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귀 기울여야 할 담장 밖의 비명을 외면하고 있지 않은가?
※해당 게시물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 줄거리
주인공인 루돌프 회스는 성실한 가장이자 일꾼이다. 그는 독일 장교로서 수용소를 감독한다. 주인공 가족은 수용소 옆 사택에서 평화롭고 안온하게 지낸다. 눈치챈 독자도 있겠지만 이 영화는 나치 독일이 세계대전 중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 홀로코스트를 다루는 영화이다. 하지만 수용소 내부의 학살 장면을 보여 주지는않는다. 대신 주인공의 직업, 등장인물들이 사용하는 아우슈비츠 등의 어휘를 통해 시공간적 배경이 홀로코스트 당시 독일임을 유추할 수 있다. 루돌프의 아내 헤트비히는 유대인들에게서 착취한 물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고, 사택에 딸린 정원을 정성으로 꾸민다. 관객은 소리를 통해 정원을 둘러싼 담장 밖에서 유대인들이 계속학살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인공 가족은 담장 밖에서 끊임없이 들리는 죽음의 소리를 익숙하게 무시한다. 영화는 끝에 '인종 청소'를 거행하던 루돌프가 헛구역질하는 모습과,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기리는 박물관을 청소하는 직원들의 모습을 교차하며 크레딧으로 넘어간다. 크레딧에서 소름 돋게 상행하는 배경 음악이 희생자들의 고통을 표현하는 듯했다.
2. 파고들기
영상에서 잔인한 역사를 다룰 때는 이에 걸맞은 윤리의식이 필요하다. 비인간적인 사건을 윤리적으로 담아내는 데에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 대표적인 홀로코스트 다큐멘터리인 <쇼아(1985)는 비인간적인 재난이 재현 불가능함을 전제로 만들어졌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학살 장면을 보이는 대신, 소리를 통해 고통을 전달한다. 주인공 가족의 사택에는 생활 소음처럼 수용자들이 죽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가혹한 소리와 대비되게 화면은 평온한 가족의 일상을 담고 있다.이 영화는 관객이 타인의 고통을 자극적인 볼거리로 소비하지 못하게 한다.
공간을 나누는 것은 심리적인 구분 짓기와 유관하다. 헤트비히는 담장을 통해 유대인과 유대인이 아닌 사람을 구분 짓고, 방문을 잠금으로써 가정부와 자신을 구분 짓는다. 유대인에게서는 옷을 빼앗고, 빼앗은 옷 중 얇은 속옷들은 가정부에게 주고, 자신은 비싸 보이는 모피 코트를 차지한다. 심지어 그녀에게 유대인 수탈과 학살은 웃으며 말할 수 있는 가벼운 대화 소재가 되기도 한다. 그녀는 전출된 남편을 따라 이사하는 일은 꺼리지만, 카지노 게임들이 수용소로 끌려가는 일에는전혀 마음을 쓰지 않는다.담장 밖 사람에게 조금도 동정하거나 공감하지 않기 때문이다.
3. 질문
이 영화는 정치 이론가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카지노 게임'을 잘 드러낸다. 아렌트는 악의 근원이 평범한 곳에 있다고 주장했다. 주인공 가족은 유대인 및 희생자들에게 악한 의도가 없는 악행을 저질렀다. 루돌프는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으며, 헤비히트는 열심히 살림을 꾸렸고, 자녀들은 학교에 다녀와서 즐겁게 놀았다. 악에는 적극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방조나 외면도 기여한다.개인의 폭력적인 무관심이 모여 참혹한 결과가만들어졌다. 홀로코스트는 인류가 남긴 흑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평범한 독일인들이 유대인 학살을 악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처럼, 나도 자각 없이 악에 기여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마땅히 귀 기울여야 할 담장 밖의 비명을 외면하고 있지 않은가? 구분 짓기를 멈추고, 폭력적인 무관심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