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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서 May 07. 2025

무료 카지노 게임, 실존

실존에 대한 구원으로서의 사랑

실존주의 철학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왜 사랑해야 하는가'를 끈질기게 묻는다. 그래서 가혹하다.

스스로를 '사랑해야하는 이유'와 '사랑하는 이유'는 엄연히 다르다. 대부분 학교에선 윤리의식을 가르치기 위해 전자를 강조한다. 행복한 삶을 위해, 사회에 환대받기 위해 등의 뻔한 윤리의식은 '사랑해야하는 이유'를 제공하지만, 나를 '사랑하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 나를 사랑하는 이유 - 개인의 삶을 돌아봤을 때, 나를 사랑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사유속에서, 혹은 타인의 사랑속에서 제공된다.

실존주의 철학은 우리는 왜 살아야하는가?에 대해 허망한 답을 내놓기 마련이다. 실존에 대해 개인의, 개인만을 위한 삶의 방향성을 그리다 보면 무료 카지노 게임애, 나를 사랑하는 이유에 절대성을 부여하기 힘든 노릇이다. 이런맥락에서 고민이 깊어진다. 나는 나를 왜 사랑하는가? "자신의 실수나 약점을 너그럽게 용서하고,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을 돌보는 것"이라는 자기연민이라는 단어는 대체 어떤 가치를 함축하고 있을까?


무료 카지노 게임 - 타인의 고통에 진심어린 공감 -에는 무고함이 숨겨져있다. 라는 말이 있다. 타인의 고통에 직접적으로 연루된 것이 아닌 무고한 상황이 무료 카지노 게임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해준다는 수진 손탁의 주장이다. 예를 들면,아프리카 기아 문제에 우린 연민의 감정을 느끼지만 이는 보통의 우리가 가난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있기 때문이다. 수진 손탁의 에세이에 나오는 문장을 인용한 이유는, 무료 카지노 게임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는가에 있다. 자신의 고통은 무고함의 극단적 반대에 놓여있다. 남에게 재현이 불가능하며, 자신만이 끌어안을 수 있는 감정이다. 무료 카지노 게임은 어쩌면 모순어법이다. 무고하지 않은 고통을, 자기 자신이 자기에게 연민하듯 감싸는 일. 그건 가능한가?


나는 무료 카지노 게임이 결핍된 편이다. 정확히는 무료 카지노 게임을 믿지 않는다.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사랑해야 하는이유를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계속해 되묻게 되지만, 이내 실패와 좌절로 돌아온다. 보통 건강한 사람이라면 아무 이유 없이 자신을 사랑하겠지만 말이다. 이러한 경험의 이유엔 두 가지 가능성이있을 것이다.

(1) 내가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태에 놓여있다.

(2) 어쩌면, 나를 사랑해야 할 근거는 애초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보통의 경우 자기연민의 부재로 자신을 사랑하는 이유를 근거삼아 산다. 나는 ~를 잘하니까, 나는 어떤 행복속에 놓여있으니까. 같은 피상적인 이유들. 감정을 - 특히 사랑을 분석한다는 사실은 어느정도 정신적 불안을 겪고 있음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하지만, 실존에 대한 불안이 대체 어떤 식으로 해소될 수 있을까. 인간은 누구에게나 무의식속에 죽음이라는 실재가 결핍돼있다. 이에 대해 카뮈, 카프카 같은 실존주의 작가들은 어떤 대답을 내놓을까.




자기연민의 부재는 타인의 사랑을 갈구한다. 스스로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애를 어느 정도 갖춘 이조차 '나는 나를 왜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앞에서는 흔들리게 된다. 이내 무료 카지노 게임의결핍적인 요소가 타인에게로 실존의 무게를 전가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바뀐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현실의 도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인식되는 세계의 채도를 밝히는 일이다.


타인의 사랑은 구원으로 작동한다.


자기연민이 불가능한 이에게 사랑이란, 연애란. 동정이라는 감정적 휴식처를 바라는 일이다.

특히, 연애의 경우에, "유일한 타인 - 연인 "의 존재는 무의미하게 확장되던 세계 속에 '너와 나'라는 무대 장치를 세운다. 또한, 이 때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기에 구원이라 불린다. 영원한 사랑이 불가능하기에 '너와 나'는 당연히 일시적이지만, 연애를 하는 순간에 있어서 만큼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는다는 인상이 자동적으로 촉발된다.(그렇지 못하다면 편집증적인 것이다.) 연애라는 허상은 실존의 안개 속에서 잠시나마 빛을 밝혀주는 등불이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살면서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은 먼 미래의 일이라는 믿음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길거리를 걷다 옥상에서 돌이 떨어져 죽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0%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 믿음에 대해 일반적으로 검증을 거치지 않는다. 사랑또한 마찬가지이다. 연애감정의 특수한 힘이 개인에게 '시간에 영속적인 무대장치-너와 나'라는 이유없는 믿음을 향하게 만든다. 즉, 사랑에 빠지는 순간, 인간은 실존적 불안을 타자의 장에 위탁함으로써 무조건적 신념을 생성한다. 조금 문학스럽게는... 사랑에 빠지면, 우리는 존재에 대한 불안이라는 짐을 애인의 마음 한켠에 내려놓는다.

이러한 연애의 허상은 실존에 대한 고민을, 무료 카지노 게임의 결핍을 잊게한다. 덧없는 구원이지만, 인간은 비합리성에 의지해 살아간다.꼭 덧없음이 잘못된 것인가. 누군가에게 '나'를 온전히 맡길 수 없다면살아가기에 너무 잔인한 세상이다. 연애,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환대속에 우리는 마음 편히 내일을 꿈꿀 수 있다. 결국 사랑이다. 혹은, 사랑의 무대 속에서 우리 모두가 예술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저 멀리 떨어진 프랑스의 라스코 동굴에 우리의 삶을 새기듯, 우리의 실존은 사랑을 통해 예술로서 기능한다. 결국 예술이고,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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