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당하던 꿈
"전공은 뭐 하고 싶나?"
"불어불문학이요."
"뭐? 불어불문? 우리(학교)는 중국어 배웠는데, 니는 와 불어고?
"프랑스로 유학 가고 싶어요."
"뭐? 유학??"
시간은 바야흐로 30년 전,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과 진로 상담을 하던 대화 장면이다. 이대화를 나누기 몇 개월 전 3학년 1학기 중간고사를 마친 후 친구 집에서 비디오 한 편을 빌려보았다. 비디오테이프케이스에는 <패왕별희라는 제목과 함께 '칸영화제 수상작'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다. 아마도 예술영화인 것 같았다. 마음이 설레었다. 홍콩영화와 할리우드 영화가 무성하던 90년대에 소위 예술영화는 사춘기 감성을 어마무시하게 자극카지노 게임 추천.
영화의 시대적 배경도, 감독의 주제의식도 뭘 알고 봤다고는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영화를 본 후 기분이 이상했다. 이상한 감성이 내게 들어왔다. 영상의 빛깔, 음악, 배우들의 눈빛 모든 게 너무나 설레었다. 그날 이후로 신문 지면에 주말에 한 번씩 소개되는 영화 코너를 유심히 읽었고 지금은 단종된 스크린, 로드쇼 등의 영화 잡지를 몰래 사다가 읽었다. 영화를 전공하는 대학도 알아봤다. 연극영화과에 이론전공으로 지원하기에는 수능점수가 턱없이 부족했다. 일단 불어를 전공하고 그다음에 프랑스로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었다.
선생님은 진로상담 중에 내가 대답을 할 때마다 계속 반문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움과 호기심이었고, 그다음에는 의심과 무시였다. "느그 엄마가 유학 보내주신다고 하데?" 헛꿈 깨라는 말이었다. 나는 선생님의 표정에 당황하지도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선생님의 질문의 의도를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어쨌든 전 갈 거예요."
잊혀진 꿈
그렇게 나는 아베세데(ABCD)도 모른 채 불어불문학과에 입학했다. 입학 전부터 영화 이론 책부터 사다 모았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영화동아리에 가입했다. 매주 영화세미나를 하면서 영화를 보고 토론을 하고 영화 제작을 했다. 주말과 방학에는 비디오 가게에 있는 온갖 영화들을 빌려보았다. 그렇게 영화와 프랑스에 대한 동경으로 나의 20대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한해 한해 시간이 흐를수록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꿈은 점점 사라져 갔다.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것도 프랑스에 가고 싶다는 것도 누구나 한 번씩 꿈꿔보는 흘러가는 구름 같은 것이었을까. 그 꿈은 그렇게 바람에 흩어져버렸다. 대신 좀 더 현실적인 방안을 찾게 되었다. 영화는 아니지만 다른 시각매체에 관심이 가졌다. 광고홍보 분야에서 일하고 싶어졌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막막했다. 인터넷이 활성화되기 전이라 취업 정보가 많지 않았다. 게다가 대학교 3학년 때 IMF시기를 맞으면서 내가 졸업할 무렵 신규 취업은 완전 전멸상태였다. 지방대생이었던 나는 이력서를 쓸 곳도 없었다. 종이로된 입사 지원서 양식이 있어야 지원서를 쓸 수 있었는데 우리과 전공 사무실에는 변변치 않은 이력서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몇 달간 놀았다. 간간히 공공기관에서 일용직 알바를 했고 통신사 고객센터에서 전화 상담원을 하기도 했다. 임시직으로 전전하면서 안정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바둥거렸다. 당시는 이름하야 버블닷컴 시대였다. 취업을 위해 기술을 배우자는 생각에 컴퓨터 디자인 학원에 들어갔다. 홈페이지 제작과 각종 디자인 툴을 배웠다. 당시에는 플래시라는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프로그램이 각광을 받았다. 나는 그 프로그램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영상 포트폴리오를 몇 개 제작했다. 당시로서는 최첨단 그래픽 툴을 이용해서 한국 전통을 주제로 한 애니메이션을 만들면 주목을 받을 수있을 것 같았다. 나는 먹으로 난을 치는 장면과 벚꽃이 낙화하는 장면을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이력서와 포트폴리오 파일을 관련 업체에 뿌렸고 국악 콘텐츠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그렇게 나의 제대로 된 첫 직장생활이 시작되었다.
영화 제작은 아니었지만 WWW(따따따) 인터넷이라는 매체에서 미디어 작업을 하게 되었다. 나는 웹 서비스를 거쳐 APP, 키오스크, 내비게이션, 쇼핑몰, 게임, 인터넷 방송, IPTV 등 15년 직장생활 동안 당시를 풍미했던 IT서비스는 다양한 분야를 경험하게 되었다.
인터넷 매체를 일하면서 신사업 기획을 할 때는 당연하게 동종업계를 벤치마킹을 했다. 하지만 좀 더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는 동종업계만으로는 부족했다. 동종업계의 시장조사는 누군가를 따라 하기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온라인 서비스를 기획했지만 오프라인 서비스에서 아이디어를 찾곤 했다. 백화점 진열을 살핀다던지 인사동을 걷기도 하고, 미술관이나 서점에 가기도 했다. 상품 자체를 살펴보기도 하고 상품을 살피는 고객들의 반응과 그들의 대화를 엿듣기도 했다. 그렇게 영감을 찾아가게 된 것이 미술관이었다. 미술관에서는 어린 시절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이상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미술관에서는묘한 울렁거림과 안정감이 반복된다는 것을 느꼈다.
절망에 빠진 꿈
퇴사를 고려하던 무렵 동료들끼리 회사를 그만두면 무얼 하고 싶은지 이야기를 나눴다. 마치 장래희망을 이야기하듯 때로는 이번생에는 불가능할지도 모를 소망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 대화였다.그때 나는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곤 했다. 하나는 시를 쓰고 싶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미술을 공부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마치 두 번째 삶을 살기라도 할 것처럼 퇴사를 했고 퇴직 후 1년 뒤 미술관에서 도슨트를 하게 되었다.
계획을 했던 것은 아니지만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 당시 퇴사 후 직장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난 후 무엇을 어디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방황을 했었다. 토익 공부를 하기도 하고 노무사 자격증 공부를 하기도 했다. 다시 재취업을 준비하는 나를 보며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잃어버린 내 꿈은 무엇이었을까를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 중 하나는 미술이었다. 나는 미술관을 다시 다니기 시작했고 우연히 발견한 도슨트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을 하게 되었다.
도슨트를 하게 되면서 미술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전보다 더 많은 그림을 보게 되었고 미술사와 인문학 공부를 되었다. 혼자서 공부하기도 하고 무료 강의를 찾기도 했고 미술사 스터디 하기도 했다. 공부를 하며 만났던 대부분의 미술 애호가들은 파리 미술관에 대해 말했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미술을 좋아하게 된 계기가 유럽여행을 통해서였다고 했다. '파리의 미술관...' 그곳은 어떤 곳일까? 그곳에는 무엇이 있기에 이들을 설레게 했을까? 내가 동경하던 파리가 내 맘속에 다시 꿈틀거렸다.
나는 파리에 갈 만한 형편이 되지 못했다. 일단 집을 마련하기 위해 끌어당긴 빛이 상당했고 책을 사볼 여유도 없어서 3개 지역에서 도서관 대출증을 받아서 책을 빌려 보는 상황이었다. 내가 파리에 가지 못했던 이유는 비단 경제적 이유만은 아니었다.신혼여행지를 결정할 때도 파리에 가고 싶었다. 신혼여행은 장기간 휴가를 내기에 적당한 핑곗거리가 될 것 같았다. 요즘에야 연차를 붙여서 장기간 휴가를 내기도 하지만 라떼는 여름휴가 5일도 한 번에 다 쓰는 것도 눈치가 보이는 시절이었다. 결혼휴가 6일 정도면 프랑스의 도시 하나 정도는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결국 파리를 가지 못했다. 혼자 하는 여행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파트너는 가까운 곳의 휴양지를 원했다. 나는 파리를 포기했고 멀지 않은 나라의 휴양지로 여행을 갔다. 그때는 파리보다 파트너가 취향이 더 중요했고 그리고 그의 뜻을 꺾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파리는 내게 멀어져 갔다. 혹시라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더 깊은 절망으로 나를 끌고 내려갔다.
다시 돌아온 꿈
정말 오랜 시간 동안 나는 파리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잊고 지냈다. 심지어 파리에 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나는 오르셰 미술관이나 루브르 박물관에 가보지 않았지만 나름 미술에 대한 안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좋은 작품을 발견할 수 있고, 향유할 수 있는 역량을 가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재작년부터 미술에 대한 글을 브런치에 쓰게 되면서 도록에 있는 그림을 실제 보게 된다면 어떤 감동으로 다가올지 궁금해졌다. 도록의 작은 삽화 만으로도, 언어로 된 이야기로도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비언어적인 미술작품을 실제 보는 것은 어떤 느낌일지 알고 싶었다. 다시 파리에 한번 가고 싶어 졌다.
이제는 파리에 가지 못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다. 돈이 없지도 않고 시간이 부족하지도 않게 되었다. 정확히는 돈은 또 벌면 되고, 시간은 내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언어의 장벽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번역기 앱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 이제 정말 중요한 것은 "정말 내가 원하는가?"만 남았다.
젊은 시절 한 번쯤 유학을 꿈꾼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 죽기 전에 한 번은 해외여행을 가고 싶다고 말한다. 내게 젊은 시절에 품었던유학이라는 욕망은 한낮의 꿈같은 것에 불과카지노 게임 추천.그때 나는 유학을, 그리고 영화를 그다지 열망하지 않았던 것 같다.만일 내가 지금 파리에 가지 못한다면 나는 아마도 그다지 파리에 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더 정확히는 파리를 가기 위해 겪어야 하는 난관(가족의 반대 또는 걱정, 동행인과의 갈등, 낯선 장소에 대한 불편함 등등)이 더 크기 때문일 것이다. 가지 못할 이유를 찾는다면 온갖 것이 문제가 될 것이고, 가야 할 이유를 찾는다면 그것 또한 천지삐깔일테다.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 있다. 남이 보기에는 아주 사소한 것일 수 있어도 당사자에게는 아주 큰 일처럼 느껴지는 일이 있다.내게는 익숙한 울타리를 벗어나 낯선 타지로의 여행을 떠나는 일이 어려운 과제였다.그것도 누구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내가 주체가 되어 결정하고 감행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절벽에서 뛰어 내릴 만큼의 용기가 필요할 수도 있는 일이 된다.지금 당장 하기 어려운 일이라면 나중이 되더라도 그것은 어려운 일로 남는다.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저절로 쉬운 일이 되지 않는다.어려운 것은 지금부터 조금씩 준비해 나가야 한다.지금 시도하게 되면 나중에는익숙한 것이 된다.
난 오랜 시간 욕망을 금지시키며 살았다. 누군가 내 앞길에 닫힌 문을 열어주고 레드 카펫을 깔며 가는 길에 꽃을 뿌려주길 바랐다. 하지만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내가 직접 문을 열지 않는 한, 그 누구도 내 앞에 문을 열어 줄 수 없다. 내가 문을 열었을 때 그때야 비로소 문 건너편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나는 문을 연다. 빗장을 열고 한발 앞으로 걸어 나간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세상으로 간다.
"어쨌든 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