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없는 20대 청년들의 유서 쓰기.
설령내일죽는다고해도치킨은옳았다. 유서를황급히치우고는집앞까지배달온치킨이유서에끼는우울감을몰아낸이유는다름은아니었다. 닭다리하나를물면유서를쓸때조차기분이좋아져서문장은재빨리매무새를마친채결말이나곤했다. 치킨, 정확히는네네치킨청양마요는유서를끄적이면서도살아갈이유를부여해줬다. 치킨은유서를성급히쳐내고식탁을피게만들정도로맛있었다.
대학교시절, 4년간벽돌만큼두꺼운철학책과싸워도가끔은카지노 쿠폰이승기를잡았다. 카지노 쿠폰은때때로대학교4년동안배운철학보다더많은삶의이유를부여해줬다. 때론플라톤이니, 니체니하는사람들이쓴문장과사유보단네네카지노 쿠폰청양마요소스와함께넘어가는카지노 쿠폰은삶의의미와힘을되살려줬는데비록건강이좋지않아맥주와함께즐기는날은많지않았지만카지노 쿠폰은 그 맛만으로도삶의의미를 충분히 더해줬다. 허기진 뱃속에 따뜻하니 차오르는 탄수화물과 그맛은하루를더살이유를 만들어 준다고 해도 그 표현에는 거짓이 없었다. 배달비까지 해서2만원밖에 안 하는 카지노 쿠폰은 가끔 삶을 하루 이상 연장시키는 가치로 충만해 있었다.
물론잊고있던치킨파티를떠올린건허기에의해떠오른네네치킨을먹고싶다는생각때문은아니었다. 밤마다알바로날을지새는친구는어느날인가유서를써서보내왔는데, 유서옆에는“자살아님”이라고적혀있었고그다음으로는타인들을안심시키는문장들을적어놓은채로사진을보내왔다. 물론그착한마음씨가이어진문장들은자신을위해현악4중주를대기시키고는화려한장식품과함께우울한진혼곡을연주해달라는이야기보다는소박한파티를열어달라는단촐한 요구로수렴됐다.
“얘였으면이상황에서이랬을텐데”하는기억으로장례를즐겁게치러달라는요구는죽음을기념하는파티치곤꽤소박해보였다. 평소에도현실적이었던친구가적은글엔소박함뿐만아니라멋도있었는데, 죽은사람은사라졌고남은자들은슬퍼하니파티로자신의슬픔을잊든가, 덮든가, 아니면진짜로현실을즐기기를원하는마음은그친구나름의멋이었다.
하지만 그 멋도 눈치 없는 나에겐 하나의 이야깃거리였으니, 눈치 없는 나는 그 멋을 내 맥락으로 이기적이게 전유해버렸다. 나는그멋뒤에눈치를상실한 채‘나는파티는그래도치킨파티’라며답장을이었다. 다행히도나에게파티의전권을위임했으니자살이아닌상태로이친구가죽는다면나는친구의유서를빌미로치킨파티를열수있었다는 생각 아래, 메뉴는다른사람과소통해야겠지만적어도네네치킨청양마요는하나이상시켰을것같다고상상에잠깐빠진뒤파티는“역시치킨파티”라고답을적었다.
그답위에이어서답을단것은염치없게도내손가락이었다. 언제나마음에품고있던‘장례식에서여는치킨파티’는염치없이튀어나올준비를호시탐탐노리고있었기때문에상대가치고들어올틈도주지않으며눈치없는답글은 노란 화면 위에 염치를 쌓아갔다. 친구는“나는내가죽으면꼭카지노 쿠폰열어달라고친구들에게말했다”라고한답글에대해삭제할시간을허락하지않은채로그친구는‘살아야할이유가또하나늘었다’며“꼭가야지…”라고내 염치를 감내하며 대답해줬다.
하지만 그답뒤로 내손가락은제대로된답을입력할수없었는데, 염치 때문이라기보다는 치킨에대의명분같은게붙으면괜히가볍게먹는치킨임에도그무게가무거워지기때문이었다. 물가는치킨을함부로사먹을수없을정도로상승해치킨값은어느새2만원을웃도는상품이되었으나치킨이라고함은퇴근길에가볍게사먹을만한이미지를내칠수없었다. 나역시도‘장례식은역시치킨파티지’라는향방속에치킨의가벼움을무겁게만드는의미라던가, 단어라던가, 근거같은것을만들기는싫었으나치킨파티를계획한이유는“꼭가야지…”같은마음을먹게하는것과는조금멀었다. 장례식을치킨파티로보내야겠다는말은치킨을먹고는다시힘을내서닭가슴살만큼이나퍽퍽하기만한인생에친구의장례식을빌미삼아하루를쉬고, 또치킨을먹는다면얼마나행복할지상상하며내뱉는말이었다. 그렇게언제부턴가발칙한상상력은머리이상으로뻗어나가입밖으로꺼내졌는데, 아무튼이생각은죽음을기념하는장례식이가진힘을살아있는사람의또다른힘으로돌리려는, 기존의 선을넘는상상력이었다.
그래도 나도 사람인지라 말을 뱉기 전에 생각이란 것을 하는 편인데, 장례식을 카지노 쿠폰로 바꾼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잠들기 한 시간부터 나름대로 공상을 통해 현실 예측해보았으니 공상 속에서 떠오른 사실들은 다음과 같았다.
1.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내 주변 친구들은 ‘고생했으니 편히 쉬어’라는 말을 나에게 던지고는 자기들도 바쁜 삶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2. 죽음을 빌미로 바빠버린 세상 속에서 치킨을 뜯으며 삶을 즐길 것이다.
3. 그리고 정말 카지노 쿠폰 했다면서 역시 똘끼가 충만한 친구였다며 나에 대해 토의할 것이다.
다른장례식과차이를가지는지점을생각해보자면이세가지였다. 물론카지노 쿠폰만먹고돌아가는사람이존재할지도모르겠지만예의상참가하는사람을제외하고는카지노 쿠폰의가벼움과장례식의무거움의딜레마에끼여조금더가볍고의미있고장례식에참여할지도몰랐다.
물론 차라리 장례식에 참여할 에너지로 집에서 발 닦고 잠이나 자는 게 더 편하지 않느냐고 되물어볼 수도 있다. 맞다. 하루 일 안 하면 최소 8만 원이 날아가는 이 세상에서 죽은 사람을 기념하는 장례식 같은 행사는 인사치레, 인간관계, 공식적인 행사, 어쩌면 마지막 남은 인간성과 같은 행위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돈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당사자들의 우울과 장례식장에 가면 찾아올 수밖에 없는 죽음에 관한 공포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효율과 생산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진정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다면 죽지 않는 게 제일 좋다는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시간은 많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반대쪽에서 문뜩 생각의 문을 두드리는 하나의 사실도 있었으니 ‘죽음은 끝까지 버티다가 가차 없이 찾아온다’는 사실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도대체 이 간극을 피할 수가 없어서, 자살을 하든, 투병생활을 하든, 심지어 교통사고를 당하더라도 죽기 직전까지 살아남을 방법을 찾기에 나는 잠깐이나마 두 생각을 중재하고 관리자의 입장으로 휴전을 신청했다.
휴전의결과는아시다시피 치킨파티였다. 살려고전심을다해노력해보아도죽을운명이었다면살려고바둥거리지않는지금살아있는사람을위해죽음의방식하나정도는찾아놓는것이좋았다는게망상에서 일어난 싸움의결론이었다. 그결과찾은대답은유서를쓰면서도죽음을내일로미루게만들었던치킨이었는데, 치킨의가볍기도하고맛있기도하고장례식의무거운분위기도흔들수도있다는장점은살아남은자를위한장례식을만들때충분한아이템이었다.
하지만정작이이야기를들은친구는식은치킨처럼차분한반응을꺼내왔다. 내가원하는반응은장례식을기대하며잔뜩힘을얻은“너무좋겠다”거나, “치킨은무슨메뉴로할건데?”거나, “치킨맛있겠다”였는데, 유서를적은친구의답은“꼭가야지…”였다. 당연스럽게도내죽음에투영되는감정을배제하고장례식을상상하는일은당연히불가능했겠지만그대답엔약간의음울이끼어있었다. 하긴야왜그렇게힘이없냐며사람이죽은것은죽은것이며, 이제남은사람들은각자의삶을살아야한다고대답을 달 순 없었다. “꼭 가야지”라고 말한 전제에는 이미 내가 죽었다는 사실이 놓여있는 건데, 죽은 자가 열심히 살라고 말하는 건 내가 부활을 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현실이었다.
그래도장례식을치킨파티로결정한일에대해후회는없다. 어쨌든나는발칙한상상력으로내장례식장을그려본다. 내죽음이자살이되었건타살이되었건간에, 갑자기발목이접질려우당탕거리면서계단에서굴러떨어져비극적인죽음을맞이했건아니면피치못하게지병으로 가진 간이악화되어둔탁한투병생활끝에고통에휩싸여표정관리도못하고죽든간에친구의죽음앞에서서성이며장례식장에방문해줄친구들을상상해본다. 거기참여한사람들은나의죽음에나름대로의슬픔을투영하며오는사람들일터인데, 분명장례식장입구부터풍기는치킨냄새로부터‘맞아. 얘장례식치킨파티로하기로했지.’라는생각이추억의실뭉치의어느한올로부터떠오를것이며, 점점다가오는냄새로부터배가고파질것이다. 대략적으로의례는치러야하니까장례식사진을보고절을하면서‘역시미친놈이맞아.’라고한번생각하고, 익살스러운사진을보며‘역시미친놈이맞아.’라고한번더자신의생각을굳힐것이다. 풍기는치킨냄새속에서맞절을하다가동생입가에뭍은치킨양념이라도보는날엔마음을추스르며그간단련했던웃음을참는방식들을기억속어딘가에서꺼내와허벅지라도꼬집어야할것이고, 동생이말이라도거는날엔터지는웃음을참지못하고즐거움을뿜어내야만할것이다.
밥을 먹으면서도 난감함은 이어진다. 적어도 한국 사회에선 젊은 사람이 죽는 일은 호사가 아니라고 평가되는데, 호사가 아님에도 밥으로 육개장이 아니라 카지노 쿠폰이 나오는 상황에 대해서 매뉴얼 같은 건 정해져 있지 않으니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해할 것이다. 난감한 표정 뒤로 어떤 테이블은 웃기도 하고, 어떤 테이블은 말없이 닭다리를 뜯을 것인데 어차피 아웃사이더의 친구들은 대부분 아웃사이더이기에 곧 잘 자기 나름대로의 스타일로 적응해갈 것이다. 아 참, 어차피 사람들이 별로 없으니까 옆 테이블 눈치를 볼 일도 없으려나.
그래도 “꼭 가야지…”한 친구는 꼭 올 터이니 한 테이블 이상은 존재할 것 같다. 물론 의례상이든, 진심이든 간에 어머니와 아버지의 친구들이 올터이니 꽤 북적일 수도 있다. 물론 난감한 건 이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망자가 죽기 전에 꼭 부탁한 일이라니 어떻게 안 먹을 수도 없고, 상주들에게 장례식에서 이게 뭔 짓거리냐며 나무랄 수도 없다. 그래도 죽기 전에 꼭 부탁한 일이니까.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호사가 아닌 죽음에 치킨을 내온 곳에서 지을 수 있는 표정”과 같은 책은 나오질 않았으니 그들도 무척 난감할 것 같다. 난 부디 어머니와 아버지의 친구들 역시도 잠깐 빠른 삶을 멈추고 ‘이렇게 죽을 수도 있구나’ 같은 발칙한 질문을 던져줬으면 하지만 평생 50-60년을 죽음을 진지하게 다루며 살아온 이들에게 내 생각을 강요할 수는 없으니까 좀 미안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물론 이들도 앞 선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치킨 냄새를 맡고, 익살스러운 영정사진을 보고 웃음을 억눌러야 하고, 상주의 얼굴을 보고 감정을 추슬러야 한다. 그렇기에 제발 구멍 난 양말을 신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장례식은 산 사람들을 위한 행사라는 점을 인정한다. 또한 장례문화는 전통과 많이 연결되어있다는 점을 받아들인다. 어렸을 때 학습했던 내용 중에 장례풍습과 무덤의 모양으로 민족의 기원을 찾는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었는데, 장례식을 의무적으로라도 가야 하는 나이가 서서히 엄습해오다 보니 왜 그런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민족의 정신이라고 말할 정도로 잘 변하지 않는 장례식은 변하지도 않을뿐더러, 사회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죽은 자가 장례식에서 밤 놔라 배 놔라 할 수 없는 노릇일 수도 없는 생각이 든 건 상상들을 이어가다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난처한 표정 때문이었다. 난 내 장례식에 밤도, 배도 아니라 카지노 쿠폰을 올려놓으려고 했으니.
또한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사실 역시도 장례식에 개입이 불가능하다는 한계를 일깨워줬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정확히는 말을 할 수 없다. 그 유서가 어떻게 읽히든 간에 어떻게 손 쓸 방도가 없다. 내가 3일 만에 부활한다고 하더라도, 장례식은 3일 동안 치러지니까 장례식의 방향과 의도에 영향을 끼치는 건 불가능하다. 유서에 철자라도 틀려서 치킨파티가 아니라 지킨 파티로 바뀌어 슬픈 마음을 굳건히 지킨다던가, 아니면 치킨파티를 열어달라는 말이 ‘치킨파티’라는 치킨 브랜드를 창업해달라는 말로 들려서 부모님이나 친구가 치킨집 사장님이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어떻게 손 쓸 방도가 없다. 물론 그건 3일 만에 부활하면 곧잘 막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꼭 가야지…”같은 마음을 “와 오늘 치킨 먹는다!”로 바꿀 순 없는 노릇이다. 내가 원래부터 치킨파티를 계획했다는 맥락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아들이 죽었는데 위로해줘야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고 왔는데 치킨 향이 나니, 그 의도를 파악하다가 장례식장을 나올지도 모를 노릇이다.
하지만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횡포를 부릴 수 있는 신이 되는 과정이 아니다. 가장 생산성 없는, 이제 잊혀만 하는 시체가 되는 일이다. 이는 장례식은 본질적으로 산 자들의 일이고, 사회와 연결되어있고, 망자가 원하는 대로 의도를 꺾지 못하며, 오는 사람도 당황할 수 있다는 생각들은 그냥 기존의 장례풍습으로 보내면 좋겠다는 마음 한쪽 주장의 근거가 됐다. 그래서는 ‘오늘 치킨집은 휴무입니다.’처럼 ‘장례식에서 치킨파티를 기대한 사람들이 있다면 미안해요. 그냥 장례는 기존의 풍습대로 치를게요. 와서 수육과 육개장을 드세요.’라고 적어놓을까 몇 번을 고민했다.
하지만 생각 끝에 적은 건 역시 치킨파티였다. 대신 좀 유연한 어조로 적기로 했다. ‘가능하다면’ 같은 접미사를 붙여서 읽는 이의 심정을 누그러뜨리고는 ‘가능하다면 치킨파티로 해달라’고 적었다. 유서가 힘이 있는 전언이 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기에, 그리고 발칙한 상상력 속에서 마주한 사람들의 당황스러움과 그 당황스러움을 소화하는 친지들의 모습이 그다지 달갑지는 않았기에 꽤 유연한 어투로 치킨파티를 적기로 했다. 그러면 분명 살아 있는 자는 한쪽에 치킨이 있다거나, 육개장과 치킨을 함께 낸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타협점을 찾아갈 수 있으리라. 물론 동생의 입가에 뭍은 치킨 양념과 영정사진에 나온 익살스러운 표정은 내가 어찌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나름대로 머릿속에 남아있는 매뉴얼대로 행동할 수 있겠고, 적절한 슬픔을 유지하면서 유족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장례식을 경험한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호사가 아닌 죽음에 치킨을 내온 곳에서 지을 수 있는 표정”은 없더라도, “유쾌함을 잃지 않으려는 망자의 모습에 대응하며 유족을 위로하는 나름대로의 방식”은 있으니까.
그래도 육개장 옆에 양념치킨이 나온다면 분위기가 무겁게 흘러가지 않으리라 예상된다. 그렇다고 해서 양념치킨은 어색하지도 않아 보인다. 어쨌든 한국 장례식에 전통적으로 올라오는 메뉴는 빨간 메뉴가 주로 올라오니까. 육개장과 오징어무침 혹은 홍어무침 사이에 양념치킨이 올라간다면 별로 어색해 보이진 않아 보인다. 물론 맛이 짜기보단 달고, 젓가락으로 집어서 먹기엔 좀 힘든 감이 있어서 어색할지도 모르지만 색깔로는 네네치킨 청양 마요 같은 갈색과 하얀색이 섞인 치킨이 아니라면 내는데 용기가 필요해 보이진 않다. 상 위에 치킨이 올라오면 누군가 의미를 묻기도 하고, 누군가는 진짜 이걸 한다며 추억하기도 하면서 분위기는 조금이나마 가벼워질 수 있겠다.
무엇보다도가벼운분위기속에서개인은너무많은힘을빼앗기지않을것같다. 치킨을보며웃고즐기는분위기가전제되어있다면상주들을포함한조문객은몸에강하게밴힘이풀릴수밖에없다. 적절한피로도속에서먹으면또맛있는음식이치킨이다. 장례식장이니까당연히배치된맥주와함께치킨을 먹고 마시며 조문객들은다른 장례식보다 조금 더 자유롭게드나들것같다. 맛있는음식이들어가면몸에활기가돌고말할힘도생기니까죽은사람이왜죽었는지, 어떤심경인지오히려잘물어볼수있을것만같다. 이상상이지극한개인적인희망일지, 실제로일어날수있는일인지는모르겠지만상상만으로도꽤괜찮아보인다. 장례식이치킨파티라면다들먹고살기도바쁜데, 적어도내장례식만큼은먹고살기바쁜일상에흠집을내는축제처럼멈추는공간을열어주지않을까.
하지만 카지노 쿠폰 파티를 열면 가장 아쉬운 쪽은 망자일 것이다. 망자는 이 즐거운 모든 상황을 볼 수 없다. 망자는 말이 없을 뿐만 아니라, 들을 귀도, 이 모든 상황을 볼 눈도, 축제 분위기를 느낄 신체도 없다. 좀 오해가 있을만한 발언 같기에 좀 더 정확히 하자면 그 모든 신체는 지금 영안실 안에서 방부처리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까 느낄 에너지가 없는 게 맞겠다. 만약 사후세계가 없다면 망자는 그 즐거운 순간을 모두 놓친다. 함께 즐기고, 먹고 마시는 그 순간들과 카지노 쿠폰 냄새가 나서 당황하고, 웃음을 참을 수 없고, 결국은 의례적으로 단단해진 몸의 긴장을 풀고 함께 닭다리를 뜯는 그 모습을 모두 놓친다. 그 즐거움은 모두 산 자의 몫이다.
물론 사후세계가 있어도 ‘함께’ 즐길 수는 없다. 만약 유령이 되어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다면 ‘누군가의 장례식에서도 삶을 이렇게 즐길 수 있다면 아 더 살 걸. 까비.’ 같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옆에선 이제 가야 한다며 저승사자든, 천사든 신의 언어를 대언하는 사람들이 나를 붙잡고 천국에 가긴 글렀으니 아마 지옥으로 끌고 갈 것이고 한 편에서는 그리고 즐겨줘서, 내 유언을 잘 지켜줘서 고맙다는 생각을 한 채로 천천히 저 편으로 사라져 갈 것이다.
이 모든 즐거움이 내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건 짓궂은 사실이다. 지금 내가 치킨파티를 연다고 해서 나와 관련 있는 모든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즐거움을 누릴 순 없으니까 나는 생에 사람들이 치킨파티로 인해 즐거워하는 모습을 누릴 순 없다. 내가 유령으로 남아 바깥에서 바라보든, 아니면 죽어서 사라지기 때문에 상상으로만 그 모습들을 쳐다보든 간에 난 거기 낄 수 없다. 살아있지 못하니까(않으니까) 누릴 자격 없다고 하기도 애매하고, 욕심이라고 하기도 애매하다. 치킨파티의 즐거움은 내 삶 밖에 있다.
그럼에도 장례식이 아직 세상에서 사람들의 시간을 잠깐 멈출 힘을 가진다면 그 힘을 조금이나마 이용해 보고 싶다. 다만 그 힘의 방향을 내 혓바닥이나, 번 드러지는 글귀으로는 바꿀 수 도 없을뿐더러, 강요할 수도 없으니까 나는 인간이 꽤 오랫동안 먹어왔던 닭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힘을 사용해보도록 한다. 먼 과거 건 , 가까운 현재건 언제나 닭을 먹을 땐 편안한 상태에서 불이나 TV 같은 것을 보며 먹었을 확률이 농후하기 때문에 신체의 습관을 이용해보도록 한다. 카지노 쿠폰 냄새와 절대적으로 이어져있는 신체의 편안함이라는 특성을 자극해보기로 한다.
신체가 편안해지면 다양한 이야기가 뻗어 나올 수 있다. 분위기가 무거워지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표정도, 어깨도, 몸도, 심지어 마음도 무거워진다. 하지만 가벼워질수록 말은 꺼내기 쉽다. 말이 들어갈 틈이 생긴다고 해야 할까. 할 수 있는 말들이 넓어지니까. 적어도 “아, 이 집 카지노 쿠폰 맛있네요.”정도는 할 수 있는 분위기는 맞을 것 같다. 어느 장례식에서 “이 집 수육 잘하네요” 하면서 네이버 지도 별점에다가 5점 만점에 5점을 줄 수 있을까. 분위기의 허들이 낮아지면 무슨 말이든 가능해진다. 허들이 낮아지면 젊은 사람이 왜 죽었을 수밖에 없었는지 한 번쯤이나마 이야기가 나오게 되겠다. 분위기가 너무 가벼워진 나머지 ‘죽을 수밖에 없었다’며 뒷담으로 흐르건 간에,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내가 왜 죽었는지 논의하고 토론하건 간에, 카지노 쿠폰에 염분이 녹아들듯 “살아생전 토크” 역시도 장례식 토크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것이다. 이 흐름이라면 망자에 대한 의미와 기억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지 않을까. 왜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 고민해볼 가능성도 내포하지 않을까.
하지만 무거운 상태로 다시 일상으로 복귀해야 한다면 논의는 불가능하다. 내일 출근이 아침 9시인데 새벽 3-4시까지 장례식장에 부담 없이 있을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만약 빨리 집으로 복귀한다고 하더라도 하루 정도 시간을 내고 장례식장에 방문해 그 긴장을 온전히 감당함에도 내일을 걱정하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다. 몸과 마음이 무거워지면 입도 떨어지지 않는 게 사람의 신체 일터인데, 거기에 당사자가 호사가 아니라 객사나 사고사, 자살이라면 가뜩이나 무거워진 입은 더 무거워져 밥을 먹지도 못하고 “드릴 말이 없다.”라고 간신히 입가를 움직인 뒤에 자리를 뜨고 말아 버린다. 만약 부모보다 먼저 떠난 딸이나 아들의 장례식이라면 분위기는 차마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어찌 설명할 수 없는 중압감은 조의금만 보내고 방문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사정을 이해하게 만든다. 신체가 무거운 분위기를 짊어져 자신도 더한 위로를 더하고 싶어도, 간단한 위로만 드리고 빠져나가는 상황에서 왜 그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 질문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질문이 없어지면 의문도 당연히 사라진다. ‘왜 자살해야만 했을까. 왜 객사해야만 했을까.’ 하는 질문은 중압한 분위기 속에서 사라진다. 하지만 질문이 없으면 죽음은 어디선가 다시 반복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대책을 세우거나, 예방을 하는 일도 당연히 불가능하다. 애초에 어느 자리에서 조차 논의되지 않았기에 죽음은 비슷한 이유로 반복된다.
그렇다고해서자신의죽음을타인을위해 완전히 내어주겠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아무리“세상에서가장따뜻한로봇”이라는별명을가지고있다고하더라도, 티스푼하나정도의“따뜻함”은가지고있기때문에내죽음속에서타인을위한힘을남김없이발굴해내는목표를가진건아니다. 아주소량이라도내죽음은의미가있었으면좋겠고, 나도오래기억되면좋겠다. 그렇다. 이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눈치채셨을지는 모르겠지만어쩌면치킨파티는무의식속에서설계된나의짧은생과죽음을기념하기위한고도의전략일수도있겠다.
하지만고도의전략속에서도남아있는자들의몫을한번더생각한다. 어차피문화에 의한강요건간에, 진심으로가슴아픈마음을부여잡고참여하건간에장례식에참여해야한다면치킨이라도먹으면서힘을주고싶다는게아직까진생존해있는몸뚱이의생각이다. 뭐든힘이있어야한다. 슬픔을이기려고해도, 향유하려고해도힘이있어야한다. 다시일상을살아가려고해도, 의문넘치는죽음에대해가슴에묻어두려고해도힘이있어야한다. 물론망자에대해회고하고, 죽음에대한의문을밝혀내려고한다고하더라도힘은있어야한다.
남아있는 사람들을 위해, 나는 유서를 쓰면서 삶에 의미를 더해준 치킨을 불러낸다. 그때 먹은 치킨은 확실히 달고 맛있었다. 장례식과 같은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도 몸과 마음을 일깨울 정도로 맛있는 음식이었다. 어쩌면 왜 사람들이 요즘 빨리 죽는지 질문하고, 왜 저 사람은 죽어야만 했는지 말을 꺼내게 하리라고 예측할 정도로 힘을 주는 음식이었다. 동시에 무거운 우울을 풀어헤쳤기에 무거운 분위기를 과감히 흔들어놓아 위로와 위로를 통하게 하는 금단의 음식에 비견될 음식이었다.
공상을마치면서약간의우울감에혀끝이시렸다. 만약개인이자신의슬픔을온전히소화하고, 죽은사람에대해온전히질문할수있던사회였다면나의장례식은치킨파티보다는육개장파티로치러질지도몰랐다. 죽음을통해화기애애하지않아도됐다면내죽음은꽤엄숙하고근엄하고진지한채, 모두표정이일그러지고슬퍼진채로넘어갔을것이다. 하지만나는그렇게중요한사람도아니거니와사회역시도슬픔보다는8만원의 일급과 생존이 중요시되는사회로넘어간것을어떻게하나. 우연히대한민국에던져졌다사라지는일반민중이효율을이길만한슬픔을기대하는건사치일지도몰랐다.
그러니까 장례식에 치킨파티를 넣어보기로 한다. 쓰다 보니 대의명분이 덕지덕지 발린, 별 같잖은 소리를 하고 앉아있는 모습처럼 보이겠다만 사실 별건 아니다. 내 죽음은 대의명분을 녹여낼 힘도 없고, 그럴만한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잘 알기 때문에 치킨파티를 열고자 하는 목적은 다음과 같다. 나는 치킨파티에 두 가지 마음을 가진다. 먼저는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둘째는 나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아줬으면 하는 두 가지 마음을 가진다.
이와 같은 이유를 근거로 처음 말씀드린 대로 난 장례식에 카지노 쿠폰 열 예정이다. 내가 만약 죽는다면 독자 여러분도 와서 한 입씩 거드셨으면 좋겠다. 물론 파티하면 신나는 음악이지만 가나의 독특한 장례문화와는 다르게 EDM은 아직 한국적 분위기와 멀어 보이니까 파티라고 해서 EDM은 기대하지 않아줬으면 한다. 와서 닭다리 하나씩 뜯어줬으면 좋겠다. 그러면 이 의미를 아시는 여러분으로 인해 장례식이 조금 더 화기애애 해질지도 모르니까. 물론 조의금 대신 제 이야기 좀 많이 해주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