고 모순이다. 그 고통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바로 예술이다. 예술은 삶의 부정이 아니라, 그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기 위한 방식이다. 진리가 삶을 무너뜨릴 때, 예술은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예술은 단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삶 자체의 찬미이며,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의미로 바꾸는 마법이다. 그래서 예술은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 예술은 고통을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 고통을 드러내고, 그것을 통해 인간이 두려움을 넘어서는 힘을 보여준다.
니체는 예술을 이렇게 말한다.“예술은 인생을 부정하려는 모든 의지를 짓누를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그러므로 예술은 진리의 반대가 아니다. 예술은 진리를 견디는 방식이며, 인간이 진리 앞에서 무너지지 않도록 해주는 영혼의 방패다.
진리는 추악하다. 그러나 그 추악함은 인간의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투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불교에서는 이 세 가지를 ‘탐진치’라 부른다. 진리는 그것들을 드러낼 뿐, 그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진리를 통해 우리는 자신을 마주하게 되고, 그 마주함이 예술이라는 형태로 승화될 때 인간은 비로소 자유로워진다.니체는 말한다. 두려움은 축복이라고. 예술은 그 두려움을 전달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삶의 진실이 두렵고 무겁기에, 인간은 예술을 만든 것이다. 예술은 인간이 진리를 감당할 수 있게 해주는 가장 숭고한 방법이다. 진리는 우리를 구성하는 오랜 구습의 삶을 해체한다. 그리고 예술은 그 삶을 다시 조립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진리 앞에 비틀거리지만 무너지지 않고, 다시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