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운동 시간을 빼서 버스를 타고 K사 본사로 찾아가 보니, 매장은 예상보다 훨씬 작은 곳이었다. 백화점에 자리한 신발 전문 대형 매장처럼 크고 으리으리한 가게일 거라 생각했던 나는 좀 놀랐다. 말끔하지만 내장재 곳곳에서 세월의 흔적이 엿보이는 그곳은 지하철 역사의 점포 서너 개 정도 규모로, 명성에 비해 퍽 아담한 편이었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보면 수십 년 된 기업의 본사 매장이 작고 소탈한 경우는 그리 드물지도 않다. 원래 자리나 적당한 규모를 잘 지켰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 회사가 전통과 본질에 집중했을 거라는 생각을 내멋대로 하고 수선을 거절당하지는 않겠구나 예상했다.
매장에는 아마도 점주일 중년 남성과 직원일 젊은 여성 둘만 있었다. 내피 수선을 맡기려 한다고 구두를 꺼내자, 남성은 기민하게 다가와서 신발 안쪽을 살펴보고 내피는 3만 원이 들 것이라 했다. 백화점 직원과 달리 그 어떤 의심도, 의심을 할 의향도 없는 듯한 태도였다. 하기야 그게 당연한 일이다. 내피가 노후되어 수선을 하려는데 너무 노후되어 수선을 할 수 없다니, 그럼 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딱 맞는 시기에 수선을 맞기냐는 말이다.
나는 퍽 안도했다. 그러나 그때, 여성이 옆에서 깔창을 보고는 천만뜻밖의 말을 했다.
“아, 이건 저희 제품이 아닌데요.”
그러자 남성도 깔창을 다시 살펴보더니 그 말에 동의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분명 K사에서 샀다고 하자, 여성은 언제쯤 어디서 구매하셨느냐고 물었다. 나는 2006년쯤에 분명 마트에 입점된 K사에서 산 것으로 기억한다고 답했다. 여성은 스마트폰으로 잠시 검색해보더니 이 제품은 ‘로버스’ 제품이고, 지금은 A사에서 취급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근 20년을 K사 신발로 알고 있었는데 완전히 착각이었던 것일까?
나중에 알고 보니 터무니없는 착각이라곤 할 수 없었다. 로버스는 1961년에 만들어진 스페인 브랜드로, 2006년 경에는 K사에서 수입해서 취급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다 근래에 A사로 파트너사가 변경된 탓에 내가 이런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나는 잠시 K사에서 팔았으니 무료 카지노 게임 정도는 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파트너사가 바뀌면서 사후 처리의 주체도 변경되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나는 잠시 서서 난감해했다. 그렇다면 또 이 물건을 들고 A사를 찾아가야 한단 말인가. 그러자니 남성은 수선을 맡겨볼 수는 있다며, 45000원 가량이 들 텐데 안 될 수도 있다고 했고, 여성은 수선한 뒤에도 오래 신지는 못할 거라 했다. 타사 제품을 더 비싸게 받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알 수 없다는 말도, 이후에 오래 신을 수 없을거라는 말도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구두를 들고 가게를 나섰다. 가격이나 수명 문제는 차치하고 더는 헛걸음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음은 A사 매장을 가야 한다는 소리인데, 아무래도 내키지 않았다. 거기서 산 구두를 수선받았다는 후기도 찾을 수 없었을 뿐더러, ‘여기서 산 건 아닌데 20년 전에 이걸 팔았던 K사에서 여기 맡기라고 해서요’ 하고 구두를 내밀어봤자 ‘저희가 취급중인 상품이 아닌데요’ 하고 거절할 확률이 높을 듯했다. 게다가 매장이 가깝지도 않았다.
이제 남은 건 수선 전문점에 맡기는 방법이다. 나는 미리 알아둔 수선 전문점을 갈까 생각했으나, 거긴 수선비가 7만 원 가량이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반쯤 기념품처럼 갖고 있던 신발을 고치는 데에 7만 원을 마음 편히 쓸 수 있을리가 없지 않은가. 결국 나는 지도를 검색해서 근처에 있는 수선 전문점 중에서 작업물 사진이 올라와 있는 점포로 걷기 시작했다.
걷는 동안 나는 생각했다. 뭔놈의 신발 고치기가 이렇게 힘든걸까? 그리고 그놈의 백화점 직원은 대체 눈이 어디 달렸길래 자사 제품인지 알아보기도 전에 낡아서 안된다고 한 걸까? 애초에 깔창을 빼놓고 왔으면 어느 회사 제품인지도 알 수 없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된다는 둥 안된다는 둥 가는 곳마다 말이 다 다르면 누가 고생해서 신발을 고쳐 신는단 말인가?
어쨌거나 수선 전문점은 금방 나왔다. 처음에는 건물에 있는 점포일 줄 알았는데, 지도를 다시 확인하니 흔히 말하는 ‘구두방’이었다. 나는 반신반의하면서 반쯤 열린 문으로 다가가서 내피 갈이가 가능한지 물었다. 중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는 나이로 보이는 주인장은 신발을 보자마자 흔쾌히 물론 된다고 답했다. 마음이 놓인 나는 K사에서 될지 안 될지 모른다 해서 여기로 왔다고 괜히 사정을 말해봤고, 주인장은 이런 건 거기 갈 것도 없다며, 두 종류의 원단을 보여줬다. 베이지색과 검은색이 있었는데 신발에 대보니 베이지색이 나았다. 접착하고 위를 미싱으로 박을 거라고 설명하며 깔창도 고치고 바닥도 덧댈 수 있다고 했는데 나는 일단 내피만 하겠다고 했다. 수선비는 3만 원. 원단이 인조가죽이라 아쉽긴 하지만 이 이상 헤매고 다니기도 싫고, 뭣하면 20년 뒤에 또 수선하자 싶어 수선을 맡겼다.
내일 이후면 언제든 오라는 주인장은, 신발을 선반에 올려두며 가죽이 아주 튼튼하고 좋은 녀석이니 수선해서 잘 신을 수 있을 거라 덧붙였다. 내 멋대로 하는 생각이지만, 그는 좋은 물건을 자기 손으로 원상복구 할 수 있다는 데에 즐거움을 느끼는 듯했다.
이틀 뒤, 운동 시간을 또 빼서 신발을 찾았다. 주인장은 금방 나를 알아보고 구두를 보여줬는데, 들여다보니 원단을 덧대고 끝을 말끔히 재봉해 둔 상태인 데다 심지어 나로서는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짐작이 가지 않을 정도로 깨끗이 광을 내 놓았다. 나도 취미삼아 신발을 제법 많이 손보고 닦았지만 댈 것도 아니었다. 과연 전문가가 다르긴 다르다. 주인장은 나중에 바닥이 미끄럽다 싶으면 다시 와서 밑창을 보강하라 권했는데, 완성된 샘플을 보니 내가 어설프게 해본 것보다 압도적으로 말끔해서 확실히 그럴 가치가 있겠다 싶었다. 나는 다음을 기약하고 평생 신을 신발을 장만한 듯 든든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다.
이후에 집에서 깔창을 새것으로 바꾸면서 알게 된 것인데, 바닥에 엉겨붙었던 폴리우레탄 쿠션이 거의 흔적도 없이 닦여 있었다. 즉, 바닥을 긁어내고 원단을 재단해서 접착제를 바르고 말리고 가열해서 붙이고 재봉틀로 박고 겉에 광을 내는 작업을 모두 거쳤는데 3만 원이었다는 말이다. 이만하면 일종의 경이감마저 느껴진다. 미안해서라도 평생 신어야 할 모양이다.
그나저나 여담인데, 그로부터 며칠 뒤에 이 신발을 신고 모임에 나가서 친구들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자니 한 명은 백화점에서 버리라고 했다는 대목에서 당연하다는 듯 “그럼 버려야겠네요.” 라고 반응했다. 악의가 있어서는 아니고, 단순히 물건을 고쳐서 수명을 연장하는 개념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경험 소비에만 돈을 아끼지 않고 물질 소비에는 대단히 검소한 친구인데도 물건의 주어진 수명을 별 생각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환경운동가들부터 나같은 취미 수리가까지 아무리 쓰던 거 고쳐서 잘 쓰자고 부르짖어도 대다수의 대중에게 목소리가 가닿지 않거나, 별로 감명을 주지 못하는 모양이다. 하기야 인간은 보상 없이 움직이지 않으니, 한국이 의류폐기물 수출량 세계 5위이든 말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가 싶기도 하다. 집에 있던 고급 브랜드 옷을 적당히만 티나게 입는 ‘올드 머니룩’에 이어서 수선한 부분이 돋보이는 패션이 유행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인간의 욕망이 그런 식으로 작동하진 않을 테니 당분간은 물건을 고쳐쓰니 좋다고 유난스럽게 떠드는 한편으로 프랑스처럼 수선장려금 제도가 도입되게 만드는 수밖에 없을 모양이다. 사회 변화는 개인적 실천 없이 이루어지지 않지만 그것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건 제도적 개혁이라는 걸 잊어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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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고 2023년 2차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에 선정된 저의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 지금도 절찬리에 판매중입니다.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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