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아주아주 힘겹게 눈을 뜨고, 무거운 몸을 달래 가며 욕실로 들어가 세수를 할 때, 어떻게든 기운을 찾겠다고 아침부터 영양제를 입 속으로 털어 넣을 때, 지난봄에 나는 대체 무얼 입고 다녔는지 의문이라며 옷장을 뒤적거릴 때, 그러니까 주로 출근하기 전 시간들을 보낼 때마다 나는 이런 말을 떠올린다.
‘오늘은 내게도 좋은 일이 생기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는 사실 지금의 내 일상이 크게 만족스럽지는 않다. 하지만 이런 일상도 누군가에겐 꿈처럼 느껴지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지금 나에게 주어진 그리 대단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다시 들여다보고 소중히 여기려 노력하고 있다. 일상을 소중히 하는 카지노 게임을 내 인생의 일종의 캐치프레이즈 같은 것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예쁘지 않아도 한번 더 들여다보고, 썩 카지노 게임에 들지 않아도 좋은 점을 찾다 보면 보잘것없어 보이던 내 삶도 가끔은 꽤 근사해 보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깊은 절망감이나 지긋함, 분노 같은 것들로 똘똘 뭉쳐진 시기가 찾아오고, 그것은 연달아 일어나는 실패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오는 좋지 않은 카지노 게임으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누구라도 붙잡고 ‘내 이야기를 좀 들어보시오’하면서 속에 있는 검은 말들을 마구 쏟아놓고 싶은 시기. 그럼 또 그 사람은 무슨 죄일까 싶어서 그런 시기엔 조용히 자가격리를 하는 편이다.
삼십 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내 인생이 지금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것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잘 나간다고 떵떵거리며 명품가방을 둘러메고, 왕왕거리며 외제차를 몰고 다니는, 일찌감치 인생이 풀린 또래들을 보면서도 크게 부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조급함 또한 느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아직 젊고, 내게 남아있는 앞으로의 인생이 길고, 그 안에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곧 마흔을 앞둔 지금, 이제는 그들의 모습이 부러워졌느냐고 물으면, 그렇지는 않다. 다만, 조금은 조급해진 것 같다. 지금보다 인생이 나아지리라는 믿음보다는 어쩌면 더 안 좋아질 수도 있겠다는 불안이 내 카지노 게임에서 서서히 자리를 넓혀가고 있다. 내가 바란 것은 명품가방도 외제차도 아닌데, 그저 조금씩 성취가 오르고, 한 걸음씩 만족에 가까워지는 삶을 원했는데 나는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 걸까.
이렇게 종종 내가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면 어김없이 누군가의 기쁜 카지노 게임이 들려온다. 아니 어쩌면 기쁜 카지노 게임은 언제나 종종 들려왔었고, 그때마다 나는 좋은 카지노 게임으로 축하를 하곤 했겠지만, 하필 내가 수렁 속일 때 듣는 누군가의 기쁜 카지노 게임이기에 더 따갑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나는 기쁠 일이 하나도 없고 오히려 안 좋은 일만 있는데, 그럴 때 들려오는 누군가의 기쁨과 행복이 반가울 리가. 누군가의 기쁜 카지노 게임을 듣고, 초라한 나와 비교를 하고, 그래서 영혼 없는 응답을 하고, 그런 내가 또 밉고, 그렇게 자책으로 얼룩지는 이 모든 시간들이 훗날 내게 무엇을 가져다줄지는 모르겠다. 나는 이렇게 멍청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는 결론을 가져다줄지, 이 수렁의 시간들이 자양분이 되어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줄지. 다만 분명한 것은, 한시라도 빨리 이 수렁 속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의아하지만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선 불교가 유행이라고 한다. 처음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서 어리둥절했다. 동생의 제안으로 서울에서 열린 불교박람회를 갔다가 나는 왜 불교가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많은지 어렴풋이 짐작해 볼 수 있게 되었다. 현생의 나는 아주 열심히 살았는데 취업도, 연애도, 결혼도 카지노 게임처럼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 때, 내가 부족한 거라고 생각하며 자책을 하기보단 전생의 내 업보를 탓하는 것이 어쩌면 지금의 나를 지키는 방법이겠구나, 현생의 내 삶이 이렇게 보잘것없는 채로 마무리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내세에는 더 좋은 모습으로 태어나리라는 기대로 잠재우는 것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깨달음이었다. 물론 힙하게 탈바꿈한 불교굿즈와 놋그릇을 두드리며 디제잉하는 모습도 한몫 톡톡히 했겠지만, 불교가 가지고 있는 어떤 정신이 꽤 친숙한 위로로 다가온다는 것을 나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때쯤 나는 깊숙한 바닥 밑에 있었다. 뭐 하나 술술 풀려나가는 게 없어 부들거리고 있을 때였는데, 마침 누군가의 기쁜 카지노 게임들이 들려왔고, 또 누군가는 하는 일이 계속 잘 되어 갔고, 그렇게 나만 빼고 모두가 구름 위를 걸어 다니며 까르르 웃는 것만 같았다. 나만 찐득한 수렁의 늪 속에서 자꾸만 침잠하는 것 같았다. 꼬일 데로 꼬여버린 카지노 게임을 어디서부터 풀어내야 하는지 모르겠어서 미간에 힘을 주고 다녔다. 손에 잡히는 건 모조리 던져버리고 깨뜨리고 싶은 충동이 생겼고 그렇게 파괴왕이 되어버리면 차라리 속이 시원할까도 생각했다. 그토록 우글거리는 속을 동여 메고 불교박람회를 갔는데, 목탁을 두드리면서, 침향을 맡으면서, 염주를 굴리면서 잠시 잊어본 것 같다. 우연히 어떤 스님을 만나 귀한 말씀을 듣고 카지노 게임이 정화되었다는 소설 같은 전개가 아니라 그냥 목탁을 두드리고 향을 맡다가 카지노 게임이 잠시나마 편해졌다는 꽤나 단순한 전개가 나 역시 당황스럽고 어이없지만, 사실 카지노 게임을 다스리는 것은 이토록 단순한 방법으로 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나는 어쩌면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인생의 캐치프레이즈로 삼고 있는 ‘일상을 소중히 하는 카지노 게임’이 나를 수렁에서 건져내는 방법 중 하나라는 것을 말이다. 안 좋은 카지노 게임이 꾸준히 찾아와 나를 괴롭혀도 여전히 내가 가지고 있는 작고 소중한 것들을 지켜내려는 카지노 게임, 이제껏 내가 지켜오던 좋은 루틴들을 잊지 않고 해내려는 자세, 내 발등만 바라보고 있던 고개를 들고 한껏 푸르러진 나무들을 바라보며 잠깐이나마 계절의 기운을 느껴보는 것, 불교박람회에서 사 온 염주를 굴리며 잠시 눈을 감아 보는 것.
이런 것들을 유지하고 실천한다고 해서 현재의 문제가 곧장 해결될 일이야 없겠지만, 해결해 나갈 수 있는 힘을 충전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비록 3일짜리 카지노 게임가짐일지라도, 아니면 달랑 몇 분짜리 힘만 충전될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잠깐 충전하고 잠깐만 쓸 수 있는 오래된 배터리 같은 일상이라고 누군가는 안쓰럽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낡은 배터리로라도 매일매일을 잘 살아내다 보면 언젠가는 따로 충전을 하지 않아도 자가발전 같은 것이 가능해져서 또 다른 타인에게 에너지를 건네는 사람이 되는 날을 꿈꿔본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채로 쌓인 문제 앞에 멍하니 앉아있을 때, 누군가의 기쁜 카지노 게임을 듣고 또 잠시 카지노 게임이 가라앉았지만, 조금 충전을 한 뒤 진심을 골라 담아 축하의 말을 건넸다. 그러고 나니 혼자서 타인의 행복에 억울해할 때보다 한결 카지노 게임이 편해졌다. 어쩌면 진심이 담긴 축하의 인사는 타인을 위한 것 이전에 나 자신을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내가 이것밖에 되지 않는 모자란 사람이라서 온전한 카지노 게임을 전하는데 서툴지만, 그렇게 건넨 모자란 카지노 게임을 받고도 더욱 따스한 카지노 게임으로 되돌려주는 사람들이 아직 곁에 남아 있음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