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청
올해처럼 암울한 연말은 내 시계 인생 가운데 처음이었다. 세상은 안팎으로 소란했고 캄캄했으며 그래서 사람들은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작업실도 예외는 아니었다. 꼭 세상 탓이라고 볼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 영향을 배제할 수도 없었다.
율은 작업실을 당분간 나오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젠은 입양한 강아지 때문에 집을 비우기가 어렵다며 정신을 못 차렸다. 수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그나마 만들던 연을 만들지 않았다.
“율은 왜 그래? 지가 작업실에 안 나온다고 찌그러진 세상이 펴진대? 이럴 때일수록 각자의 일을 해야 하는 거 아냐? 내가 너무 꼰대같이 말했나?”
싱이 얼굴을 찡그리며 카지노 쿠폰에게 물었다.
“응.”
아무런 망설임도 없는 카지노 쿠폰의 대답에 싱이 입을 씰룩거렸다. 뭐야?
“율이 우리보단 국가에 관심이 많지. 젊어서 그런가. 하여튼 그것도 율의 선택이니까 일단 기다려 봐야지 뭐. 언제고 다시 오겠지.”
카지노 쿠폰의 표정은 전혀 미동이 없었다.
“그렇긴 하지. 그런데 뭐랄까 맥이 빠진다고 할까? 자꾸 마음이 적막해지는 거 같아.”
싱의 소리는 평소와 달리 에너지가 실리지 않았다. 그런 싱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카지노 쿠폰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도 그래.
사실 작업실은 평소에도 두세 사람 정도가 모였고 코로나 때에는 거의 개점휴업 상태였었지만 이런 얘기가 오고 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마음이 무거웠다. 이 사람들이 드디어 흩어지려는가.
그래도 싱과 카지노 쿠폰은 마음을 다잡고 물감을 짜기 시작했다. 낡은 라디오도 코드를 꽂아서 음악이 흐르게 했고 붉은 열을 내는 전기스토브에도 스위치를 넣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싱이 일어나 기지개를 켜며 커피를 한 잔 하자고 할 때 문이 벌컥 열렸다.
“이걸 줘야 되는데 사람들이 있어야 말이지. 택배로 왔어.”
주인 할머니가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함께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할머니는 여전히 기운이 넘쳐서 팔십 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카지노 쿠폰이 서류봉투를 받아 들었지만 할머니는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초대장인데? 팸플릿도 몇 개 있고. 이게 뭐지?”
카지노 쿠폰이 꺼낸 것은 강목수의 전시회 팸플릿이었다.
“목수 이름이 강 수인가 봐? 전시명이 ‘강 수와 나무’야.”
카지노 쿠폰과 싱이 팸플릿을 열자 할머니는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같이 들여다보았다.
“귀인이네. 어떻게 나무로 이런 걸 만드누?”
할머니의 소리가 둘의 귓가를 때렸다. 귀인?
팸플릿에 소개된 작품은 나무로 만든 의자와 다탁, 그리고 세워둘 수 있는 커다란 조형물이었다. 그런데 의자고 탁자고 통나무를 도려내어 만든 듯 이음새가 안 보였고, 그럼에도 투박하지 않았다. 마치 플라스틱이나 주물로 만든 조형물처럼 섬세하고 경쾌했다. 그러면서 깊었다. 나무의 나이처럼.
“할머니 보시기에 좋아 보이나 봐요. 나무로 어떻게 이렇게 만들죠? 아, 여기 시계도 있네요. 우리 것보다 훨씬 길고 우아한데요?”
시계란 말에 난 눈이 확 뜨이는 기분이었다. 목수가 시계를 또 만들었구나. 나와는 다른 시계를 만들었는데 훨씬 우아하다는 것이군. 하긴 나는 정사각형이니 우아하다기보다는 규모 있게 정갈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
“저 시계는 못난이야.”
할머니가 나를 흘깃 올려다보며 한 말에 난 처음 할머니를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퍼그를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그때도 할머니는 나를 못 마땅해했다.
“나무를 이렇게 만지는 이가 또 있었네. 아유, 대단해.”
할머니는 팸플릿을 넘기며 연신 감탄을 했다. 싱과 카지노 쿠폰이 어안이 벙벙한 상태가 되었다.
“할머니, 혹시 이 사람 아세요?”
표지 안 쪽에 있는 강목수의 사진을 보여주며 싱이 물었다.
“몰러. 이 사람은 젊은이구먼.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이런 사람이 있었는데 죽었어. 벌써 30년 전에.”
카지노 쿠폰과 싱은 서로를 바라보며 신기하다는 눈빛만 교환했다.팸플릿은 마치 할머니에게 배달된 듯 할머니는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아무래도 한 권 드려야 될 모양이야. 카지노 쿠폰이 한 권을 챙겨서 할머니에게 건네자 그때서야 할머니는 일어섰다. 커피라도 한 잔 하고 가시죠. 싱이 인사로 한 말에 할머니는 다시 주저앉아서 커피를 다 마시고도 한참을 있다가 흡족한 표정으로 나갔다.
할머니가 힘겹게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나이는 어쩔 수 없나 봐. 그렇게 기운이 넘쳐 보이는데도 계단은 힘드시네. 카지노 쿠폰이 중얼거리며 팸플릿을 넘기는데 봉투에서 엽서가 툭 떨어졌다.
<강목수입니다. 제가 오랜만에 전시회를 갖습니다. 선생님들 덕분에 용기를 내 보았습니다. 그러나 못 오실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팸플릿 동봉합니다. 바라기는 선생님들의 좋은 그림과 후속 전시를 기대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천천히 읽어 내려가는 카지노 쿠폰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후속 전시라.
“내년 1월 중순이네. 인사동. 우리가 했던 갤러리 옆인데. 상당히 인정받은 작가인 모양이야. 그 갤러리 아무한테나 대여해 주지 않잖아?”
카지노 쿠폰은 여전히 엽서에서 눈을 떼지 않고 앞뒤로 훑으며 중얼거렸다.
“뭐가 그래. 요즘 같은 불경기엔 대여해 달라는 게 땡큐지. 하여튼 대단하긴 하네. 우리는 코로나 전에 한 게 끝이었는데. 마치 우리를 독려하는 듯한 느낌이지 않아? 뭐 하고 있느냐는 거지. 게으름 피우지 말고 열심히 하라고 하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싱의 소리는 여전히 힘이 없었다.
“글쎄, 우리가 다시 전시를 할 수 있을까? 난 자신이 안 생겨. 아니, 하고 싶지 않다는 게 맞는 것 같아.”
싱이 다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한숨을 섞어 말했다.
“왜 하고 싶지 않을까?”
카지노 쿠폰이 팸플릿과 엽서를 정리해서 봉투에 넣고 물었다. 왜 그렇다고 생각해?
“우리가 그림을 그린다고 모였잖아. 그 세월이 삼십여 년이고. 그런데 몇 년 전 밍이 했던 말이 생각나. 우리의 정체성이 뭐냐고 물었었지. 밍과 참이 그림 작업에 방점을 찍고 달려오던 사람인 반면 우리는 관계에 방점이 있었다고 봐. 그런데 그 관계가 이젠 희미해지고 여기저기 끊어졌다는 느낌이 드니까.”
싱의 말은 가끔 끊어졌다. 식은 커피를 조금씩 마시느라.
평소의 싱답지 않게 걸쭉하게 식은 믹스커피를 마시는 싱이 안쓰러웠다.
“커피 다시 타줄까?”
카지노 쿠폰이 일어나며 싱의 어깨를 두드렸다.
“카지노 쿠폰은 어떻게 생각해? 우리가 전시를 할 만한 역량이 남아 있다고 봐?”
카지노 쿠폰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싱이 물었다. 이제 싱의 컵은 비어 있었다.
“강목수가 우리를 북돋우느라 하는 말인 것 같지만, 나 역시 어떤 자신은 없어. 우리 작업이 너무 느슨해지기도 한 것은 사실이니까. 모이기도 힘들잖아. 현재는.”
카지노 쿠폰은 말을 던져놓고 커피포트에 전기를 넣으러 사무실로 갔다. 싱은 혼자 덩그마니 앉은 채 둘러 세워진 이젤을 돌아보았다. 작업한 지 오래된 율의 캔버스엔 먼지가 앉았고, 젠의 커다란 캔버스는 잘게 간 금들이 여기저기 드러났다. 수의 이젤은 흰 아사면 캔버스만 얹힌 상태로 역시 먼지 속에 있었다. 싱은 일어나 출입문을 열고 극세사 떨이개로 먼지 쌓인 캔버스를 훑어나갔다. 몇 번을 밖으로 나가 떨이개의 먼지를 털어내곤 다시 캔버스를 훑었다. 마치 아이 세수를 씻기는 엄마처럼 부드럽게 섬세하게.
“우리 강목수 전시회 가 보자. 다들 연락은 해 보고 오는 사람 오고 , 못 오는 사람은 못 오더라도. 강목수가 우리 전시회에 그렇게 열심히 와 줬던 기억이 있는데 인사로라도 다녀와야 할 것 같아.”
더운 커피를 다시 만들어온 카지노 쿠폰이 싱에게 컵을 건네며 말했다. 싱은 떨이개를 아직 손에 든 채로 컵을 받았다. 아, 좋다. 따뜻해. 부드럽고.
“잠깐만, 이 팸플릿을 우리 작업실 벽면에 붙여 놓자고. 밖에서도 볼 수 있게 유리창에도 붙이고.”
카지노 쿠폰의 제안에 싱이 좋은 생각이라며 스카치테이프를 챙겼다.
두 사람은 마시던 커피잔을 내려놓고 팸플릿을 분해해서 여러 장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유리창과 작업실 내부에 보기 좋게 붙였다. 마치 이곳에서 목수의 전시회가 열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목수가 좋아하겠네. 나도 공연히 흥분되며 기분이 좋아졌다.
벽에 붙여진 팸플릿을 보는데 한 작품이 눈에 확 들어왔다.
분명히 은혜와 산이의 모습을 한 조각이었다. 물론 확실하게 그 얼굴을 드러낸 것은 아니지만 난 직감으로 알아차렸다. 모자의 모습이구나. 작품의 제목을 보니 <봄날이었다.
갑자기 은혜와 산이가 보고 싶어졌다. 그들은 잘 지내고 있겠지. 은혜의 엄마는 여전히 소식이 없는 것일까. 그런데 은혜와 산이의 모습이라고 생각되었던 조각은 어떻게 보면 은혜의 엄마인 미선이와 어린 은혜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했다. 난 미선을 본 적이 없지만 본 것처럼 알 수 있었다. 예술이란 대단한 것이야.
“이 작품 참 좋다. 우리가 목수를 너무 함부로 대한 느낌이 있어. 엄청난 예술적 포스가 느껴지지 않아? 제목이 봄날이야.”
카지노 쿠폰도 내가 본 작품의 사진을 본 모양이었다. 싱이 그래? 하며 고개를 돌렸다.
“대상은 사람인데, 그것도 엄마와 아이인데 작가가 봄날이라고 이름 붙인 것인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겠지? 그래서 그런가? 하여튼 그런 따스함과 생명력이 보여. 강목수가 대단하게 생각되네.”
싱의 이야기에 카지노 쿠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시계도 강목수 작품 아냐? 우리가 대가를 몰라보고 시계를 그냥 시계로 대했네.”
“율이 그렇게 시계를 애지중지하고 전시회 때마다 들고 다니더니 그 가치를 알았던 모양이야. 아니면 목수가 전시회 때마다 올 거라고 생각을 했을까?”
싱의 이야기에 카지노 쿠폰은 깔깔 웃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카지노 쿠폰의 웃음소리였다.
나는 갑자기 어깨가 으쓱해지는 것 같았다.
“그럴 수도, 그런데 그건 아닌 게 확실하지. 율이 목수를 싫어하잖아.”
“그걸 누가 알아?”
둘의 이야기는 잠시 이어지다가 끊어지다 하더니 다시 캔버스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마도 오늘은 그림을 열심히 그리고 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감을 섞는 싱의 나이프 소리와 카지노 쿠폰의 붓질이 정적을 깰 무렵 라디오의 코드가 뽑힌 걸 알았다. 목수의 팸플릿을 붙이기 위해 라디오의 전선을 치운 것이었다.
목수의 전시회가 끝나야 라디오는 다시 켜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는데 싱의 콧노래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