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173) 《빛나는 여백: 한국 근현대 여성 미술가들》
다사다난했던 근현대사를 살아간 한국 여성 미술가 11명의 작품을 통해 ‘주체로서의 여성 예술가’의 면모를 살펴보고 20세기 한국 한국미술의 다양한 양상을 탐구하는 기획전 《빛나는 여백: 한국 근현대 여성 미술가들》이 4월 6일(일)까지 대전 이응노미술관에서 열린다. 미술관이 제시한 전시 취지는 다음과 같다.
“전시는 남성 중심적 사고로 인해 제대로 평가받을 기회가 적었던 여성 예술가들을‘다층적 정체성을 가진 주체’로서 재조명하며,미처 발굴되지 못한 여성 미술과 여성 예술가들의‘여백’이 동시대와 공명하며‘빛나고’있다는 점을 드러내고자 기획되었다.아울러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만연한 한국 근현대의 공간 속에서 여성의 예술적 경험을 드러내며,근대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작품에 주목한다.우리는 이 작품들을 통해 더 넓은 범주의 존재를 포용하고 연결할 수 있는 세계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 미술가 11명은 금동원, 김순련, 김윤신, 나혜석, 나희균, 문은희, 박래현, 박인경, 심경자, 천경자, 최성숙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고암 이응노와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었다는 점이다. 부인도 있고, 예술적 도반도 있고, 제자도 있다. 멀리 대전까지 가서 굳이 전시를 본 까닭은 고암의 제자였던 금동원의 작품을 보기 위해서였다. 전시장에 나온 금동원의 그림은 <강원도 오대산 근처(1970년대), <카지노 게임풍경(1948), <세검정(1985) 석 점이다. 내 관심은 세검정 그림이다.
남전 금동원(藍田 琴東媛, 1927-)은 이화여대에서 청강 김영기 화백에게 그림을 배웠다. 청강은 해강 김규진의 아들로, 중국화의 거장 치바이스를 사사했다. 금동원이 서울 남산에 있는 고암 이응노의 고암화숙을 찾아간 것은 1947년 초여름이었다. 이 무렵 함께 고암화숙을 드나들던 박인경은 훗날 고암의 반려자가 됐다. 1948년 작 <카지노 게임풍경은 금동원이 고암화숙에서 배우던 시기에 그린 것으로, 금동원은 당시 상황을 「고암화숙(顧菴畵塾)과 나」라는 글에 적었다.
“하루는 선생님과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선생과 제자들5명 다 같이 세검정 능금밭에 스케치하러 가서 모두 열심히 풍경을 그려왔는데 선생님과 청전 선생님께서 금동원 것이 제일 좋다고 하시면서 그해 학생 그림 전시에 출품하여 상을 탔던 일인데,그것은 해방 직후 처음으로 조선서화동연회 주최에서 이왕가상(李王家賞)이었다.그때 얼마나 흐뭇하게 기뻤는지 그 작품은<카지노 게임풍경1948년으로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이경성 관장 때에 수장(收藏)으로 기증하였다.”
세검정은 일제강점기인 1941년에 화재로 소실됐다가 1976년에 현재 모습으로 다시 지어졌다. 금동원의 그림에 정자가 보이지 않는 이유다. 당시엔 세검정이란 이름만 남아 있었던 셈. 계곡을 따라 다닥다닥 붙은 초가집과 판잣집이 보인다.
옆에 <세검정이란 제목이 붙은 그림이 또 한 점 걸렸다. 1985년 세검정 일대 풍경을 제법 큰 화면에 다시 그린 것이다. 1980년대 중반까지도 세검정 계곡 일대에는 저렇게 군데군데 초가집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 작품은 화가가 2005년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한 작품 12점 가운데 하나다. 2019년에 국립민속박물관 기증 작품 12점을 수록한 한국 초가 풍경 화집을 김달진미술연구소가 발간했다. 책을 구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