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탈한 영화 <카지노 게임
언제부터인가 극장에 가서 직관한 영화들이 줄줄이 기대 이하여서 제 마음속엔 최근 성공작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넷플릭스 등 안방 ott로 안 보고 극장에 간다는 것은 관람 전에 그만큼 기대가 커서일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제가 직관한 그 영화들은 흥행도 줄줄이 참패를 해 제작사들은 본전도 못 건졌습니다. 외화이든 방화이든 많은 돈과 자원이 투입된 블록버스터로 개봉 이전부터 소문이 무성했던 영화들이었습니다. 관객의 눈은 다 비슷한가 봅니다.
하지만 지난 주말 본 제목도 생소한 영화 <카지노 게임는 웬걸 대성공이었습니다. 사전 지식 없이 번개성으로 가서 본 영화임에도 제 마음속의 대박을 친 것입니다. 예고편 영상을 보자마자 동네 극장에 예매를 해 2시간 후에 가서 본 영화였습니다. 기대이고 자시고 할 틈도 없이 봤다는 것입니다. 단지 주인공으로 에이드리언 브로디가 나오고 러닝타임이 215분이라서 그런 순발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제가 좋아하는 배우이고 그런 영화는 제 경험상 실패한 적이 없었기에 즉흥적으로 예매를 한 것입니다. 영화 <피아니스트와 <오펜하이머가 떠올랐었습니다. 아, <오펜하이머는 위에서 얘기한 극장 직관 영화들 중 제가 성공했다고 생각한 마지막 영화입니다.
<카지노 게임(Brutalist)는 제목의 뜻도 제멋대로 해석하고 가서 본 영화였는데 보면서는 놀랐고 끝나고는 무언가 충만함으로 가득했습니다. 뒤끝이 작렬한 것입니다. 그래서 집에 가자마자<카지노 게임 영화 안팎의 정보나 뉴스에 대해 이것저것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선입견이 작용했던 영화 제목은 그 이전 극장에서 인터미션 시간에 확인을 했습니다. 이런, 제가 생각했던 그 뜻이 아니었습니다. 전문 용어입니다. 일단 무식을 통감하며 그 영화의 나머지 후반부를 감상했습니다. 이 긴 영화엔 친절하게도 중간에 15분의 인터미션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스크린 속에 타이머가 작동해 2부 시작 시간을 정확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영화의 실제 러닝타임은 200분입니다.
<부르탈리스트는 역시나 제 느낌이 그랬듯이 호평 이상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는 검증된 영화입니다. 베니스 영화제에서 은사자상을 수상했고 골든글로브에선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등을 휩쓸었으니까요. 국내 개봉이 좀 늦었고 조용히 개봉을 해서 제가 몰랐던 것이었습니다. 해외에선 지난 9월에 첫 개봉을 했습니다. 1주일 후인 3월 2일에 진행될 아카데미 시상식에선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제가 검색한 <카지노 게임 영화 정보 중에 "아니 그럴 수가!" 한 게 하나 있었습니다. 영화와 관련해서 아무리 찾아도 찾아도 안 나오는 어떤 것이 있어서 그랬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이 글 아래에서 밝히겠습니다.
<카지노 게임는 건축의 한 사조인 브루탈리즘(brutalism)에서 온 용어입니다. 건축 원자재인 콘크리트에 장식이나 포장을 가하지 않고 통째로 있는 그대로를 노출하는 양식입니다. 프랑스어로 노출 콘크리트를 뜻하는 베통 브뤼트(Béton brut)에서 유래한 것으로 베통은 콘크리트를 뜻합니다. 모더니즘 건축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랑스의 르코르뷔지에가 처음 사용해 그의 영향력으로 건축 사조를 가리키는 용어로 굳어졌습니다. 제주도에 있는 본태 미술관과 같은 노출 콘크리트 건물이 브루탈리즘의 건축물이라 하겠습니다. 그것을 건축한 안도 타다오는 브루탈리즘 건축가인 브루탈리스트가 됩니다. 그러니 <카지노 게임란 제목을 보고 지레 야만주의자, 야성주의자라고 해석했던 저는 무식은 했어도 그렇게까지 잘못한 것은 아니었다고 핑계를 댈 수 있을 것입니다. 제겐 과문해 생소할 수밖에 없는 건축 전문 용어이니까요.
에이드리언 브로디가 연기한 <카지노 게임의 주인공 라즐로 토스는 엘리트 건축가입니다. 그는 모더니즘의 산실인 독일의 바우하우스를 졸업했습니다. 매우 크리에이티브한 그가 선호한 건축 양식이 브루탈리즘이었기에 이 영화 제목이 그를 가리키는 <카지노 게임가 된 것입니다. 전도유망했던 라즐로 토스는 나치의 침공으로 시작된 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그의 꿈을 펼치는 것은 고사하고 생사를 걱정하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그의 조국이 침공을 당한 헝가리인 데다가 그는 나치의 제거 대상인 유대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홀로코스트를 겨우 벗어난 그는 내상을 안고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그의 4촌이 필라델피아에서 나름 자리를 잡고 살고 있기에 그랬습니다. 영화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시점부터입니다.
저를 비롯해 에이드리언 브로디를 아는 대부분의 영화팬들은 우선적으로 위에서 언뜻 언급한 영화 <피아니스트를 떠올릴 것입니다. 어스름한 달빛 아래 포격으로 무너진 건물 안에서, 그래도 아직 소리는 살아있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주인공 역의 에이드리언 브로디의 마르고 때 낀 긴 손가락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파리한 얼굴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때 그가 연주한 쇼팽의 <발라드 1번은 그 전쟁의 포성을 전부 다 삼킨 것마냥 은은하고 아름답게 그 공간을 가득 채웠습니다. 스크린 속 관객은 그 피아노 옆의 독일군 대위 1명이었지만 스크린 밖에선 훨씬 더 많은 전 세계의 관객들이 그의 피아노 연주를 감상했습니다. 그 시간만큼은 영화관이 음악당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런 감상적인 측면도 있지만 사실 그 피아노 연주가 가장 의미 있는 것은 그 연주가 그 전쟁터에서 그의 생명을 살린 연주가 됐다는 것입니다. 유일한 관객인 독일군 장교가 그의 생사여탈권을 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사 직전 허기를 달랠 통조림 한 통에서 비롯된 그 연주는 당장의 그를 살렸을 뿐만 아니라 그를 전쟁 끝까지 살아남게 해주었습니다. 그 장교의 보살핌이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전쟁터에서 꽃 핀 예술과 음악의 힘입니다.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에이드리언 브로디가 진짜 피아니스트 이상으로 연기한 주인공 슈필만은 폴란드계 유대인입니다. 그는 진짜 피아니스트였습니다. 실존했던 인물로 <피아니스트는 피아니스트 슈필만의 이야기를 소재로 만든 영화입니다. 역시 또 슈필만처럼 폴란드계 유대인인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연출을 했습니다. 그 역시 어린 시절 홀로코스트 속에서 부모가 희생됐고 겨우 살아남았기에 그 영화를 만들 때엔 깊게 몰입이 되었을 것입니다.
영화 <카지노 게임에서 에이드리언 브로디는 <피아니스트에서의 국적과 직업을 바꾸어 헝가리계 유대인 건축가로 나옵니다. 제가 그렇게 표현을 한 것은 정말 그가 <피아니스트에서 보여준 예술가의 모습을 <카지노 게임에서도 닮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피아니스트에서 살아남은 그가 전후 직업을 바꾸어 건축가로 변신해서 사는 것처럼 말입니다. 게다가 부다페스트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라즐로 토스는 미국에서도 역시 무력의 종류는 다르지만 유사한 억눌림 속에 생활을 하기에 <피아니스트와 <카지노 게임는 전혀 다른 영화임에도 일직선상에 놓여 있는 전편과 후편처럼 보이기도 한 것입니다.
물론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데엔 두 영화에서 주인공 역을 맡은 에이드리언 브로디의 영향이 가장 크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도 유대인입니다. 그것도 부모에게서 폴란드 피와 헝가리 피를 다 물려받았기에 폴란드 피아니스트의 이야기인 <피아니스트와 헝가리 건축가의 이야기인 <카지노 게임가 마치 한 사람의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했나 봅니다. 깡마른 체격에 슬픔과 우수가 배어있는 그의 눈은 역사상 이곳저곳에서 탄압을 받아온 유대인 연기에 그가 최적의 배우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주인공 라즐로 토스가 부다페스트 출신이라는 점에서 역시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부다페스트에 거주하는 유대인의 핍박을 다룬 영화 <글루미 선데이도 <카지노 게임를 보는 중에 잠깐 생각이 났습니다. 그 영화의 자보 레스토랑에도 슬픔과 우수를 지닌 깡마른 피아니스트가 나옵니다.
주인공 라즐로 토스는 미국에 건너가서도 힘든 마이너리티의 생활을 이어갑니다. 하지만 그의 작업물이 호평을 받고 그가 바우하우스 출신의 건축가임이 밝혀지자 그에 대한 대우는 싹 달라집니다. 과연 예나 지금이나 자본주의의 첨단을 달리는 미국입니다. 그래서 그는 거장의 대접을 받으며 어떤 돈 많은 클라이언트로부터 대작을 의뢰받게 됩니다. 이렇게 평탄하게 그의 인생 후반전이 펼쳐질 것만 같지만 역시나 인생은 그에게도 그렇게 생각만큼 만만하게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없던 작품을 선보이기에 그것에 반발하는 건축주의 간섭과 그의 아픈 가정사가 겹쳐지며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그의 건축물은 멋지게 보란 듯이 완성이 되고 가정 문제도 정리가 됩니다. 해피엔딩입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도 이 영화 <카지노 게임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건축가에겐 그에게 건축을 의뢰하는 건축주가 있어야 합니다. 그가 돈이 무지하게 많음 모를까 매일 본인의 건축물만을 설계하고 지을 수는 없기에 그렇습니다. 그런 건축가는 건축주를 잘 만나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좋은 건축물이 나올 테니까요. 세상에서 가장 좋은 건축주는 건축가와 계약이 합의되는 순간부터는 그 건축 작업에 개입하지 않는 건축주입니다. 그가 모르고 할 수 없는 건축 분야에 전문가인 건축가에게 의뢰를 했으니 그가 건축가가 제시한 시안을 좋다고 합의하는 순간부터는 건축가에게 일체 모든 것을 맡기는 건축주입니다. 이것은 건축업뿐만이 아니라 갑을이나 AB 관계로 계약서를 쓰고 작업을 진행하는 세상의 모든 전문가 그룹과 클라이언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입니다. 당장 제가 종사해온 광고업계만 보더라도 클라이언트인광고주와 에이전시인 광고인은 그런 계약 관계로 일이 진행될 때 가장 좋은 결과물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서울 장충동엔 웰콤시티라는 건물이 있습니다. 그 건물은 2000년에 완공이 됐는데 하부의 노출 콘크리트 구조물이 상부의 녹슨 철판으로 둘러싸인 네 개의 동을 떠받들고 있는 예술성이 뛰어난 건축물입니다. 제가 그 건물을 언급하는 것은 웰콤시티가 전형적인 브루탈리즘 양식이기도 하거니와 그 건물이 세워졌을 때 읽은 아티클이 방금 떠올라서입니다. 그 건물을 건축한 승효상 건축가는 그 글에서 본인이 그때까지 만난 건축주들 중 가장 이상적인 건축주가 그 웰콤시티를 의뢰한 광고대행사 웰콤의 박우덕 사장이라고 치켜세웠습니다. 이유는 그 건물이 올라가는 동안 그가 전혀 간섭을 안 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중간중간 중도금만을 치렀겠지요.
다시 영화로 돌아가면 <카지노 게임엔 그렇지 못한 건축주가 나옵니다. 그는 건축가인 라즐로 토스를 위대하다고 인정하고 한없이 추켜세우지만 그 시대 미국에서 볼 수 없는 브루탈리즘에 입각한 건축물이 올라가면서 사사건건 개입하고 계약 시 없던 컨디션을 추가합니다. 결국 그는 라즐리 토스에게 해서는 안 될 몹쓸 짓까지 하며 사욕을 채우기도 합니다. 브루탈한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그래도 건축가인 라즐로 토스는 그가 시작한 작품의 완성을 위해 그에게 끌려가곤 합니다. 그것은 바르지 못한 건축주를 만난 건축가의 숙명일 것입니다. 슬로우하고 조용한 라즐로 토스와는 달리 다혈질에 불도저처럼 강한 추진력의 마초 스타일인 건축주는 펜실베니아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밴 뷰런이라는 부호입니다. 명배우인 가이 피어스가 딱 맞아보이는 그 배역을 맡았습니다. 이렇듯 <카지노 게임는 프로타고니스트인 에이드리언 브로디와 안타고니스트인 가이 피어스와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건축 이야기가 메인인 영화입니다. 물론 그들의 명연기는 서브 이상입니다.
이제 위에서 언급한 "아니 그럴 수가!"가 무엇인지 밝히겠습니다.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온 저는 가장 먼저 주인공인 라즐로 토스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바우하우스를 나와 엄혹한 시절을 보냈지만 20세기의 위대한 건축가로 우뚝 선 그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를 모르고 살아온 저의 무식을 탓하면서 말입니다. 브루탈리즘과 브루탈리스트의 뜻을 제대로 몰랐던 무식과 함께 말입니다.
구글을 열었습니다. 라즐로 토스(László Tóth), 그 이름이 나왔습니다. 역시나 영화처럼 헝가리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건축가가 아니고 지질학자로 나왔습니다. 게다가 그가 검색에 뜰 정도로 알려진 이유는 지질학에서의 업적이 아니었습니다. 1972년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미켈란젤로의 조각상인 <피에타를 때려 부순 인물로 나오는 것입니다. 사진까지 친절하게 말입니다. 그는 성모 마리아 부분을 망치로 가격해 그녀의 팔을 부러트리고 코와 눈썹을 손상시켰습니다. 본인이 예수라고 주장하며 예수는 영원하기에 엄마가 있을 수 없어 하느님의 계시로 그렇게 한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라즐로 토스는 정신병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당시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지하에 있는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기가 차해할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아.. 영화 <카지노 게임의 라즐로 토스는 실존 인물이 아닌 것입니다. 연출자가 만든 허구의 인물인 것입니다. 같은 에이드리언 브로디가 연기했으나 위에서 비교해온 영화 <피아니스트의 슈필만과는 출발이 달랐던 유대인인 것이었습니다. 허탈했습니다. 감독에게 감쪽 같이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카지노 게임를 연출한 브래디 코베는 1988년생의 신세대 감독입니다. 그는 이 영화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역대 최연소로 감독상을 수상했습니다. 그가 수상한 은사자상이 감독상입니다. 그에게 허를 찔렸고 한방 맞았습니다.
영화에서 라즐로 토스가 필사적으로 세운 필라델피아 근교의 그 크고 멋진 건축물이 상상 속 건물이라니요? 시간을 건너뛰어 1980년 제1회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에서의 수상과 그를 오마주하는 회고전도 말입니다. 브래디 코베 감독이 이런 저를 보면 매우 재미있어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와 같은 관객은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 세계 도처에 또 많이 있을 것입니다. <카지노 게임에서 건축주인 가이 피어스만큼이나 브루탈한 감독입니다. 이제 전 그 감독의 이름은 계속해서 기억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는 왜 하필이면 주인공 이름을 라즐로 토스로 작명했을까요? 세우는 건축에 반대되는 부수는 반달리즘(vandalism)의 대명사라 그렇게 역설적으로 정했으려나요? 때마침 그도 헝가리안이니 말입니다.
https://youtu.be/dD5EOOxVlYc?si=qQR6waVrS9mVWis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