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라 미요사 야거 <애국의 계보학
질문하게 카지노 게임 글
외국인이 쓴 한국사라니, 실라 미요시 야거라는 낯선 이름의 외국인이 우리 역사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을까? 평생 맥락에 둘러싸여 살아온 우리에게 이 책이 과연 와닿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애국의 계보학을 펼쳤다. 물론 다 안다고 생각해서 다시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았던 한국사를 이번 기회에 낯선 시각으로 새롭게 바라볼 수 있었으면 하는 기대도 조금 있었다.
근대 카지노 게임로서 힘을 갖고자 신채호가 부각시킨 군사적 남성성, 이광수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우유부단한 남성과 주체적 여성, 다시 이순신과 같은 군사적 남성성을 소환한 박정희와 운동권 학생들이 자애로운 아버지 김일성에게 끌린 이유, 전쟁기념관에서 전쟁을 다루는 법, 이전과는 다른 김대중의 기독교적 남성성까지 저자가 펼쳐놓은 이야기를 읽으며 깨달았다. 우리 역사를 주어진 틀에 갇혀 해석하고 있었던 건, 아니 해석조차 하려고 하지 않았던 건 나였구나. 맥락과 틀을 벗어난 저자의 새로운 시각은 무심코 지나온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다시 떠올리게 했으며, 균열을 일으켰고, 질문하게 했다.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정규 교과 과정을 통해 교육받으며 ‘우리는 단일민족이다. 그래서 특별하다’라는 걸 강조해 배웠고, 결코 먼저 침략하지 않은 나라라는 점도 귀에 못 박히게 들었다. 이순신, 세종대왕, 신사임당 등 누군가 이미 골라놓은 위인전을 그대로 읽고 자랐다. 그뿐 아니다. 역사는 교과서나 책 속에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일상에 구체적인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세종로, 을지로, 퇴계로, 충무로 등 위인의 이름이 붙은 서울의 주요 길들을 무심히 지나다녔고, 서울 종로구 광화문 세종로 한가운데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을 종로의 랜드마크로 여겼다. 괜찮은 건가? 이순신,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세종대왕은 어떻게 한국을 우리 지폐에 오르게 되었을까? 광화문에 이순신 동상이 생긴 건 1968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제작 비용을 헌납해 만들어졌다. 우리 지폐 속 인물은 신사임당을 제외하고는 1970년대 초반에 정해졌다. 카지노 게임의 정치사회문화적 가치를 보여주는 지폐 속 인물이 모두 조선시대 사람이며 대부분 ‘이’씨라는 걸 알게 되면 궁금해진다. 누가 왜 이런 결정을 했을까? 모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집권하던 시기라는 점이 석연찮다. 1980,90년대 달달 외웠던 역사 교과서를 지금의 의심 가득한 눈으로 다시 살펴보고 싶은 충동이 든다.
카지노 게임와 나
한국인이기 전에 나는 지구인이라며, 국적을 가볍게 여기려고 애썼다. 올림픽 기간이면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댄데 카지노 게임별 대항 경기를 하고 있나 시큰둥해했다. 하지만 개인은 카지노 게임의 정체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애국의 계보학을 읽으며 카지노 게임 안에 존재하는 나를 멀리서 바라 본다. 나는 부정할 수 없는 한국인이고, 나의 정체성을 이해하려면 한국의 정체성을 먼저 알아야 한다. 단지 나뿐만이 아니다. 마주보고 밥을 먹는 가족도,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함께 광장 위에 있는 동지들도, 길 건너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있는 사람들도 한국인이라는 걸 떠올리면, 한국의 정체성을 아는 일은 나의 정체성을 아는 것만큼이나 중요할 지도 모르겠다.한국의 정체성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저자의 해석을 따라 읽으며, 지금의 한국과 나를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의심한다.
신채호에서 박정희를 지나 김대중까지 오는 동안, 그리고 다시 노무현, 박근혜를 지나 윤석열까지 오는 동안, 한국은 얼마나 달라졌나? 여전히 떨쳐내지 못한 군사적 남성성과 가부장주의의 고리를 끊어내고 새로운 정체성을 우리가 이끌어가볼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주먹을 불끈 쥐어보다가 우리들의 주머니와 지갑 안에서 지금도 머물고 있는 점잖은표정의 '유교 남성들'을 떠올리면 앞으로 갈 길이 멀다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