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연애의 시작
2019년 초, 나를 만난 그의 첫 번째 한국여행이 끝나고 얼마 뒤, 그는 나를 만나기 위해 다시 한국에 왔다. 내 얼굴을 잘 쳐다보지 못하고 힐끔대는 그가 귀여웠다. 어쩌면 다행이었다. 그가 테이블을 보면서 말하는 덕분에 나는 그의 얼굴을 실컷 구경할 수 있었다. 이틀의짧은 만남을 끝으로 그는 알바를 하러 돌아갔다.
그가 공항에서 나에게 말했다. "다음 주에도 알바가 없는 주말에 널 보러 올게." 하지만 이제 방학은 끝나갔다.
"다다음주에 학교 개강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러자 그가 괜찮다며 개강 준비에 크게 필요한게 없다고 말했다. 나는 그때 어떤 용기가 솟았는지 고민도 없이 순간적으로 말했다.
"이번엔 내가 대만으로 갈게!"
그가 눈이 동그래져 정말이냐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하며 그를 보냈고 그날 바로 비행기표를 끊었다.
일주일 뒤, 아직 대화도 어색한 남자를 만나러 대만에 가는 길에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나 혼자 대만에 간다고 했을 때 친구들의 반응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다. 나는 그간의 일을 말하며 그가 얼마나 귀엽고 순수해 보였는지, 이 만남이 얼마나 운명 같았는지에 대해 말했다. 하지만 친구들의 최대 관심은 하나였다.
"그 남자, 안전한 남자인 건 확실한거야?"
나는 이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응? 그건 잘 모르지..."
비행기를 타는 내내 친구들의 '장기를 조심해라!' 라는 이야기가 머릿속에 가득했다. 하지만 출국장에서 꽃다발을 들고 수줍게 서있는 그를 보니 그런 생각은 더이상 머리에 남아있지 않았다.
우리는 타이페이로 넘어가지 않고 타오위안에서 2박 3일을 보내기로 했었다.
"타오위안 공항에서 타이페이로 이동해도 되긴 하는데... 그냥 타오위안시에서 노는건 어때? 타오위안도 큰 도시고 그곳에 내 친척들이 많이 살아서 맛집도 데려갈 수 있어."
나는 일주일 전 이미 그에게 그러자고 했었다. 그런데 숙소로 짐을 옮기러 가는 길에 그가 좀 마음에 걸렸는지 머쓱해하며 말했다.
"타이페이 관광을 못 시켜주는 거 미안해. 그렇지만 이동 시간 없이 감자랑 오래 놀고 싶어서..."
나를 잘 쳐다보지도 못하면서 마음 표현은 솔직하게 하는 그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가 첫날 데려갔던 식당이나 보여준 타오위안의 세련된 거리에 대해서는 잘 기억이 안 난다. 온 신경이 그에게 가있었다. 그런데 길을 구경하며 한 가지 신기했던 건 있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는 것이었다.
차만큼이나 많은 수로 길을 쓸고 다니는 오토바이에 내가 감탄하자 그가 말했다.
"대만은 출퇴근 시간에는 오토바이가 더 많아. 대중교통보다도 오토바이를 더 많이 이용하거든."
"그런데 너는 버스 타고 다닌다고 하지 않았어?"
"타이페이는 대중교통이 편해서 나는 버스를 타. 하지만 누나와 형 둘 다 오토바이가 있어서 내가 빌려서 타고 다닐 때도 많아."
내가 그에게 오토바이를 한 번도 타본 적이 없다고 말하니 그는 오토바이를 타보고 싶냐 물었다. 내가 매우 타보고 싶다고 하자 그는 그럼 다음번에는 오토바이로 타이페이를 돌아보자고 했다. 그리고 밤늦게 나를 숙소에 바래다주고 친척집으로 돌아간 그에게 연락이 왔다.
"사촌형이 내일 오토바이를 빌려줄 수 있대. 혹시 오토바이 타보고 싶어?"
나는 바로 그렇다는 답장을 했다. 잠에 들기 전 다음날을 상상했다. 그의 뒤에 타서 같이 오토바이로 여기저기 구경 다니는 상상...
생각만 해도 설렜다.
다음 날, 그는 정말로 오토바이를 끌고 와 헬멧을 들고 서 있었다. 빨리 타고 싶었지만 전날 아침 식당에서 식사를 하기로 약속했기에 우리는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식사를 하던 중, 그에게 사촌형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자신의 오토바이 뒷자리가 높아서 내가 무서울 수도 있으니, 동업자의 오토바이를 대신 빌려주겠다는 얘기였다. 잠시 후, 동업자분이 직접 오토바이를 타고 식당 앞으로 와 주었다. 그때 한번 대만 사람들의 친절함에 반했다.
오토바이를 타기 전 그는 겨울엔 손이 춥다며 나에게 장갑도 껴주고 목도리도 둘러줬다. 정작 나는 아무 걱정이 없었는데 그가 자꾸 나를 안심시켰다.
"너무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천천히 달릴 거고 커브도 안 무섭게 돌 거야. 알겠지?"
"응! 빨리 가자!"
그의 뒷자리에 앉으니 그가 나를 돌아보며 자기를 좀 잡아야 될 거라고 말했다. 그의 옷을 살짝 잡았다. 그때는 손도 아직 안 잡았을 때라 그의 몸을 덥석 잡기가 조금 그랬다.
"옷 잡으면 되는 거지?" 그러자 그가 말했다.
"응. 그런데 달리다가 무서우면..." 그러더니 자기 배 쪽을 팡팡 쳤다. "여기 잡아도 돼."
팔로 감싸도 된다는 뜻이었을까? 그래도 조금 쑥스러워서 그의 외투를 살짝 잡았다. 그가 준비됐냐고 물었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바로 출발했다. 그런데 막상 출발하자마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생각보다 훨씬 무서웠다. 옆에서 볼 때는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는데 실제로 타보니 얘기가 달랐다. 가슴이 뛴 건 설레서가 아니라 정말 추락할 것 같아서였다. 양손으로 그의 옷을 꼭 잡고 어떻게든 버텨보려 애썼다. 5분도 안 되는 첫 탑승은 기대했던 낭만보다는 공포에 가까웠다.
그가 내려서 어떠냐고 물었을 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잘 탔다고 말했다. 하지만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바깥 풍경을 바라보다 보니, 자꾸 오토바이에 둘이 탄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뒷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대부분 운전자에게 몸을 바짝 붙이고 양팔로 꼭 끌어안고 있었다. 아까 우리 모습과는 꽤 달라 보였다.
원래 저렇게 타는 게 맞는 걸까? 내가 괜히 목숨을 걸고 탄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꼭 연인 사이만 그런 건 아니었다. 남자 두 명이 탄 오토바이도 있었고, 뒷자리에 앉은 사람은 앞사람을 단단히 끌어안은 채 턱을 어깨 위에 걸치고 있었다. 신호를 기다리는 그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그제야 알았다. 세상에나... 원래 저렇게 타야 되는건데 내가 목숨을 내놓고 탔구나!
다음날 나는 그를 만나자 마자 물었다.
"오토바이 타고 정말 허리 감싸도 돼?"
"응!"
"꽉 잡아도 돼?"
"응!"
나는 그의 뒷자리에 타자마자 바로 몸을 밀착하고 그의 허리를 꼭 안았다. 양손으로 깍지를 야무지게 꼈다. 설렘이고 뭐고 추락하지 않는게 먼저였다. 다음 행선지는 좀 먼 곳이라 10분이 넘게 걸렸다. 그에게 딱 붙은 자세로 몇 분 타니 조금 여유가 생겼다. 나는 신호대기 중간중간 거울로 그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거울 속에서 눈을 마주친 그가 또 눈을 피했다.
귀엽당...
좀 타니 금방 적응이 됐다. 계속 긴장하며 깍지를 꽉 끼고 있던 손에 힘을 빼고 허리를 감싸던 그 자세로 깍지를 풀고 손을 턱 내려놓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내 손을 끌어올려서 아까처럼 허리에 감쌌다. 이거는 위험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그냥 내가 끌어안는 게 좋은 걸까? 두려움이 가시자 갑자기 이렇게 안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창피하면서도 묘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는 내가 손에 힘을뺄때마다 자꾸 내 팔을 끌어올렸다.
나는 그에게 오토바이가 재밌다고 또 타고 싶다고 말했고 그는 나를 데리고 오래도록 한적한 길을 찾아 쭉 돌아주었다. 무서운 게 사라지니 그의 등에 매미처럼 찰싹 붙어서 같이 달리고 있는 그 순간이 너무 설렜다.
그와 저녁을 먹고 걸으며 얘기를 하는데 그가 자꾸 입을 달싹 거리며 머뭇거렸다. 내가 할말이 뭐냐고 편하게 말하라고 하니 말을 꺼냈다.
"사실... 대만에선 연인 사이가 아니면 뒷자리에서 절대 껴안지 않아."
"정말?"
"응."
"그럼 무서운데 어떻게 타?"
"대만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뒷자리에 타기 때문에 무섭지 않아. 친구사이면 터치하지 않고 그냥 두 손 놓고 가거나 너무 빨리 달리면 의자 뒤쪽에 손잡이를 잡고 가. 터치하면 선을 넘는거야."
그렇구나. 하지만 나는 그게 손잡이인지도 몰랐다. 조금 부끄러워져서 그에게 '내가 너무 찰싹 달라붙었지?' 하고 묻자
그가 비장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감자가 뒷자리에서 날 껴안았잖아. 그건 감자는 나에게 친구는 아니라는 거야. 뒷자리에서 나를 껴안은 여자는 감자가 처음이야. 그리고 나한테는 그 의미가 커."
응? 목숨 지키려고 그런건데...
나는 그의 말이 무료 카지노 게임인지 아닌지 헷갈렸다. 지금 같으면 그럼 우리가 이제 사귀는 사이냐고 물어봤을텐데 왜인지 그때는 물어볼 용기가 없었다. 어색하게 웃고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하다가 다시 헤어질 깊은 밤이 되었고 그는 나를 숙소에 데려다줬다. 숙소에 가는 길, 내가 몇 번 더 손에 힘이 빠지니 그는 다시 내 손을 끌어올려서 자기 배에 찰싹 붙였다.
꽉 껴안는 게 연인이 되는 거라면... 지금 내 손을 끌어올리는 건 나에게 확답을 주는 건가? 나는 그의 등에 붙어서 숙소로 돌아가는 내내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우리가 사귀는 사이냐고 물어볼까 말까 고민했다.
그리고 나는 숙소 앞에 내려서 그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한 질문을 던졌다.
"아까 같이 오토바이 탔을 때... 내가 좀 느슨하게 껴안으면 손 다시 끌어올렸잖아. 그거 왜 그런 거야?"
난 그때까지만 해도 그의 입에서 우리의 관계를 확실하게 할 수 있는 말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생뚱맞은 이야기를 했다.
"사실 그때 감자 손이 자꾸 내 어딘가에 닿아서... 손을 올린 거야."
네? 이게 무슨 소리람.
"감자가 팔에 힘을 빼니깐 장갑 낀 감자 손이 내 어디에 닿아서 올렸어."
잠깐 머리에서 버퍼링이 걸렸다. 네가 말하는 그 'down there'이 내가 생각하는 그곳...? 그는 그런 어마어마한 말을 하면서도 부끄럽다는듯이 수줍어 하고 있었다.
너 왜 그런 말을 하면서 그렇게 수줍게 웃는 거니... 나는 그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얘는 변태일까 아니면 바보일까? 아무래도 바보 쪽인 거 같긴 한데...
그와 헤어지고 침대에 누워 다음날 출국을 위해 자야 하는데 잠을 설쳤다. 오늘 내가 그를 껴안았으니 우리는 연인이 됐다는 뜻일까? 그것보다.. 얘 진짜 바보 맞겠지?!
그렇게 나는 확실하게 관계를 정립하지 못하고 대만을 떠났고 그는 또 한국에 몇번을 왔다. 우리는 얼마 뒤 손을 잡고 포옹을 하며 얼렁뚱땅 연인이 되었고 나는 그의 꾸준한 한국 방문과 그런 스킨쉽을 함으로써 그와 연인이 된거구나 혼자 생각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 어느 날, 그가 우리의 100일이 다가온다는 이야기를 했다. 100일? 1일은 언제였는데?
"그때 타오위안에서 내가 무료 카지노 게임했잖아."
"언제?"
"오토바이 탄 날 내가 감자한테 무료 카지노 게임했잖아. 내 뒤에 탄 여자는 너뿐이라고."
설마 네가 내가 네 고추 만졌다고 한 그날...?
나는 황당해서 물었다.
"누가 무료 카지노 게임을 그런 식으로 해..."
그러자 그가 서운해하며 나에게 자신의 무료 카지노 게임이 싫었냐고 물었다.
"그게 아니라, 너 그날 내가 너 만졌다고 했잖아 이 변태야!"
"나는 그건 하나도 안 중요했어. 그전에 내가 무료 카지노 게임한 게 중요하지!"
그리고 그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굳이 따지면 변태는 감자지. 그건 감자손이였는걸..."
나에게 설렘과 황당함을 함께 안겨줬던 그날은 우리의 1일이 되었다. 몇 년 후 시간이 흐르자 그는 그날을 떠올리며 말했다."나 그때 미친놈이었네..."
그걸 이제야 알았니...
마지막화는 마냥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로 쓰고 싶었는데 사실이 그렇지 않아 글의 내용이 이렇게 되어버렸습니다...ㅎㅎ 브런치의 끝이라 시작할 때를 써보고 싶었어요.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글을 써본 건 브런치 연재가 처음이었는데요, 연애이야기와 도시락 이야기가 이리저리 섞인 정체불명의 글을 읽어주시고 응원해 주신 독자분들 덕분에 신이 났었어요. 덕분에 연재 전날부터 즐겁게 글을 썼던 4개월이었습니다.
또 마침 이제 조금 바빠져서요. 앞으로는 브런치의 독자로 돌아가겠지만 다음에 또 연재를 하게 된다면 그때 재밌는 글로 돌아올게요!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