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 슬리퍼(long sleeper)
내가 요요를 해온 시간은 크게 3번의 구간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첫번째는 그냥 너무 재밌고, 또 남들보다 잘 해서 한창 매니아로서 요요를 즐겼던 시간. 두번째는 거리공연의 재미를 깨달아 에딘버러까지 갔다왔던 시간. 세번째는 직장에 들어와서 다시 연습에 몰두한 시간. 두번째 시간의 이야기는 또 길고 긴 이야기인데 그 시간을 함께 했던 친구들 중 요요를 업으로 삼은 친구들도 있다.
그 중 한 친구는 요요공연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요요를 가르치는 "요요와 나"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이전에는 공연을 중심으로만 했는데 친구 나름대로 비즈니스 모델을 다각화하기 위해 오랜 시간 고민 끝에 만든 프로그램이다. 요요를 그냥 냅다 던지면서 배우는 게 아니라, 요요의 원리를 파악하고 손수 조립을 하고 꾸미면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다. 이전에는 국내 완구회사에서 만든 초보자용 요요를 구매해서 썼는데, 아무래도 기성품이고 퀄이 아주 높진 않다 보니 친구가 구현하려던 것들에 한계가 있었다. 당연히 비용 문제도 있고.
이 친구의 대단한 점은 거기서 방향을 튼게 아니라, 원하는 것을 결국 구현해냈다는 점에 있다. '애들이 요요를 조립해보면 좋겠다'는 일념 하에 나무로 만들어 본다고 목공소도 다니고 하며 방법을 찾다, 작년부터 3D 프린터를 공부해서 자신만의 요요키트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원래 요요사업을 하고 있고, 3D프린터로 상품도 만들어 파는 다른 친구도 대단하다고 할 정도의 퀄리티를 갖춘 요요가 나왔다.
처음에 친구가 "새로 만든 요요야"라며 내게 줄 때는 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기획의도를 들어보니 감탄이 나온다. 아이들 가르치는 용도로 제작한 거라서 손이 작아도 쥐기 쉽게 모양을 신경썼다. 교육용이니 조립하면서 구조를 알기도 좋게 돼 있다. 3D프린터니까 단가도 저렴하다. 무엇보다 이렇게 만들고 나니 프로그램이 훨씬 풍성해진 듯 하다.
친구가 말하는 이 프로그램, 혹은 요즘 자기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아이들이 요요를 아래로 던졌다가 다시 받는 기초기술, 그러니까 우리 표현으로 ‘롱 슬리퍼(long sleeper)’을 성공했을 때 표정. 그걸 보는 게 자신에게는 너무나 큰 기쁨이라는 것이다.참 멋지고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게 어떤 느낌일지 알듯 모를듯 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가 최근에 연말연시를 맞이해 주변 사람에게 선물할 용도로 친구의 요요를 몇개 샀다. 최근 모임 몇개에서 사람들에게 주니 반응이 매우 좋았다. 요요를 반평생 넘게 한 사람이건만 주변 사람에게 요요선물 할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게 민망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마 그냥 내 스스로도 이게 별난 취미고, 어려운 취미라 굳이 다른 사람에게 권할 필요 없다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면 진작 좀 주변에 선물할 걸.
친구가 만든 요요는 아이들이 배우는 용도로도 좋지만, 성인도 가지고 놀기 좋다.포장이 군더더기가 없다. 구조와 디자인이 심플하고, 초심자를 위해 만들었기 때문에 사용도 쉽다. 대충 구조를 설명하고 조립을 한 뒤 해보라고 하면 다들 표정이 하나같이 좋다. 오르락 내리락 하는 요요를 뜻대로 컨트롤 하지 못해도 재밌어하고 뜻대로 안돼 아쉬워하기도 한다. 그 중에서는 금새 잘 하는 분들도 있다. 아무래도 성인이다보니 아이들보다는 훨씬 빠르게 방법을 캐치하여 해낸다.
그런데 정말 하나같이, 롱 슬리퍼를 알려주고 그것을 성공했을때 정말 기뻐하고, 재밌어하고, 자랑하고 싶어했다. 그 기쁨을 보고 있는 나도 불현듯 처음 요요를 던졌던 그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아 친구가 말한 게 이런 건가?
25년을 넘게 해왔고 요요를 정말 좋아하는데, 이걸 처음 했을때의 즐거움은 이런 거였지!아마 나도 저렇게 신나는표정을 지었겠지. 내 최초의 기억은 초등학교 1학년때 (그러니까 아마도 1992년) 코카콜라 러셀요요를 가지고 놀았던 것이고, 그 다음은 초등학교 6학년때 클러치 요요를 가지고 놀았던 것. 그때 기술이랄게 뭐 있었겠는가? 위 아래로 던지는 동작만 했지. 근데 그 손맛을 잊지 못해서 지금까지 온갖 기술들을 다 해온 것이다.
요요가 뭐가 재밌어요? 종종 받는 질문이다. 셀수 없이 많다.대회에 참가해서 내가 구성한 무대를 제대로 해냈을때 즐겁고, 옛날 거리공연 할 때 사람들의 반응과 내 모습 그 자체가 즐겁고. 기술을 열심히 익혀서 내것으로 만들었을 때 즐겁고...근데 그 모든 즐거움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 내지는 부품은 결국 이 플라스틱이 회전을 마치고 내 손으로 깔끔하게 감겨 돌아왔을 때의 그 손맛이다. 거기서 시작이다.
여기엔 무슨 가치나 해석 이런게 없다. 직관적인 몸의 느낌이다.줄이 걸림이나 흐트러짐 없이 깔끔하게 풀리고, 회전이 걸린 다음 다시 감겨 올라오면서 손에 착! 붙는 느낌. 그 본원적인 즐거움이 확장되면서 여러가지 고난이도의 기술들이 생겨나고 예술적인 움직임들까지도 이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이 롱 슬리퍼를 하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옛날의 내 첫 즐거움을 만나는 기분이 들었다. 친구도 아마 그랬으려나. 그래서 아이들 가르치는 것에 더 빠져들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그냥 요요를 가지고 노는 내 동작도 예전 같은 무의식적 동작이 아니라, 이제는 더 맛깔나는 무언가가 됐다.이런 것을 다시 느낄 수 있다니 참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이고 운이 좋은 취미인가.
너무 매니아들에 둘러쌓여 이 취미를 해오다 보니 갇혀 있던 생각이 있었다. 요요를 제대로 즐기려면 기술을 반드시 계속 익혀야 하고, 공연도 할 수 있어야 하고, 비싼 요요도 살 수 있어야 하고 등등.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롱 슬리퍼 하나로도 즐거워지는 걸 보니, 이 단순한 동작과 몇가지 기초기술 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취미가 될 수 있겠단 생각을 요즘 자주 한다. 모두가 요요를 나 하는 정도로 할 필요는 없고, 긴긴 인생 짧게나마 이 직관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취미라면 그걸로도 충분한 것을.
한편으로는 이런 식으로 우리가 사랑하는 요요의 의미를 늘려나간 친구를 다시 한번 존경하게 됐다. 그러면서도 과연 나는 요요를 통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해보게 되는 것은 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